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젊은 열정, 지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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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한 20대 3인의 인문학 애정

인디고서원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주택가에 있는 작은 서점이다. 2004년 청소년 서적 전문서점으로 출발했다. 지난 2007년에는 같은 동네에서 번지만 바꿔 건물을 새로 지었다. 지상 3층으로 이뤄진 이 서점의 1층에는 어린이·청소년 서적이 있고, 2층에는 인문사회과학 교양서가 있다. 매장은 그리 넓지 않다. 열몇 걸음이면 매장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평범한 동네 서점보다는 넓지만 대형서점에 견줄 바는 아니다.

이 작은 서점은 그러나 크기와 무관하게 서점 이상의 서점을 지향한다. 책 판매는 이 서점이 최근 몇 년 동안 벌이고 있는 일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인디고서원은 진작부터 서점이라기보다는 매주 토론모임을 통해 부산지역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학자들을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지적 토론의 공간이었고, 정기적으로 학술지를 발간하는 인문학 담론 생산기지로 자리잡았다. 세 유형의 활동이 모두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인문학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10~30대 청소년·청년들의 손으로 이뤄진다.

지젝 인터뷰집을 펴낸 인디고연구소 청년들. 왼쪽부터 윤한결씨, 유진재씨, 박용준씨. | 정원식 기자

지젝 인터뷰집을 펴낸 인디고연구소 청년들. 왼쪽부터 윤한결씨, 유진재씨, 박용준씨. | 정원식 기자

인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
인디고서원 청년들은 최근 본격적인 학술출판 활동을 시작했다. 첫 성과는 3월 초 궁리출판사에서 출간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인디고서원 청년들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을 직접 만나 나눈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다. ‘철학적 게릴라’ ‘동유럽의 기적’ 등 화사하고 도발적인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지젝은 독창적인 사유와 이론으로 강연과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어느 지식인이 “지젝 읽기에서 배제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지적 풍토상 낙오하는 느낌마저 줄 정도”(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라고 토로했을 만큼 한국에서도 그의 책은 일종의 지적 생필품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책에 쏟아진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국내 연구자들 중 그를 인터뷰해 책을 펴낸 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 희귀한 작업을 전문 연구자도 아닌 20대 청년들이 해낸 것이다. 지난 2008년 공부 공동체를 표방하며 만들어진 인디고연구소의 박용준, 유진재, 윤한결, 이윤영씨 등이 그들이다.

지난 3월 22일 오후 3시 인디고서원 3층에서 그 중 박용준(29), 유진재(22), 윤한결(23)씨를 만났다. 이들은 인문학에 대한 무모리하리만큼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우연한 만남이 필연으로 굳어진 알짜배기 애정의 대상이다. 세 사람 모두 허아람 인디고서원 대표와의 만남이 계기였다. 

가장 연장자인 박용준씨는 중학교 시절 허 대표의 인문학 수업을 들었다. 유진재씨와 윤한결씨는 인디고서원이 생긴 이후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원 출신 선배들이 이끌던 인문학 수업을 들었다. 유씨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판타지 소설과 비디오 게임에 중독된 아이였다. “내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동안 지쳐 있었는데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본질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유진재씨와 윤한결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맏형격인 박용준씨는 서울에서 철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부산에 내려와 인디고서원의 크고 작은 출판일을 책임지고 있다.

지젝 인터뷰는 지난해 2월 2일과 4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있는 지젝의 집에서 이뤄졌다. 지젝은 슬로베니아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청년들은 운좋게도 슬로베니아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 당시 지젝은 건강이 나빠 장시간 인터뷰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첫 질문에 한 시간 넘게 답변하는 열정을 보였다고 청년들은 전했다.

