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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의술, 한의학’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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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투합 한의사들 학회 설립, ‘침이 으뜸’이라는 동의보감 정신에 충실

서울 서초동 호일침한의원에 모인 호일침학회 회원들.

서울 서초동 호일침한의원에 모인 호일침학회 회원들.

의료시장 개방이 턱밑에 다가왔지만 한의학은 아직까지 다른 나라에 그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한의사라는 영어 명칭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OMD(Oriental Madicine Dactor) 혹은 KMD(Korea Madicine Doctor)로 혼용되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압도적인 시술 실력으로 독점적 브랜드를 지향하며 세계화에 대비하는 호일침학회가 있다.

호일침학회는 동의보감을 근거로 한 원인치료에 매료된 한의사 4명이 2003년 4월 모여 ‘한국의 의술, 한의학’의 뿌리를 찾자고 의기투합한 데서 시작됐다. 지금은 회원이 모두 190명이며 이들은 오늘도 임상결과를 놓고 분석하고 있다. 호일침학회 회장인 백승일 박사가 호일침학회의 발전상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다즉사침 일침위솔(多則四鍼 一鍼爲率·침을 많이 놓으면 4개이고 한 개의 침이 가장 우수하다). 일침이구삼약(一鍼 二灸 三藥·첫번째는 침이요, 두번째는 뜸이고 세번째가 약이다).

한방치료의 효능을 일갈한 동의보감의 경구다. 원인을 찾아 침을 놓으면 치료효과가 신속히 나타나며 굳이 침의 개수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구를 성경구절처럼 믿은 사람이 있다. 김광호 호일침한의원 대표원장이 그다. 그는 수많은 임상 치료를 통해 이 글귀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스스로 이를 ‘일침요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만 붙였을 뿐이지 새로운 침술은 아니다. 굳이 원리를 따진다면 동의보감의 기록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김광호 원장은 2001년 10월 ‘일침요법’에 대한 최초의 공개 강의을 열었다. 단순한 침법이나 침술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 동의보감 원전과 정통한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철저한 임상적 검증 끝에 마련된 학술 세미나였다. 김광호 원장의 메시지는 “한의학을 믿고 동의보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는 한의사와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옅어지고 양진한치(洋診韓治·양의학으로 진단하고 한의학으로 치료한다)의 매너리즘에 매몰되어 가는 풍조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었다. 나에겐 한의학의 원전에 근거해서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뛰어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한의사로서 ‘치료’가 아닌 ‘보약장수’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청량제였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장성봉·권오성 한의사가 그들이다. 강의에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임상실습을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구현됐다. 임상실습과 치료 그리고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임상효과, 그것은 한의사로서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천진중의대, 한·중 일침연구소 제안

김광일 원장이 2005년 중국 광도를 방문. ‘일침요법’ 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광일 원장이 2005년 중국 광도를 방문. ‘일침요법’ 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듬해 5월 어느 날 김광호 원장은 홀연히 ‘공부를 더 하겠다’며 한의원 문을 닫았다. 새로운 눈을 뜬 한의사들은 러시아로 의료봉사를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의원 폐업을 한 상태인 김광호 원장도 흔쾌히 동행해줬다. 2002년 7월 19일부터 8월 2일까지 보름간 러시아 의료봉사의 길에 올랐다. 떠나는 첫날 중간 기착지인 타시켄트 공항에서 약 5시간 정도 머물게 됐다. 참석자들은 ‘일침요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조직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모스크바 국립1병원 등에서 4박5일간의 의료봉사를 진행하였다. 첫날 약 2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난 후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한국에도 침이 있느냐. 중국침술을 배웠냐”고 묻던 사람들의 반응은 곧 “한국침 최고”로 바뀌었다. 결핵을 앓고 있던 ○○병원 부병원장의 부인, 7년 동안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아온 40대 남성 허리디스크 환자, 스키를 타다 타박상을 입은 병원 원장(재활의학과), 걷는 것조차 불편했던 한 러시아 여자 의사 등을 대상으로 즉석에서 치료 과정을 보여줬다. 그러자 이 병원에선 아예 일반 환자 예약을 받지 않고 병원 의사와 관계자들이 치료를 받겠다고 나섰다. 한의학이 ‘기적을 상식처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러시아에서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2004년 8월엔 일본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를 대상으로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원폭피해자인 한 여성 환자는 목 근육을 전혀 쓰지 못했다. 치료를 받고 돌아나가는 그는 “고맙스므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호일침학회는 지난해 텐진중의대에서 열린 세계침구학대회에 참가했다. 호일침학회가 이 대회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김광호 원장이 임상치료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과 함께 2시간의 특강이 진행됐다. 김광호 원장은 강연 말미에 “정통적인 중의의 달인이 되라”고 일갈했다. 중의학이 ‘군진의학(軍陣醫學:유물론적 사관에 기초한 중의가 외과위주의 양의학과 결합한 형태의 의학)’에 치중하면서 전통의 중의가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환자치료를 위한 시연도 했다. 한의와 중의는 원리에서 전혀 다르다. 한의는 좌통우치 우통좌치(통증부위 반대편에 침을 놓는 것)이며 많아야 4개에서 6개의 침을 놓는다. 반면 중국의 침은 환자를 고슴도치를 만들 정도로 많은 침을 놓는다. 그것도 환부 위주로 놓는다. 전혀 다른 침술을 본 천진중의대는 호일침학회에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 결실이 한·중일침연구소 창립을 위한 MOU 체결이었다. 텐진중의대는 중의학의 메카다. 이 대학이 국가 혹은 국가기관 이외에 공동연구소를 개설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장성봉·권오성 한의사와 나는 아예 ‘가출’을 했다. 나는 당시 꽤 잘되던 부산 한의원의 문을 닫았다. 당시에 아들이 둘 있었다. 출·퇴근도 없이 공동숙소에서, 많이 자면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한의사도 과로 앞에선 장사가 아니었다. 응급실에 세 번이나 실려갔다. 의술의 본질은 치료이고 완벽한 치료를 위해서 철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일침학회는 2005년 한의학 임상치료의 발전을 위해 킴스일침장학회를 발족시켰다.

