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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자본, 한의학 시장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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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과학화·한약재 표준화 통해 경쟁력 있는 의학으로 올라서야

한·미FTA 반대시위대가 지난 1월 15일 미국측 FTA협상단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훈 기자>

한·미FTA 반대시위대가 지난 1월 15일 미국측 FTA협상단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훈 기자>

‘노후가 보장되면서도 격무가 없는’ 전문직으로 단연 한의사가 꼽힌다. 포항공대 수석 입학·졸업자가 졸업 후 다시 지방 한의대에 입학할 정도로 한의사는 ‘매력적인’ 직업이 되어가고 있다.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직업으로서 한의사가 거쳐야 하는 모든 경쟁은 끝나게 된다. 또한 사회적 명성, 고소득, 편한 업무, 위험에의 노출 수위가 낮다는 점 등 ‘철밥통’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 한의사는 그랬다.

이 같은 사정은 개별 한의사를 넘어 한의사 업계 전체를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업계 전반이 ‘명의’라는 이름이 붙은 몇몇 특정인의 개인적 명성과 업적에 의존해 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한의사는 “임상 중심의 ‘스타 한의사’는 더러 있지만 한의사계는 사실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지난 1월 한 달은 한의사 업계의 ‘비상시국’이었다. FTA의 파고가 한의사들에게도 몰아닥친 것이다. 한·미FTA 협상 테이블에 한국 한의사와 미국 침술사의 자격 상호인정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전국 1만6000명의 한의사들이 지난 1월 10일 일제히 ‘1일 파업’을 단행하는 단결력을 보였다. ‘국민건강수호를 위한 전국 한의사 비상총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총궐기대회도 가진 것이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학제와 학과과정 등이 근본적으로 달라 한·미FTA에서 한의학 개방 논의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있다. 한의사 시장개방이 ‘현실성 없음’으로 가닥이 잡히자 떠들썩했던 한의학계에는 연말연초의 소란스럽던 분위기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 한의사·미국 침술사 교류 요구

그러나 이 같은 ‘안도감’도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우리 쪽에서 주장하는 한국 의료체제의 특이성(한·양의학 이원화)도 개방 압력을 막아낼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님을 한의학계도 인정하고 있다. 한의사 시장개방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이다. 의료시장개방의 가장 큰 쟁점은 외국자본의 의한 영리법인인 병원의 설립이다. 강연석 민족의학신문 사무총장(한의사)은 “의료행위는 문화장벽이 높은 분야이기 때문에 의료진의 교류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고 전제하면서 “특히 한방 분야는 양방에 비해 문화적 벽이 훨씬 더 높다”고 말했다. 강 사무총장은 “그러나 문제는 의료 시장이 개방되면 거대 자본이 들어와서 최고의 의료진을 흡수해갈 것”이라면서 또 “문화적 차이가 적은 중국과는 의료인력의 이동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의료인력 ‘이동’의 의미가 ‘왕래’가 아니라 ‘유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중국이 벌써부터 의료인력 이동의 허용을 우리 측에 요구해 오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은 중의학을 앞세워 우리나라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민족의학자인 탁성훈씨가 한 환자의 손을 살펴보고 있다. <박원태 기자>

민족의학자인 탁성훈씨가 한 환자의 손을 살펴보고 있다. <박원태 기자>

문제는 중의학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한다면 딱히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종수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베이징중의대·텐진중의대 등 일부 대학은 경희대 커리큘럼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면서 “물론 한국 시장을 겨냥한 것”이라고 긴장감을 드러냈다. 중국은 2003년 이후 매년 300억~500억 원 상당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하고 있다. 특히 중의학의 메카로 불리는 텐진중의대는 정부지원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1년에 40여 개국에서 수천 명이 중의학 치료를 받고 하루 내원환자는 5000여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투자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러울 정도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 동안 한방치료기술 연구개발비 예산은 고작 328억4000만 원이었다. 또 중국은 의사 자격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의사면허 합격률은 15%에 불과하다. 반면 한국은 한·양의학 모두 80%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수만 명에 이르는 미국 침구사도 위협적인 요소이다. 미국 침구사 중에는 한국인이 약 1만6000명 포함되어 있으며 중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한국 내 면허자격을 갖춘 한의사는 1만6000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일부만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한의학 시장이 교란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거대자본, 최고 의료진 흡수해갈 것

시장개방에 대비한 한의학계의 체질 개선도 절박하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한의학계는 아직까지 느긋하기만 하다. 한의학의 세계화란 국내 시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한방’을 ‘세계의 의학’으로 도약시키기 위한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한의학의 정체성 확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중국과 일본 정부는 의사에게 양의학과 중의학 병행치료가 가능한 자격을 부여한다. 진단은 누가 해도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의료의 원칙이다. 치료방법은 달라도 효과는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의학의 진리이다. 그런 전제에서 치료방법의 선택권을 의사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동서결합(東西結合: 양의학으로 진료하고 중의학으로 치료함)를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국 의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의료행위를 할 경우, 그들은 양의사와 중의사 두 가지의 자격을 갖고 있어서 자신의 편의에 따라 치료방법을 달리할 수 있다. 이종수 교수는 “우리는 CT나 MRI 같은 첨단진료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혈액검사도 양의학 병원에 위탁해야 한다”면서 “이는 본질적으로 정책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의사 시장의 개방에 앞선 대전제는 의료법 개정이라는 것이다. 박시한의원 박철수 원장은 “의료법만 제대로 되어 있어도 한의사 개방에 대비할 수 있다”면서 “결단코 침구사 등 유사의료 행위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의대와 법대를 거쳐 경의해 한의대에 편입학해 언론에 주목을 받았던 최용규씨. <박형주 기자>

