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미로 헤매는 노동운동 ‘탈출구’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지난 5월 1일 노동절 기념 범국민대회가 열린 서울 여의도 광장에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회연대선언문’을 발표하고 노동운동의 변화를 주장했다. <경향신문>

지난 5월 1일 노동절 기념 범국민대회가 열린 서울 여의도 광장에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회연대선언문’을 발표하고 노동운동의 변화를 주장했다. <경향신문>

노동운동이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노동운동을 옥죄고 있다. 노동계를 바라보는 여론은 싸늘하다. 비정규직을 보듬지 못하는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비판받고 있다. 파업과 대규모 집회 위주의 구태의연한 투쟁 방식, 성폭력 사태와 금품수수 사건 등 노동계의 내부 혁신은 여전히 더디다. 그렇다면 한국은 노동운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노동자의 복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그럼에도 이의 개선을 막는 정치·경제·사회적 장애는 공고하다. 전진해야 하는데 가로막힌 노동운동의 길을 물어야 할 처지다.

쌍용자동차 파업에 참가했던 노조원들은 77일간의 긴 파업을 끝낸 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쌍용자동차 노동자 25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고도 우울증’ 환자는 41%나 된다고 발표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크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희망퇴직자, 무급휴직자들이 1인 평균 4378만원의 빚을 안고 있다. 10명 가운데 3명은 소득 없이 실업급여 등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정부 강경 대응에 움찔, 여론도 싸늘
8일 파업은 철도노조 역사상 가장 길었던 파업이다. 여론을 고려해 준법파업을 고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론은 불리해졌고, 정부의 대응은 더욱 강경해졌다. 철도노조는 8일 만에 백기투항을 하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파업이 끝난 뒤 철도공사는 강력한 대응을 천명했다. 철도공사는 파업 때문에 생긴 손실에 대해 노조 집행부 개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예정이다.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김기태 철도 노조 위원장 등 197명이 고소를 당했다. 노조원 884명은 직위해제를 당했다. 철도 노조는 단협 해지에 따른 교섭 재개를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철도공사는 미동도 없다.

쌍용자동차 노조와 철도 노조의 파업은 올 한 해를 뜨겁게 달군 노동계 뉴스다. 노동계에서도 쌍용차 노조와 철도 노조 파업을 지원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과적으로 패배했다. 노동운동은 정부의 강경 대응에 치이고 있고, 여론도 노동계 편이 아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다. 1990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가 만들어 진 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경쟁관계 속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했다. 교사와 공무원도 노조를 결성할 수 있었고, 1996년 12월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이 노동계의 총파업으로 재개정됐다. 1987년 이후 노동계는 ‘노동자 정치 세력화’ ‘산별노조 체제 전환’이라는 ‘양날개 전략’을 썼으며, 성과를 이뤄냈다. 2008년 12월 말 민주노총의 경우 전체 조합원 65만945명 가운데 66.3%가 산별노조 조합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도 국회에 진출했다. 가시적인 결과물로 보면 노동운동은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운동은 위기라는 분석이 훨씬 많다. 노동운동은 계속 패배를 거듭하고 있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노동운동에 호의적이던 여론은 어느 순간부터 싸늘히 식어갔으며, 노동계 내부는 정파 싸움으로 비판받고 있다.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나 사회의 약자들을 끌어안지 못하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외부적 상황도 좋지 않다. 보수적인 정부가 노동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조건준 민주노총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라는 책을 통해 노동계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가감없이 보여 줬다. 조 국장은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해 ▲노조는 공장의 담을 넘어 소통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민주 노조가 점차 과거의 민주성을 잃어 가고 있다 ▲노동자 내부의 통일과 연대가 힘들다 ▲노동운동이 정규직의 ‘기득권 지키기’를 통해 정규직 이기심만 부추겨 왔다 ▲산별 노조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 등으로 지적했다. 노동운동 내부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자기반성’을 한 것이다. “노동계 인사들이 책 내용을 부담스러워 했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조 국장은 “그런 반성이 있어야만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비판도 많이 들었지만 괜찮다”고 대답했다.

