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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10월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했다. 2009년 미디어법, 2009·2010년 예산안 등 18대 국회에서 다섯번째 강행한 날치기다. 날치기. 국어사전을 보면, 법안을 가결할 수 있는 의원 정족수 이상을 확보한 당에서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을 뜻한다. 날치기는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어 달아나는 짓이나 이런 짓을 한 도둑을 뜻하기도 한다. 법안 단독 강행처리라는 날치기는 그간 노골적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나라당에서 낯부끄러운 일이라는 도덕적 각성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염치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 일은 다음과 같다.

한나라당 소속 정의화 국회부의장(단상 위 가운데)이 22일 야당 의원들의 항의 속에 경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통과를 선언하고 있다. /국민일보 제공

한나라당 소속 정의화 국회부의장(단상 위 가운데)이 22일 야당 의원들의 항의 속에 경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통과를 선언하고 있다. /국민일보 제공

한나라당은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강행처리 과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본회의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비공개 본회의를 의결해 의안을 처리한 것은 처음이다.(중략) 언론 취재 역시 원천봉쇄됐다. 국회TV도 꺼지고 방송 카메라들은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문틈으로만 겨우 간간이 엿보는 식의 취재를 했다.(경향신문 2011년 11월 23일자, 본회의 의결 비공개 처리 최초)

집권당과 다수당의 날치기 역사는 오래됐다. 어김없이 다수당은 경위를 동원해 저항하는 야당 의원을 끌어냈다. 여야 의원들은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경호권을 요청해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1면에 ‘국가보안법 폭력으로 통과’란 제목을 달아 상황을 전했다. 3면 상보 제목은 ‘개 끌듯이 끌려간 야당 농성 의원들’이다. 수백명의 ‘몸집 큰 경위들’이 20여명의 의원들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기사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기자들의 표정을 잡아묶는데 경위들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회의장 내에 못들어갑니다’라며 난처한 표정으로 기자 앞을 막았다.” 기자를 막는 ‘날치기의 염치’ 기원은 이승만 정권이다. 현 정권이 그를 괜히 기리는 게 아니다.

경향신문 1958년 12월 25일자 ‘개 끌듯이 끌려간 야당 농성 의원들’.

경향신문 1958년 12월 25일자 ‘개 끌듯이 끌려간 야당 농성 의원들’.

야당 의원 끌어내는 데 경위들만 활약한 건 아니다. 1965년 8월 11일 국회 특위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날치기했다. 야당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공화당은 8월 14일 본회의에서 정부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은 무효화 투쟁을 예고했다.

한·일협정 비준안 처리 당시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 모습. 사진 오른쪽 끝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모습이 보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일협정 비준안 처리 당시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 모습. 사진 오른쪽 끝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모습이 보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2009년 7월 22일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에 항의하다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의 손에 끌려나가고 있다. /우철훈기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2009년 7월 22일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에 항의하다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의 손에 끌려나가고 있다. /우철훈기자

1965년의 날치기와 몸싸움 장면은 2009년 7월 재현된다. 2009년 7월 미디어법 날치기 때다. 여야 의원들은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여성 의원들이 한몫을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던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왼쪽에서 세번째)을 개 끌듯 끌고 나갔다. 이 의원 멱살을 잡고 있는 이는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왼쪽에서 두번째)이다.

야당은 여당의 날치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곤 했다. 여당은 단상 점거 때 경위 등을 동원하고, 몸싸움을 벌여 야당을 끌어냈다. 격돌을 아예 피하는 방법도 있다. 1969년 3선 개헌안 처리 때 여당은 국회 제3별관으로 가 단독 처리했다. 3선개헌안은 유신헌법의 토대가 되는 법안이다. 야당 의원들은 분노를 표출했다. 아래 흑백 사진은 당시 신민당 의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의장실 집기를 엎는 장면이다.

지난 1969년 3선 개헌 직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의원이 국회의장실의 집기를 엎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1969년 3선 개헌 직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의원이 국회의장실의 집기를 엎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날치기의 역사는 계속된다. 1979년 10월4일 국회는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봉쇄했다. 신민당 김영삼 의원 제명징계안을 여당 의원만으로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부마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1986년 10월 16일 여당인 민정당이 통일민주당 유성환 의원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2007년 12월 14일 이명박 특검법안과 BBK 수사검사 탄핵안 처리 저지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석으로 진입하려는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강윤중기자

2007년 12월 14일 이명박 특검법안과 BBK 수사검사 탄핵안 처리 저지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석으로 진입하려는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강윤중기자

유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라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됐다.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실력 저지, 여당은 경찰력으로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차단한 가운데 참의원회의장에서 본회의를 속개해 처리했다. 1996년 여당인 신한국당은 복수노조 허용 등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2005년 12월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열린우리당이 사학법 개정안을 처리할 때 여야가 대립했다. 열린우리당은 법안을 밀어붙여 단독 처리했다. 2007년 12월엔 ‘이명박 특검법’을 두고 여야가 극렬하게 대립했다. 특검법은 통과됐지만, 특검은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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