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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침술’ 자연요법으로 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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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기’ 개념 확산으로 관심 높아… 중의학 판치고 한국침술 설자리 잃어

미국 LA에 있는 동국로얄 한의대에서 이혜원 교수가 학생들에게 혈자리를 교육시키고 있다.

미국 LA에 있는 동국로얄 한의대에서 이혜원 교수가 학생들에게 혈자리를 교육시키고 있다.

미국에서의 한의학을 얘기하자면 우선 개념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한약과 침술을 합쳐 ‘한의학’이라고 불러도 혼선이 없겠지만 미국에서의 한의학 또는 침술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이것들 외에 몇 가지 개념 설정이 필요하다.

우선 ‘한의학’ 또는 ‘한방’은 미국의 한국 동포들에게 두루 쓰이는 말로써 한국의 한의원에서 치료하는 내용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의사들은 미국 현지의 한의대에서 공부를 하고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의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거의 ‘중의학’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각급 한의과 대학에서 쓰이는 교재들은 대부분이 중의학을 다룬 것이거나 중의학을 기초로 한 영문 교재들이다. 물론 면허 시험도 중의학을 토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한국의 한의학 교재는 미국에서 학교 교재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물론 중의학과 한의학의 기본 원리나 다루는 내용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미국에선 ‘한의학’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 셈이다. 다만 한국 동포들만이 광범위한 한방 치료를 포괄적으로 ‘한의학’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전역에 한의사 3만여 명

미국인들은 주로 동양의학(Oriental Medicine) 또는 중의학(Chinese Medicine)으로 부르고 있으며 한의사는 ‘침구사(Acupuncturist)’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침과 한약을 다루는 면허를 각기 따로 부여하기 때문에 한약사(Herbalist)만으로 활동하는 의료인도 있다. 서술상의 편리를 위해 침은 ‘침술’, 침과 한약을 합친 치료 개념을 ‘한방’으로 표현하기로 하자.

LA에 있는 사우스베일로 한의과 대학 병원에서 수퍼바이저로부터 인턴 실습을 받고 있는 인턴들.

LA에 있는 사우스베일로 한의과 대학 병원에서 수퍼바이저로부터 인턴 실습을 받고 있는 인턴들.

한의원 가는 이유는 침 맞기 위해

미국인들이 한방치료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재 한의대로 등록돼 있는 학교만 해도 미 전역에 50여 곳에 달하고 있으며 LA를 비롯한 캘리포니아에는 13개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한의사만 해도 미 전역에 약 3만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에만 6~7천명이 개업하고 있다. 이렇듯 한방 치료가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이다. 소수계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한방을 포함한 대체의학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 전문직종 미국인들이 한방치료에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LA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산타모니카가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거주 지역이다. 이 지역에 산타모니카 블러바드를 따라 100여 개가 넘는 한의원이 들어서 있다. 거의 한 블록마다 하나씩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상가 렌트비도 매우 비싼 이 지역에 늘어선 한의원들을 보면 과연 수지를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지역 한의원들은 소위 ‘잘나가는 한의원’에 속한다.

비벌리힐스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은정 한의사가 비만환자에게 이침요법을 하고 있다.

비벌리힐스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은정 한의사가 비만환자에게 이침요법을 하고 있다.

환자의 거의 대부분이 백인들이고 이들은 주로 보장성이 매우 좋은 보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곳 한의원들의 수입은 꽤 괜찮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환자들은 주로 침을 맞기 위해서 온다. 미국인들에게는 이미 ‘아큐펑쳐(Acupuncture: 침구)’가 신비로운 치료술을 보여주는 대체의학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한국인들처럼 보약을 먹기 위해, 또는 치료약으로 한약을 짓기 위해 한의원을 찾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

주로 관절이나 어깨 통증, 두통, 허리 통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 찾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한방 매니아들은 그저 침을 맞으면 기(생체 에너지)조절이 되기 때문에 편안하고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이유로 찾기도 한다.