서울대 의대와 법대를 거쳐 경의해 한의대에 편입학해 언론에 주목을 받았던 최용규씨. <박형주 기자>

중의사의 한국 진출이 크게 위협적인 반면 우리나라 한의사의 중국 진출은 바라기 어려운 일이다. 박철수 원장은 “중국에서는 한국의 의사면허증을 활용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근본적으로 중국에서 보는 중의학과 한의학의 체제가 서로 다르고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돈벌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침구사는 진단권이 없는 유사의료 행위자이다. 정규 의료인력이 아니다. 의료체계가 ‘한의사’와 ‘의사’로 이원화되어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한의사가 개인적으로 미국에 진출하려면 ‘의사’로 취업비자를 얻게 되지만 막상 미국 내에서는 의사가 아닌 침구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는 한의사 아닌 침구사만이 존재하고 침시술은 의료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철수 원장은 “본국에 없는 한의사 면허를 한국을 위해 만들 리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결국 한의사 중에 누가 침구사 대접을 받으면서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 미국으로 나가겠느냐는 얘기이다.

문제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를 해온 것 아니냐는 게 한의학계의 지적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법조항들도 있다. ‘한의원에서는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의 행위를 할 수 없고…(의정 65507-914)’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종수 교수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결국 한의학계에서 나서 찾아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한의학계 자체적으로도 정체성 논의를 진지하게 전개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한의사는 “양의학을 통한 진단을 거부하는 한의사들이 거의 절반이나 된다”고 말했다. 한의학의 정체성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이다. 한의사들의 이 같은 태도는 결국 불합리한 의료제도 논쟁과 함께 진료자율권의 침해논란을 낳아 한의사의 경쟁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장기적 관점선 우리에게도 기회

다행히도 최근 들어 학계와 업계 내부로부터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으며 정부 차원의 개선 의지도 점차 확고해지고 있다. 정부는 양·한의학의 공동개업을 가능토록 법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오는 7월부터는 병원경영 지주회사의 설립이 허용될 방침이다. 이는 2005년 10월에 추진됐던 국내외 영리법인의 의료기관 설립 허용보다는 다소 후퇴한 것이다. 하지만 한의사가 양의사를 고용하고 양의사도 한의사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한·양의학 공동개업). 사실상 한·양의학의 일원화 즉 한·양의학의 협진이 법제화된 셈이다. 백승일 박사(한의사·호일침학회 회장)는 “이는 민간인이 한·양의사를 고용할 수 있는 영리병원법인으로 가는 중간단계”라고 규정하고 “한·양의사들이 출자해서 프랜차이즈 병원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법인 형태로 개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개방에 대비한 또 다른 핵심은 진단의 과학화와 한약재의 표준화이다. 표준화와 과학화는 한의학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안전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중대한 문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한의사계에서는 ‘한의사의 적은 농수산물 홈쇼핑’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농수산물 홈쇼핑에서 ‘보약(강장식품)’까지 판매하고 있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어느 한의사는 “고객들이 왜 ‘보약’마저도 홈쇼핑에서 사겠느냐”고 물으면서 “결국 한의사들의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자답했다. 그는 이어 “이제 (당연히 침 치료를 찾던) 중풍환자도 한의사를 찾지 않는다”면서 “치료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보약)장사나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개방은 뒤집어서 얘기하면 곧 세계화다. 한의학 세계화의 대전제는 재현성(같은 치료에 같은 치료효과), 객관성(같은 증상에 똑같은 치료), 체계성(진단 및 임상의 조직화) 등이다. 그러나 일상적 치료용어조차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진료차트도 통일성을 갖지 못했다 . 이런 상황에서 한의학의 세계화는 요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부분은 정부보다는 한의학 스스로 규칙을 정해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한의학계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부도 최근 한약재의 표준화와 안전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는 식품(의약품 포함) 위해물질 정밀검사 대상을 현행 94종목에서 2010년까지 520종목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 한약재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품질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우수한약재배관리기준, 우수한약제조관리기준, 우수한약유통관리기준 등 한약 관리기준도 마련해 2010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대체의학 시장은 지난 2002년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그렇다면 한의사 시장이 개방된 뒤 우리 한의학은 세계시장과의 경쟁 속에서 얼마만큼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백승일 박사는 “시장이 개방되면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우리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장은 중국과 미국인들에게 한국시장이 매력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곧 역전되어 한의학이 세계시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백승일 박사는 “서양 사람이 쓴 책으로, 그들이 만든 치료기기를 갖고 그들에게 배운 기술로, 그것도 소자본으로는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며 “그러나 한의학은 한국만의 뛰어난 인력과 기술로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개방, 그것은 곧 세계의 고객으로부터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코 국가가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의학계의 대비가 그만큼 많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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