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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침으로 부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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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없는 고소득 전문직종. 보약을 지어 파는데 안주한 한의학. 세계화라는 거대한 파고의 한가운데 섰다. 전통침의 재발견과 표준화를 통해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는데… 위기의 한의학을 되살릴 방안은 없는 걸까?

경락이 표시된 목각인형. <김재구 기자>

경락이 표시된 목각인형. <김재구 기자>

한의학이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한의학은 ‘세계화’라는 거대한 파고의 한가운데 있다. 좋든 싫든 세계화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한의학 역시 이 도전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바로 이 접점에서 위기와 기회가 양날의 칼처럼 한의학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세계 시장을 먹느냐, 아니면 세계 시장에 먹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다.

의료시장 개방은 어제 오늘의 화두가 아니다.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실상이다. 한의사 시장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한의사가 한국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이미 마련돼 있다. 한의대를 졸업해 닥터 면허증을 지닌 외국인 한의사가 한국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면 국내 활동이 가능하다. 자격 미달로 간주된 미국의 침구사들은 제외돼 있기 때문에 한·미 FTA 협상에서 이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르면 5년 늦어도 10년 안에 개방

설사 한의사 시장 개방이 미뤄진다 해도 결국 올 것은 오고야 만다. 무한정 개방의 시기를 늦출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안에 의료시장이 완전 개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년이 없는 고소득 전문직종으로, 보약을 지어 파는 데에만 안주해서는 한의학의 미래는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 확실하다.

세계적으로 전통의약에 대한 시장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1998년 850억 달러에서 2002년 1000억 달러, 2006년에는 1500억 달러로 증가했다. WHO 보고에 따르면 서구, 북미 인구의 50% 이상이 전통의약 이용 경험이 있다. 고령화 사회가 더욱 진전되고 만성·난치성 질환의 치료가 의학계의 핵심 테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양 전통의학의 장래는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한의학계 내에서는 현안이 되고 있는 의료시장 개방 문제도 세계 시장 확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적극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형주 한국한의학연구원장은 “의료시장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한약 제품과 한방 의료기기 등의 연구와 개발에 집중 투자해 국내외 시장을 넓혀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의학 치료는 첫번째가 침술

한의학의 위기를 전통침의 재발견, 표준화를 통한 세계화로 돌파해야 한다는 의견도 강력히 개진되고 있다. 정부 투자 한의학 연구소인 ‘한국한의학연구소’는 최근 ‘침구경락연구 거점기반 구축사업’을 적극적으로 드라이브하고 있다. 한국 침구치료기술의 효능검증과 기전연구를 통한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여 한국 침구학을 세계화하기 위한 연구 수행이다. ▲임상 실태조사를 통한 우수한 한국 침구치료기술을 발굴하고 ▲그 효능 검증 자료를 체계적으로 축적하며 ▲임상시험을 통해 침구치료기술의 안전성·유효성 평가 연구를 하며 ▲치료기전규명 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최선미 의료연구부장은 “한의학의 발전은 치료기술의 발전”으로 규정하며 침구학을 한의학 치료의 으뜸으로 간주했다.

“한의학의 치료는 첫 번째가 침이고 두 번째가 뜸이며, 다음이 약이다. 침구치료는 경락의 경혈을 자극하여 치료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한의사와 침·뜸만 있으면 되는 경제적인 치료방법이다. 임상효능에 대한 검증과 기전 규명 연구가 뒷받침되어 경혈 자극에 과학적 데이터가 축적돼야 한다. 침구학의 발전을 통해 한의학의 진단·치료분야는 획기적으로 현대화할 수 있다.”