호일침학회는 2005년 한의학 임상치료의 발전을 위해 킴스일침장학회를 발족시켰다.

2003년 4월 3일 대구 범어동에 ‘호일침한의원’을 김광호 원장과 함께 4명이 공동개업했다. 김광호 원장은 일주일에 4일 진료를 했다. 한의원 운영매뉴얼을 만들었다. 의료진료카드의 ‘규격화’도 추진했다. 그게 바로 ‘일침차트’다. 미국 호일침한의원 LA본점을 비롯, 현재 운영 중인 12개 호일침한의원에서는 똑같은 ‘일침카드’를 쓰고 있다. 호일침한의원은 다른 한의원에 비해 의료수가가 3배에서 6배나 비싸다. 명품마케팅 전략을 구사한 때문만은 아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구에 있을 당시 한 스님이 진료를 받았다. 진료비가 83만원이 나왔다. 스님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성철 스님에게 법문 한 마디를 들으려면 얼마를 드리십니까”라고 대꾸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 성철 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서는 3000배를 해야 한다는 얘기에 빗대서 최고 진료를 하고 있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치료효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의사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고객에 대한 의사의 최대 서비스는 치료다. 이런 자신감 역시 끝없는 탐구와 임상치료에서 나온 것이다.

‘새로운 의학’으로 세계진출 꿈

이런 토대에서 지난해부터 한·양의 협진도 주도하고 있다. 부산 호일침한의원 본점에서 성형외과와 함께 협진을 하고 있다. 한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원에게 “우리와 협진을 하면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자 그는 전혀 믿는 기색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쌍꺼풀 수술을 한 환자에게 침을 놓고 부은 눈이 곧 가라앉는 것을 목격시켜 주었다. 또 지방흡입술을 받은 환자(지방흡입술을 받으면 상체 거의 전부가 멍이 들고 만질수도 없는 통증을 느낌)에게 시술하여, 치료기간을 절반 이상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즉시 협진 약속을 얻어낼 수 있었다. 부산은 특히 한국에서 성형수술을 원하는 일본인들이 많은 곳이다.

러시아 의료봉사를 갔을때 모스크바1병원 관계자들과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 호일침학회 회원들.

러시아 의료봉사를 갔을때 모스크바1병원 관계자들과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 호일침학회 회원들.

2002년 11월 학회가 공식 출범할 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500만 원의 입회비와 연간 100만 원의 연회비를 걸고 회원을 모집했다. 고액의 입회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호응을 받았다. 총 58명의 1기 회원으로 학회가 구성됐다. 학회 설립 초기인 1기 회원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동의보감의 의술을 익혀갔다.

1기생들이 수료하는 자리에서 2기생의 입회비를 결정했다. 입회비 1000만 원에 연회비를 200만 원, 각각 처음보다 100% 인상하기로 결론이 났다. 이는 동의보감을 통해 정통 한의학을 공부하고, ‘일침요법’을 통해 새롭게 한의학에 눈을 뜨게 된 회원들의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또 소중한 것을 함부로 내어 놓지 않고 가치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호일침학회는 단순히 강좌를 개설하거나 수강료를 받고 강의를 해주는 곳이 아니라 정말 뜻을 갖고 진지하게 학문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해야만 함께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학문의 전달자 역할만으로는 ‘일침요법’이 바로 설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2001년 11월 ‘민족의학신문사’가 주최한 김광호 원장의 ‘일침요법’ 강의는 단연 화제가 됐다. 수강생 규모(한의사 220명)와 반응, 강의료 등등…. 당시 약 2억4000여만 원의 강의료 수입이 발생했다. 김광호 원장은 강의료 수입 중 3000만 원을 세 분의 한의대 교수님께 연구비로 쾌척했다. 또 강의비용(장소 및 시설 대여)을 제외한 전액을 민족의학신문사에 기부했다.

이것이 출발이 되어 2002년 2회째부터는 학회 재정에서 자금을 마련해 기부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2006년까지 매년 3000만원씩을 교수 연구비로 수여하여 왔다. 한편 2004년에는 ‘동의보감 경시대회’를 개최하여 전국한의과대학학생 약 150명이 응시하였고 이중 8명에게 1500만원의 장학금(상금)을 지급하였다.

호일침학회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회원들과 함께 외부 강의도 하고 여러 수익사업도 하여 기금을 조성한 다음, 우리나라 의학 전반을 이끌어갈 인재를 찾고 지원하는 비영리장학재단의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다. 태권도가 세계로 뻗어나가듯, 한의학이 양의학의 대체의학이 아니라 새로운 의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승일 호일침학회 회장 dydbae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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