산타모니카에 위치한 한의원들의 대부분은 중국계 이민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 역사가 오래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중의학을 국제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실이기도 하다. 산타모니카 지역 한의원을 즐겨 찾는 미국인 로버트 밥우드(44.영화촬영기사)는 “침을 맞고 약 30분 정도 누워 있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스트레스가 조절되는 것 같아서 습관처럼 찾고 있다”고 했다.

미국인들에게 침술이 통하게 된 데는 각종 기수련, 요가 등의 보급으로 ‘기’에 대한 개념이 널리 퍼진 것과도 무관치 않다. 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어김없이 요가 클래스가 있고, 한국의 단월드가 보급한 ‘단요가 센터’도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백인들에게 동양적인 심신 수련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기’ ‘인체 에너지’에 대한 개념이 확산됐으며, 이는 곧 침술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침술과 한약이 대표적인 ‘자연요법’으로 인식되면서 몸에 부작용이 없고 자연치료를 지향하는 한방진료가 미국인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의원을 찾는 미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요가나 선(Zen) 명상 등을 하고 있거나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며, 대증요법의 서양의학보다 원인치료에 주목하는 대체의학을 신봉하고 있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미국인들이 침술만 좋아하고 한약은 무조건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한약’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지 침술로 효과를 본 환자들은 대개 한약 복용에 대해서도 수긍하고 이를 복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침을 통해 동양의학의 효능을 경험한 환자들은 한약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벌리힐스(Beverly Hills)에서 주로 부유층 백인들을 상대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은정씨(38)는 클리닉에 많은 종류의 한약재를 비치하고 있다. “백인들이 잘 찾느냐”는 말에 “침을 맞은 사람에게 설명하면 잘 먹는 편”이라고 했다. 이런 백인들의 심리를 활용해 침술과 한약을 병행하면서 수완 좋게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들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국인들처럼 보약이나 탕약보다는 정제로 만든 한방 알약을 많이 찾고 있다.

양의들도 침술 배워 치료에 활용

침술을 포함한 한방치료가 미국인들에게 점점 인기를 얻어가면서 학계에서도 이와 관련한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미 하버드 대학에는 양-한방 협진 연구센터가 가동중에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도 침술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물로 이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뉴스위크’를 포함한 주요 언론에서도 침술의 효능을 집중적으로 다룬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수 양의사들은 침술을 별도로 배워 치료에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침술이 미국인들의 저변을 확대하면서 한의대를 노크하는 미국인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선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하고는 전국한방면허위원회(NCCAOM: National Certification Commission For Acupuncture and Oriental Medicine)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뒤 일부 주정부에서 요구하는 추가 조건만 갖추면 면허를 받을 수 있다. 즉 캘리포니아주만 자체 시험을 치러 면허를 발급하고 있고 그밖에는 NCCAOM의 면허 시험만으로 클리닉을 오픈할 수 있다.

NCCAOM의 시험을 거쳐 한 해 배출되는 한의사만 해도 2~3천 명에 달할 정도이며 현재 미국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의사 중 80% 이상이 미국인으로 추정될 정도로 미국인들의 한의사 진출 속도는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50여 곳에 달하는 미국의 한의대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재는 거의 ‘중의학’ 교재들이다. 면허 시험이 중의학을 기초로 출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찌감치 중국계 학자 또는 중의학을 배운 외국 학자들이 영문 서적들을 대거 출간했기 때문에 영어 교재는 거의 ‘중의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미국에서 영어로 중의학을 공부한 미국인들은 임상 결과 등을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학회지 등을 통해 발표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 흐름 속에 한인 한의사들은 중국계 한의사들에 거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다. 이곳 현지에서 중의학을 공부한 한인들은 “미국의 중의학이 거꾸로 한국으로 역수입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대한 국제화 흐름을 타고 있는 표준 한방으로서의 중의학 위상에 한의학이 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비관적인 예상 때문이다.

“미국 중의학이 곧 한국으로 역수입”

침을 통해 동양의학의 효능을 본 미국인들이 탕약 등에도 관심을 갖고있다.