비정규직 외면, 이기주의 비판 받아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1997년 이후 노동운동에 변화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노동의 양극화”라면서 “노동운동은 노동의 양극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안주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해결하기 위한 산별 노조와 정치세력화 전략도 한계에 도달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양극화 문제가 두드러진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농성 노조원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옥상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 77일간이 긴 파업이 끝난 뒤에도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과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조와 철도 노조의 패배는 노동운동의 약해진 힘을 대변한다. <경향신문>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농성 노조원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옥상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 77일간이 긴 파업이 끝난 뒤에도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과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조와 철도 노조의 패배는 노동운동의 약해진 힘을 대변한다. <경향신문>

노동계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노동계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회연대 전략’이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5월 1일 노동절대회에서 ‘사회연대선언문’을 발표했다. 사회연대는 비정규직, 영세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시민과 연대해 사회보장을 확대하고 일자리 나누기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즉 노조가 사업장의 벽을 넘어 시민사회와 연대해 외연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상훈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의 노동운동은 3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화, 투쟁, 사회연대다. 민주노총은 사회연대를 특화시키겠다는 것이다”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시민권과 인권 문제를 노동운동이 특화해 노동운동도 사회적인 이슈라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까지 ‘사회연대선언’은 선언에 그치고 있다. 올해 말까지 펴내기로 한 사회연대운동 매뉴얼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고, 가시화된 내용도 없다. 급박하게 터지는 문제 때문에 민주노총이 사회연대 운동에 전력을 쏟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연대 전략’ 노동계 변화 모색
이에 비해 공장의 벽을 허물고 지역사회와 연대하는 노조의 모습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부산지하철 노조는 노조 가입 범위를 부산지하철 부대업체 직원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 한국보그워너씨에스는 파업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고용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는 광주시청 청소용역 노동자 20여 명의 복직 투쟁으로 440일 만에 고용 보장 약속을 받아냈다.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삼우정밀 노조는 이주노동자를 노조원으로 받아들였다. 노조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면서 지역사회의 여론은 노조에 호의적으로 변했고, 시민들의 시선도 따스해졌다.

손동신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 본부장은 “440일 동안 조합원들이 지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문제를 알리고 호소한 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지역사회와 연대하면서 여론을 노조 편으로 만든 것이다”면서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서 노동운동은 이제 사회운동으로 기능을 확장해야 한다. 노조가 사업장 안에서만 있게 되면 몸과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함께하는 경영참여연구소’가 노동자펀드를 조성해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려는 움직임도 주목받고 있다. 노동운동이 ‘뻥파업’이라는 오명을 쓰면서 투쟁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이해 관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면서 “노동자 외에도 국민의 이해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10여 년 전부터 노동운동이 발등의 불만 끄려고 하다가 현재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대구 삼우정밀 노조 ‘일자리 나누기’ 실험

2006년 12월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삼우정밀에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측과 노조가 합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8개월. 노조는 파업도 여러 번 했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파업의 효과는 미미했다. 김태업 노조 위원장은 노조의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김 위원장은 이주노동자 관련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했다. 금속노조 관계자, 시민사회단체, 김 위원장이 참여해 이주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에서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노조원으로 받아들이고,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정규직 노조원 설득도 필요했다. 

김 위원장은 “정규직만 파업하면 비정규직은 일을 하게 되고, 그러면 파업은 장기화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노조와 사측의 대화가 어려워진다면서 정규직 조합원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이 노조와 결합하면서 단결력이 강해졌고, 회사는 노조와 단협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노조는 단협 조항에 ‘유니온숍’(해당 직장에 취업한 모든 사람은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는 제도)을 넣었고, 이주노동자들이 정식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삼우정밀 노조가 시험대에 오른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사측이 경기 불황 때문에 인원 감축을 해야겠다고 통보했다. 방법은 이주노동자와 재계약하지 않는 것이다. 노조는 사측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의했다. 노조는 조합원 71명 가운데 정규직 직원 44명이 3개월 동안 2개 조로 나뉘어 2주일씩 휴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휴업하는 정규직 직원은 고용유지 지원금과 회사측의 지원금을 받아 월급의 80%를 받았다. 

2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은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7월부터 회사는 정상화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정상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었다. 노조가 제안한 ‘일자리 나누기 실험’은 성공이었다. 지역 사회는 삼우정밀 노조의 실험에 대해 박수를 쳤다. 노동계 역시 삼우정밀 노조를 주목하고 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