대전대 한의학과 홍권의 교수(침구학)는 “한의학에서 침술은 저비용 고효율, 부작용이 없다는 점에서 한의학 고유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분야”로 규정했다. 홍 교수는 그러나 “한국에서의 광범위한 침술 보급에도 불구하고 침구학의 논문이나 새로운 연구 성과는 미국, 유럽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침술에서의 연구 성과가 미흡한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침구학의 트렌드가 중국의 ‘변증요법’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변증요법’이란 예컨대 ‘어떤 혈에 침을 놓으면 요통이 사라진다’는 식의 치료술이다. 요통의 다양한 원인에 대한 고찰보다 혈의 위치와 병증의 관계를 파고드는 침술이라는 얘기다. 홍 교수는 연구 성과의 풍성함이 치료술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쪽에서는 침술을 아직도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한의사 전원이 침술을 연구하고 직접 진료에 활용하지만 미국의 경우 연구자와 침구사는 엄격히 분리돼 존재한다. 일상적으로 침을 활용해 우수한 임상 실적을 거두는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침구술이 탁월하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 중국의 중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TCM)이 세계시장에서 동양의학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중국인은 우선 중의와 중약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생각한다. 국민보건에도 중요하고 산업적 차원에서도 잠재력이 엄청난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중의학의 발전을 위해 서양의학과 동일한 정도의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연구열도 대단히 뜨겁다. 한·중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베이징중의약대에 입학, 학부과정을 졸업한 뒤 석·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인근(金仁根·44) 박사. 그는 중의사면허시험(中醫職業醫師資格考査)에도 합격해 중의사 자격을 딴 중국유학 1세대다. 그는 중국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마치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었다. 오전수업 4시간, 오후수업 4시간으로 한마디로 강행군이다. 명색이 대학이라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흔한 축제도 없다. 교수가 강의를 하는데, 첫 시간에 들어오자마자 교과서 진도를 나간다. 어떤 교수는 자기 이름 소개도 안 하고 진도부터 나간다. 그래서 한 번은 첫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 성함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냥 칠판에 이름만 쓰고 나갔다. 물론 수업시간에 농담도 거의 없다.”

중국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이렇게 타이트한 이유는 가혹한 평가제도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제도가 있다. 예컨대 어떤 교수가 상을 당해 이틀 간 결강했다면 결강한 수업을 반드시 보충해야 한다. 학생이 학교측에 투서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므로 학교 안에서 수업하고 먹고 자고 다시 수업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동양의학 대표브랜드는 중의학

중의약대를 졸업한 한국유학생에 대해 한국 내에서 한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귀국해도 배운 것을 활용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대개 제약회사에 취업한다든가 경동시장에서 일을 한다. 아예 전업한 유학생도 많다. 중국어학원 강사나 무역업 등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한국 한의학계의 폐쇄성을 이렇게 질타한다.

“실력 면에서 볼 때 유학생 출신이 국내 한의과대학을 나온 사람과 겨루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다만 국내에서는 한의대 입학하기가 무척 어려우니 중국유학은 쉽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똑같은 자격을 주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한의업계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2000년 이후 한의사의 숫자가 이미 포화상태라는 지적이 업계 내부에서 일고 있다. 현재 1만6000명 정도의 한의사가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년 800명 가량의 졸업생이 배출되며 이들의 99% 이상이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중의학을 전공해도 15% 정도만 합격하는 중국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르다. 업계에서는 외국에서 3000명 정도의 한의사만 몰려와도 한의학계는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 한의대는 커리큘럼만으로는 학생들의 연구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침구학의 경우에서도 교수진이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수의 한의대생이 방과 후 유명 한의사를 찾아가 침술을 배우거나 원전을 공부한다. 방학이 되면 한 달씩 동아리를 조직해 ‘동의보감’을 공부하고, 학교 게시판을 통해 모인 일행과 함께 합숙 스터디 MT를 떠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1950년대 이후 전통의학 자원 확보와 중약사업 관리를 강화시키는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구체적인 정책 실천으로 중의의 의료서비스 체계를 정비하고 중약을 현대화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중의학이 세계 전통의학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중의약 교육을 개혁하고 과학기술을 도입한 연구발전에 투자하고, 대외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한국한의학연구소 최선미 의료연구부장은 중국 중의학의 현 단계를 이렇게 진단했다.

