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압축적 재개발’ 땜질식 처방이 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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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서울시 재개발의 역사, 197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심 확대가 수요 낳아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간 한국의 도시 재개발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1970년대 이후를 기준으로 삼는다. 도시 재개발이 도시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기반시설 건설 필요의 증대와 맞물려 있는 것인 만큼 산업화 시기의 급속한 인구 성장과 도심 확대가 재개발 수요를 낳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합동재개발 방식 도입 이후 철거민과 공권력 간 갈등이 극대화됐다. 사진은 1987년 서울 상계동 재개발에 항의하며 철거반원들을 막아서는 주민들.

1980년대 중반 합동재개발 방식 도입 이후 철거민과 공권력 간 갈등이 극대화됐다. 사진은 1987년 서울 상계동 재개발에 항의하며 철거반원들을 막아서는 주민들.

흔히 ‘판자촌’이라고 불린 무허가 정착지는 일제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 정책이 시행되고 농촌인구가 도시노동자 계층으로 편입되면서 기존의 무허가 정착지는 급속하게 확장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정부는 무허가 정착지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무허가 정착지를 정비할 의지나 능력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55년 4월 서울시는 대통령 특별지시로 무허가 판자촌을 모두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만인 6월에 철거 대상자 가운데 토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시가 보유한 토지를 대여하기로 결정한다. 5·16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군부는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0일 무허가 판자촌 소유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결정을 발표했지만 그해 말에는 판자촌 철거민 1100가구를 구로동 간이주택에 수용했다. 이 시기까지는 표면적으로 강온정책이 병행됐지만 실질적으로 무허가 정착지를 용인하는 정책을 취한 셈이다. 여기에는 정권 차원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이주원 ‘나눔과미래’ 지역사업국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합동재개발 방식이 상업성 불러
“두 가지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 인구가 연평균 증가율이 8%를 넘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주택과 도로가 크게 부족해졌다. 다음은 경제 성장의 필요성이다. 경제 성장에 필요한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저임노동을 동원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해야 했다. 양질의 주거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판자촌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저임노동자들을 달랜 것이다.”

도심재개발의 양상이 획기적으로 전환된 건 1983년 목동공영개발이 시작되고 정부가 1984년 ‘합동재개발’ 방식을 도입하면서부터다. 합동재개발은 주민들이 재개발조합을 결성하고 건설회사를 지정해 사업을 진행하는 민간 주도 사업 방식이다. 현재의 재개발 사업과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인 셈이다.

합동재개발 방식의 특징은 재개발에 상업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는 현지 개량이나 소규모 재개발사업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도시연구소 서종균 연구원은 “건설업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한 것이 핵심”이라면서 “이전에는 도시재개발 정책이 무단 점유를 제어해 무허가 정착지 확산을 억제하는 것이 정책의 초점이었다면 이제는 돈이 될 만한 곳은 어디든 재개발할 수 있다는 원칙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이전에 가장 큰 규모의 철거민 투쟁으로 기록돼 있는 광주대단지 사건(1971년 8월)만 하더라도 정부가 서울시 판자촌을 정비하기 위해 ‘강제이주’시킨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폭력적이었지만 정부가 건설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은 아니다. 이주원 국장은 “합동재개발은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시 정비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인·허가권을 쥐고 건설사를 끌어들인 것”이라면서 “당시 정치 권력은 건설업계를 풍부한 정치자금의 바다로 봤다”고 말했다.

목동, 사당동, 상계동 철거민 투쟁 등 대표적인 철거민 투쟁이 모두 이 시기에 발생했다. 김수현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1999년에 작성한 ‘서울시 철거민 운동사’에 따르면 1986~1997년 9년 동안 서울시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19명이 철거를 비관한 자살, 철거 이후 천막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 철거 과정에서의 사고 등으로 사망했다. 공권력과 철거용역이 휘두른 폭력으로 다친 주민은 부지기수다.

이처럼 철거민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자 정부와 서울시는 재개발 관련 보상에 관한 세부 기준을 마련하거나 개정했다. 1986년에는 ‘공공용지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특례법 시행규칙’을 마련해 주거대책비를 지급하기로 했고, 1989년에는 세입자를 위한 영구임대주택 건립을 약속하는 ‘서울특별시 주택개량재개발 사업 업무지침’이 나왔다. 서종균 연구원은 “주택 세입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나온 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폭발력이 크게 약화된 도시재개발의 뇌관을 건드린 건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취임 이후 시작된 서울시 뉴타운 사업이다. 이주원 국장은 “당시 이명박 시장이 엄청난 괴물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재개발 대상 지역의 규모로만 보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02~2008년에 지정된 뉴타운 재개발 지역은 2889만9309㎡에 이른다. 이는 그 이전 28년(1973~2001년) 동안 지정된 규모(1455만6553㎡)의 2배에 가깝다.

‘부동산 불패’와 결합된 전면재개발
턱없이 낮은 재정착률(길음뉴타운의 경우 20% 미만), 세입자 대책 부족(세입자 가구수 대비 임대주택 건립 비율 10% 안팎), 급속한 서민주택 멸실과 대규모 이주수요 발생에 따른 전·월세 폭등은 뉴타운 사업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한국의 도시재개발은 무수한 갈등과 상처를 낳았으며, 철거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사진은 서울 흑석동 뉴타운 재개발 공사 현장. |김창길 기자

한국의 도시재개발은 무수한 갈등과 상처를 낳았으며, 철거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사진은 서울 흑석동 뉴타운 재개발 공사 현장. |김창길 기자

1980년대 이후 서울의 도시 재개발은 기존의 건축물 등을 전면 철거하고 새로운 시설로 대체하는 ‘전면재개발’ 방식이었다. 그러나 재개발에는 다른 방식도 있다. 구역 내 건축물을 제한하고 용도를 규제하는 ‘보존재개발’, 재개발 지역의 일부 또는 다른 지역에 주택을 건설해 순차적으로 재개발하는 ‘순환재개발’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전면재개발 방식이 일방적으로 관철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주원 국장은 “서울은 너무나 압축적인 성장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뭐든 땜질식으로 처방하는 데 급급했다”면서 “땜질식 처방이 부동산 불패 신앙과 결합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부동산 및 주택 소유주, 세입자, 건설사, 행정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도시 재개발을 일거에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국장은 “지금이라도 책임행정의 의지만 강하다면 공공관리자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

‘공공관리자 제도’는 서울시가 현재 성수동 재개발 지역에 시험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단체장이 조합설립 인가와 정비업체·설계업체·시공사 선정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서울시는 전 지역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 통과돼야 한다. 각 지자체가 이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국토해양위에 계류돼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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