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나의 기록을 적에게 넘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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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기록물 둘러싼 신·구정권 갈등… 입법 취지 손상 정치 보복 활용 위험성

지난 2006년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정과 관련한 공청회 모습. <경향신문>

지난 2006년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정과 관련한 공청회 모습. <경향신문>

휴대용 PDA ‘블랙베리’ 마니아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해 1월 백악관 입성과 동시에 무선 이메일 송·수신이 가능한 이 장치를 빼앗길 뻔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유출 시 발생할 수 있는 보안상 문제다. 다른 하나는 1978년 제정된 미국의 대통령기록물법 규정과 관련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재임 중 대통령이 사용하는 이메일은 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 재산에 해당하는 ‘대통령기록물’로 간주돼 퇴임 이후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로 넘어가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는 백악관 입성과 동시에 이전에 사용하던 이메일 주소 대신 백악관 이메일 주소를 사용해야 한다. 결국 몇 가지 보완 조치를 거쳐 오바마 대통령에게 블랙베리 사용이 허용됐지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메일 사용까지 철저하게 관리할 만큼 대통령기록물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기록문화 발전 근간 흔들어
지난해 한국에서는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대통령기록물법)’이 시행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대통령기록물을 둘러싸고 신구 정권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2008년 6월 12일 청와대가 ‘200만 건이 넘는 자료가 복사돼 봉하마을로 유출됐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된 ‘대통령기록물 유출’ 공방은 정쟁으로 비화하면서 결국 국가기록원이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행정관과 비서관 10명을 불법 유출에 관여한 혐의로 고발하는 데까지 번졌다.

사건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지난 5월4일 서울중앙지검 최재경 3차장검사는 브리핑을 통해 “(대통령 기록물 유출사건과 관련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국가기록원에 대한 방문조사 이후 기소 여부와 관련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검찰이 이 사건 처리에 속도를 낼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사건이 신구 정권 사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우리나라 기록 문화 발전의 근간을 흔들어놓았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기록물이 정쟁의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아직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대통령기록 수집 및 관리 제도에 치명상을 입히고 제도적 허점을 보완할 여지를 축소해버린 탓이다. 지난해 사건 진행 과정에서 불거진 쟁점들과 현재 상황을 종합하면 이 점이 또렷해진다.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만들어진 기록을 봉하마을로 가져가면서 시작됐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대통령기록 원본을 불법 유출했다’는 혐의를 걸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열람 편의 제공 조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본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맞섰다. ‘불법’이라는 공격에 대해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받아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은 청와대 주장처럼 ‘원본’인가. 일단 기록학계에서는 전자기록물에 대해서는 ‘원본’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전자기록 전문가인 이소연 덕성여대 교수는 “청와대가 ‘원본’이라고 주장한 것은 전자기록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종이 기록이라면 ‘원본’은 하나뿐이지만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전자기록에서는 유일본으로서 ‘원본’이라는 건 없고 여러 개 사본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진본’ 사본이 있을 뿐”이라면서 “종이 편지는 한 장뿐이지만 이메일은 여러 명이 동일한 편지를 수신할 수 있다. 이 경우 어느 것을 원본이라고 불러야 하나”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전자기록의 경우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할 때 인증 서식을 붙인 것만 진본으로 본다.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은 인증 서식이 달려 있지 않은 사본”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기록물의 외부 유출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건 맞다. 대통령기록물법 제14조는 대통령기록물법 제14조는 “누구든지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파기 손상 은닉 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한다. 사본에 대해서도 유출을 금지하는지에 대해 별도 규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사본이라 하더라도 유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기록관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조영삼 한신대 교수는 “복제본이라 하더라도 가져간 행위 자체는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 유출 법으로 금지
그러나 “국가기록원을 통해 전직 대통령이 접속하는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아 잠정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자료를 가져왔다”는 봉하마을 측 주장에 전혀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대통령기록물법 제18조는 “대통령기록관의 장은 전직 대통령이 재임 시 생산한 대통령기록물에 대하여 열람하려는 경우에는 열람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등 이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급한 이관 일정에 쫓겨 열람의 범위와 방식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영삼 교수는 “열람 편의 제공과 관련해서 기록관리비서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리팀이 서로 협의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열람 편의를 제공할 것인지 토론을 많이 했다”면서 “‘온라인 열람’이라는 표현을 넣으려다가 너무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활용의 탄력성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열람 편의’라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1978년 제정한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라 전임 대통령은 재임 중 사용한 이메일 기록까지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넘겨줘야 한다. 사진은 미국 클린터 대통령기록관 전경. <경향신문>