인터뷰의 핵심 주제는 ‘공동선’
200여쪽 분량의 인터뷰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공동선’이다. ‘공동선’은 ‘공동선 총서’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출간할 예정인 일본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과 폴란드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집으로도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공동선 총서’ 시리즈의 첫 책이다. 왜 공동선인가. 박용준씨의 말이다. “지젝의 말에 따르면 현대는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차별)’의 시대다. 한국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계층간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개인의 사익 추구가 이렇게까지 허용되는 사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풀자면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가 정치영역에 반영되는 사회, 공동의 삶의 윤리가 필요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아우르는 열쇳말로 공동선이란 개념을 잡은 것이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책 내용보다도 이 청년들이 지젝과 같은 스타급 지식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이틀이나 인터뷰할 시간을 내도록 했느냐는 부분일 테다. 이 청년들은 이미 지난 1월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을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고, 지젝 못지않은 유명 지식인인 지그문트 바우만도 5월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둔 상태다. 어떻게 이런 만남이 가능했을까. 박용준씨는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인디고연구소에는 전 하버드대 교수이자 현재는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브라이언 파머 교수가 선임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파머 교수로부터 청년들이 받은 건 이메일 주소 하나뿐이다. 유진재씨는 “용준형이 그냥 보낸 게 아니라 며칠밤을 새면서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당신이 왜 우리를 만나야 하는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나려 하는지를 소상하게 쓴 메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슬라보예 지젝(왼쪽)이 슬로베니아 류블라냐 자택에서 인디고연구소 필진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궁리출판사 제공

지난해 2월 슬라보예 지젝(왼쪽)이 슬로베니아 류블라냐 자택에서 인디고연구소 필진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궁리출판사 제공

지젝 인터뷰는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인터뷰는 인디고서원 청년들이 몇 해 전부터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들은 2006년 이후 청소년들이 만드는 인문학 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펴내고 있고, 2010년에는 <인디고잉>의 국제판인 영문잡지 <인디고>(Indigo)를 창간했다. <인디고잉>과 <인디고> 발간 사이의 시간 동안 청년들은 6개 대륙의 대표적 지성인들을 만나 질문을 던지는 ‘인디고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청년들은 이 시기에 노엄 촘스키와 작고한 하워드 진 등 유명 지식인들을 만났다. <인디고>는 이 프로젝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창간한 잡지로, 지젝은 이미 2010년 갓 창간한 <인디고>에 글을 기고해 국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기고 요청은 이메일로 했다. 지젝은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편견을 버리면 누구든 만날 수 있다”고 박씨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데, 석학들 중에서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만남의 이유와 근거만 확실하면 된다. 상대가 외국인이든, 유명한 석학이든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다. 석학들을 만나면서 공부가 깊어질수록 권위적이지 않고 타인을 환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만나기 어려웠던 건 한국 지식인들이었다.”

“지젝과 독자 사이에 다리 놓고 싶었다”
지젝 인터뷰는 영국의 진보적 학술출판사인 버소에서 영문판을 펴내기로 돼 있다. 이후에 잡혀 있는 가라타니 고진이나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인터뷰도 버소 출판사가 기획하고 있는 시리즈물로 선보일 예정이다. 버소 출판사에서 나올 사상가 인터뷰집 시리즈는 영국 출신 다큐멘터리 작가 제이슨 바커와 공동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 제이슨 바커는 2008년 이후 유럽의 마르크스 재조명 움직임을 담은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의 감독으로, 인디고연구소와 버소 출판사는 바커가 진행하는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알랭 바디우, 자르 랑시에르 같은 사상가들과의 인터뷰를 인디고연구소의 ‘공동선’ 총서와 합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지젝은 도발적이고 독창적인 만큼 읽기에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는 이론가다. 인터뷰집의 특성상 기존 저작보다는 평이한 편이지만, 청년들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해를 다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유진재씨는 “지젝은 막상 만나보면 아주 유쾌한 사람인데 저서로만 소개되다보니 범접하기 어렵고 괴물 같은 이론가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그도 좋은 삶이란 뭔가를 고민하는 같은 동시대인이다. 지젝과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대중소설처럼 읽히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박용준씨는 “우리도 지젝 책을 보면서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버티면서 읽어볼 필요는 있다”며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걸 이해하면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뀔 수 있다. 그런 개인의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인디고 청년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의 가치 또한 이 지점에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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