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날로그 감성 ‘LP의 부활’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20대 수요가 새로운 타깃… ‘음악 소유’ 욕구 충족

CD보다 커다란 크기, 만지기에도 조심스런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려놓으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비닐재질에 섬세하게 파진 골을 따라 바늘이 울렁거리면 스피커엔 잡음까지 재생되고 자칫 보관을 잘못하면 튀거나 한 곳에서 노래가 맴도는 일도 있다.

불과 20여 년전까지 음악은 대개 이렇게 불편한 과정을 거쳐 감상했다. 20세기 음반산업의 주인공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던 LP판은 간편하고 깨끗한 음질의 CD에 밀려 명맥을 겨우 유지하다가 디지털음원시장이 자리를 잡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LP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5월 15일 아이돌그룹 2AM이 새 음반 ‘피츠제럴드식 사랑이야기’를 LP판으로 내놓는다. 시장의 반응에 따라 신보를 LP로 내겠다는 가수들도 줄을 이어 대기하고 있다. 2004년 서라벌레코드가 마지막 LP판을 찍은 후 문을 닫자 국내생산 LP판은 사라졌다. 그러던 것이 작년부터 LP팩토리라는 음반제작회사가 설립되어 국내 LP 생산의 새출발을 모색하는 중이다. LP팩토리는 올해 최고품질의 음반 생산을 목표로 현재 시험제작을 거듭하고 있다.

턴테이블 | 경향신문 자료

턴테이블 | 경향신문 자료

음반 관계자들은 LP판의 복귀는 일부 애호가를 위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작년 11월 국내 최초의 레코드축제인 서울레코드페어를 성공시켜 올 6월 2일과 3일 두 번째 서울레코드페어를 준비중인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20대가 LP판 수요의 새로운 타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영협 조직위원은 “음악을 구하고 듣는 행위는 보편화됐지만, 음악을 소유하려는 욕구는 채울 수 없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가 LP판이다. CD에 비해 크고 화려한 재킷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갖가지 패키지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특히 작년 입장료를 기꺼이 지불하고 축제에 참석한 관객은 대부분 20대였고, 하룻동안 약 1억원 어치의 음반을 판매했다고 전한다. LP판을 처음 경험하는 세대에게도 충분한 시장성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LP판에 대한 주목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미국 음반판매 집계회사인 닐센사운드스캔의 2011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 시장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약 390만장의 LP판이 팔렸다. CD 판매량의 1%에 불과하지만, 전년 대비 36%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CD 판매는 몇 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적극적으로 음반을 구매하는 소비자층에게 LP판은 음원구매로 충족할 수 없는 감성적인 면을 채워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이돌 2AM 새음반 LP판 출시
국내에서 LP판은 주로 중고음반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 음반산업의 전성기인 90년대 이전 음악들은 주로 LP를 통해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 시장에도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소식이다. “예전 LP판 애호가들은 이제 노령화되어 구매력이 없어졌다. 최근 중고 LP판은 젊은층이 주소비자다. 특히 과거 명곡을 재발굴하는 텔레비전 음악프로그램의 영향으로 80년대 이후 음악들이 재조명되면서 수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인터넷 중고음반판매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진형씨의 설명이다. 90년대 국내 음악시장의 호황시절에 과잉 생산되어 악성재고로 창고에 쌓여 있던 임재범 장혜진 김완선 등의 음반이 모두 팔렸다고 한다. 덕분에 7000원 정도하던 가격도 수요가 늘어 1만원 이상으로 올랐다는 소식이다.

LP판 중에는 한 장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희귀음반도 있다. 1973년에 발간된 김정미의 음반 나우(NOW)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도 주된 표적이 됐었다. 음반 발매 직후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대부분이 회수되어 소각되는 바람에 유통된 음반은 극소수인 데다, 그 음악적 평가가 높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군사독재시절 대중예술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 됐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몇 차례 복각판이 나왔고, 미국에서도 최고 품질로 복각되어 전량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 밖에도 신중현과 윤연선의 음반 등은 미국 복각전문 레이블에서 여러 차례 생산되어 주목받았다.

제1회 서울레코드페어를 보러 온 시민들이 전시된 LP음반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제1회 서울레코드페어를 보러 온 시민들이 전시된 LP음반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LP판은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를 가늠하는 1차 사료라는 주장도 있다. 1만5000장 이상의 희귀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과거 대중문화에 대한 천시로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하다. LP는 당시 문화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 소장 음반과 자료를 통해 한국 걸그룹의 문화사를 보여주는 전시회 ‘저고리시스터스에서 소녀시대까지’(5월 4일~6월 17일·부평아트센터 꽃누리 갤러리)를 열고 있다. 전시회에 내놓은 LP판의 표지만으로도 시대정신의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미국에서도 LP 판매량 늘어
미국에서 LP판이 새생명을 얻은 데는 음반업계의 노력이 있었다. 소장하기에는 좋으나 감상에는 불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음반구입자가 따로 음원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재킷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브로마이드 삽입과 상세한 음악소개 등으로 팬서비스와 구입만족도를 높인 점도 주효했다. 국내 LP판 부활에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들이 팬층이 두꺼운 아이돌 그룹의 기획사란 점에서 새겨둘 만한 이야기다. 열혈팬의 경우 희귀성과 만족도가 높으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구매에 나서고 있다. 때문에 음원 다운로드 중심으로 재편된 음악시장에서 기획사의 수익을 극대화시키고 침체된 음반산업을 부활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LP판이 주목된다.

현재와 같은 음원 중심으로 음악산업을 재편한 주인공은 아이튠즈와 아이팟을 만든 스티브 잡스이다. 그야말로 LP판의 퇴장을 불러온 사람이다. 팝스타 닐 영은 “정작 잡스는 집에서 LP로 음악을 듣는다”고 주장했다. 음악을 듣는 일은 지극히 감성적인 행위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재킷을 펼치고 조심스레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려놓는 불편함이 한편으로는 디지털과 인스턴트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감성코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천<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