미국은 1978년 제정한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라 전임 대통령은 재임 중 사용한 이메일 기록까지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넘겨줘야 한다. 사진은 미국 클린터 대통령기록관 전경. <경향신문>

‘기록을 은밀하게 빼돌렸다’고 한 청와대 주장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이미 기록을 복사해갈 뜻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기록관리 전문가는 “노 전 대통령은 주말에도 엔지니어를 불러 토론할 정도로 전자관리 시스템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면서 “당시 행자부에 온라인 열람권을 계속 요구했으나 결국 행자부가 시행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려 개인적으로 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 유출 공방과 관련하여 기록관리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사건이 정쟁으로 비화하는 과정에서 대통령기록물법의 입법 취지가 손상됐다는 점이다. 대통령기록물에는 국가의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개와 관련한 엄격한 규제 장치가 없을 경우 차기 정권의 정치 보복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이 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민감한 정보에 대해서는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지정해 최장 30년 동안 공개하지 않는 ‘대통령지정기록제도’를 도입했다. 대통령이 정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재임 중 생산한 기록을 국가기록원에 고스란히 넘겨줄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인 셈이다.

지난해 지정기록물 두 차례 유출
기록학계는 이런 관점에서 지난해 검찰 조사와 쌀직불금 조사가 현 정부와 후임 정권에 대해 부정적인 신호를 던졌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기록물법은 대통령 지정기록물에 대해 관할 고등법원의 영장 제시,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의결, 대통령 기록관장 사전 승인 등으로 열람 및 자료 제출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지정기록물은 검찰 조사 당시 법원영장에 의해 한 차례, 국회의 참여정부 시절 쌀 직불금 관련 회의록 및 보고서를 제출 요구 시 또 한 차례, 모두 두 차례 외부에 노출됐다. 조영삼 교수는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기록 보호가 알권리에 우선한다. 기록이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으면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라면서 “대통령기록물법의 취지가 망가졌다. 기록관리 전문가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소연 교수는 “이 공방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기록을 남기면 혼난다는 것”이라면서 “정권의 부침에 관계 없이 어떤 힘에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 기관을 만드는 것이 대통령기록물법의 본체를 살리는 필수조건”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가기록원은 행정안전부 산하기관으로, 국가기록원장은 행정관료 가운데 임명된다. 청와대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주무기관인 대통령기록관이나 국가기록원을 제치고 대통령기록물 유출 공방을 주도한 청와대는 기록물 생산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대통령기록물법 제10조는 “대통령기록물생산기관의 장은 대통령기록물의 원활한 수집 및 이관을 위하여 매년 대통령기록물의 생산현황을 소관 기록관의 장에게 통보하고, 소관 기록관의 장은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의 장에게 통보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각급 기관은 매년 3월 31일까지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실로 기록을 통보하고 비서관실은 다시 5월 31일까지 대통령기록관으로 통보하게 돼 있다. 정확한 비교는 올해 6월 이후에 가능하다는 얘기다.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지난해 대통령기록물 유출 공방이 현 정부의 대통령기록물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계 인사는 “최근 대통령기록관 인사에서 기록물 관리에 대한 소신을 갖고 있었던 15명이 전보 조치됐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제도가 어떤 식으로 운영될지 잘 모르겠다”면서 “전자 시스템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진한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은 “현 정부는 대통령 지정기록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행정 행위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쪽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닌지 주목해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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