침을 통해 동양의학의 효능을 본 미국인들이 탕약 등에도 관심을 갖고있다.

한의대에서 중의학 교재와 한의학 교재에 따라 한약재 성능이나 침자리(혈) 등이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럴 경우 중의학 교재의 내용을 우선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물론이다. LA한인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동국로얄 한의과 대학의 임상 교수이자 침구학 교수인 이혜원 교수는 “미국에서 한의학 이론은 모두 중의학으로 보면 된다.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 교재는 파고들 틈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에선 ‘한의학’은 없고 ‘중의학’이 판을 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

이처럼 미국 한의대에서 가르치는 중의학을 공부한 한의사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침술’의 영역은 좁을 수밖에 없다. 한국어 강의가 개설되어 있는 LA의 5~6개 한의대에서는 사상침법·일침요법 등 한국식 침법을 한 학기 정도 강의하고 있지만 정규 커리큘럼의 보조적인 의미밖에는 안 되는 실정이다. 이 같은 한국식 침법을 내세우며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오직 LA, 뉴욕 등의 한인사회에만 있을 뿐, 미국인들에게는 아직 개념조차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LA에서는 전통침법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하는 침술가들이 고액의 과외비를 받고 한인 한의사들에게 이를 ‘비법’으로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한의대에서는 면허시험을 보기 위해 일정 기간 레지던트 기간을 거치며 환자를 치료하도록 하고 있는데, 모든 침술은 중의학 교과서에 의거한 ‘표준’ 침법을 위주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LA권 한의대에서 한국인 교수가 수퍼바이저로 재직하고 있을 경우 한국 침법이 구사되기도 하지만 보조적인 침법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인사회를 주 고객층으로 하는 한의사들은 저마다 ‘신비의 침법’을 내세우며 과장 광고를 일삼고 한인들은 ‘믿을 만한 한의사를 구할 수가 없다’며 서로 불신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을 상대로 진료를 하고 있는 한의사들은 교과서 수준의 정통 침법만으로도 ‘명의’ 소리를 들으며 미국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어 대조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의 한의학은 침술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약은 침술의 보조적인 위치일 뿐이다. 한인타운에선 한국식으로 보약이나 치료약을 위주로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인 한의사들이 많지만 한인타운을 벗어나면 거의가 침술로 승부를 하고 있다.

한방·양방 관련법안 힘겨루기

한방치료가 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어가면서 미국 양의사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한의사 관련 각종 법안들의 처리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해말에는 침술 치료 관련한 AB2152 법안이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기각되었는데 이 법안은 한의사 면허 없는 양의사들이 침술 치료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방업계의 기대를 모아 왔었다.

지난 97년 통과된 AB174법은 정형외과·외과·정신과·치과·발전문의 등은 별도 한의사 면허 없이도 양의사들이 일정 시간 교육을 받으면 침술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 한방업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침술치료의 워컴(Workers’ Compensation system·종업원상해보험) 혜택 포함 법안도 지난해 무산됐다.

미국에서는 종업원을 고용하는 모든 업소들이 워컴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여기에 한방치료를 포함시킬 경우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이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부상당한 종업원에게 필요하다면 침술치료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캘리포니아주에는 관련 치료법에 대한 허가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다. 워컴이 침술치료 혜택도 포함하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난 후에 서명 여부를 다시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밖에 한방 진단권이 법으로 명시되지 않아 수시로 양의사협회로부터 ‘진단권 박탈’ 위협에 시달려온 한의사들은 지난해 ‘한방 진단권 명시’ 규정을 담은 법안을 상정했으나 이 또한 양의사협회의 집요한 로비로 무산된 바 있다. 또한 한의사 면허 취득을 위한 레지던트 기간을 늘렸는가 하면 2년마다 갱신하는 한의사 보수교육 시간도 30시간에서 50시간으로 늘렸다. 이처럼 한방 진료의 수요층이 넓어지면서 한방과 양방의 힘겨루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원영 LA중앙일보 경제부장·캘리포니아주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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