“중의학계는 중의학의 이론을 보급하기 위해 이론서의 영역화를 시도했다. 민간 차원의 학술교류와 정부 대 정부의 협약 강화로 중의 이론서가 세계 각국의 교육기관에 제공된 것이다. 수많은 중의 의료 인력이 세계 의료시장 현장에 진출하였으며, 각국의 의료인이 중국에 유학와서 중의학을 교육받을 수 있도록 교육체계를 개혁했다. 중국의 침구학은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인 제임스 레스턴이 수술 후 복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중국 의사들이 침을 사용하는 것을 기사화했다. 이 기사가 회자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중의학 연구 붐을 일으켰고 많은 세계 의료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동양 전통의학의 기술을 보급받게 됐다.”

한국 한의학의 세계화는 아직 요원하다. 우리 한의학의 국가경쟁력이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갈 길이 매우 멀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한의학의 경쟁력이 ‘근거 중심 의학’(Evidence Based Medicine : EBM)으로서의 토대를 충분히 확보했는가의 여부로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근거 중심 의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연구 성과가 축적돼야 하는데 국가의 정책적인 투자는 아직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여전히 기본적으로 학문이 유지될 수 있는 정도의 투자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의 수준이다. 한의학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지고 의료기술 향상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한의학의 세계화는 그 시기를 앞당기기 어렵다.

한중일 3국 침놓는 자리도 달라

근거 중심 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전통과 현대의 과학기술을 결합해야 한다. 한의학의 진단·치료 기술의 표준화와 과학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WHO(세계보건기구) 전통의학 자문관으로 임명된 최승훈 교수(경희대 한의대)가 이 분야에 독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 교수는 한의학의 전통 침술이 신경계통과 통증질환 치료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전통의학을 활용하는 국가 간 상호교류가 적어 세계화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의학 용어의 한자 및 영어표기 통일과 학술용어의 표준화 작업에 착수했다.

“한방의 핵심분야인 침구혈만 놓고 보더라도 한·중·일 3국이 침을 놓는 자리가 다르다. 용어 통일과 함께 각종 진단과 처방에 대한 표준 제정작업이 절실하다.”

작년 11월 일본 쓰쿠바 시에서 열린 ‘경혈부위 국제표준화 공식회의’에서 이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회의에 참석한 3개국 대표들은 침구학의 고전으로 서기 3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 등을 참고로 표준화 작업에 착수, 3년 간 격론을 벌인 끝에 기본적인 합의를 이루고 경혈의 국제표준화를 정식 채택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한·미 FTA 협상에서 불거진 한의사 시장개방 논의를 계기로 한방의 과학화·세계화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2002년 1000억 달러에 불과했던 세계 대체의학 시장이 내년에 2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올해 한방치료기술 예산으로 80억 원을 지원하는 등 오는 2010년까지 한의학 연구개발(R&D) 등에 1471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올해 39억 원을 들여 공공의료기관에 한방진료부를 설치하는 한편, 뇌혈관 질환(중풍·치매) 등 만성 난치성 질환 치료에 한의학 이론을 적용 연구하는 기관에 30억 원의 출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향후 한·중 FTA로 중의학이 한국시장에 진출할 경우에 대비해 한의학 경쟁력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보고 내년 개교 예정인 국립한의학전문대학원(부산대)의 조기 활성화 방안을 찾기로 했다.

문제는 정부 정책만으로 한의업계의 위기가 타파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갈수록 뛰어난 인재들이 한의사를 지망하고 있지만 정작 순수학문으로서의 한의학 연구에 대한 열정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희대 최승훈 교수는 “후배들의 한의학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이 중요하다. 한의사가 된 후 단 열매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연구에 전념하는 풍토가 아쉽다”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외부의 위협을 문제삼기 이전에 내부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한기홍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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