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차 떼고, 포 떼고…‘한국형 리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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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등록법’ 산업계 비용부담 등 논리에 밀려 기준 대폭 완화

2011년 4월 말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임산부 중 급성호흡부전을 겪고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고, 그해 8월까지 4명이 사망했다. 살균제 성분은 주로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PHMG)과 염화 올리고 에톡시에틸 구아니딘(PGH)으로 샴푸·물티슈·수영장물 소독제 등으로 사용된다. 피부에 닿거나 마셔도 생명에 위험은 적지만, 호흡기로 들어가면 치명적인 위험물질로 변한다. 화학물질 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다.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유해법)으로는 기존 화학물질이 다른 용도로 쓰일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막지 못한다.

7월 23일 양재aT센터에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관련 공개 포럼이 열렸다. | 환경부 제공

7월 23일 양재aT센터에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관련 공개 포럼이 열렸다. | 환경부 제공

제품 관련 조항 등 중요 내용 수정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환경부는 지난해부터 화학물질 관리체계를 선진화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했다. 일명 ‘화평법’으로 불리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다. 현행 유해법이 신규 화학물질만을 등록대상으로 했다면, 화평법은 신규 화학물질과 기존 화학물질을 등록대상으로 한 것이다. 2007년 3만종에 이르는 기존 화학물질을 등록·평가하도록 강제한 EU의 ‘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zation and restriction of CHemical의 약어로 EU 내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되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제조·수입량과 위해성에 따라 등록, 평가, 허가 및 제한을 받도록 하는 화학물질 관리 규정) 제도를 한국에 도입하려는 중요한 행보였다. 환경 관련 시민사회단체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지식경제부와 기업체의 반발로 화평법이 누더기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제정 추진현황’(환경부, 2012년 6월) 보고서를 보면 지경부와 기업체의 반발로 화평법의 중요 내용이 수정됐음을 알 수 있다.(표 참조)

이는 산업체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지난해 8월 대한상공회의소·중소기업중앙회·한국화학산업연합회 등 16개 산업체 협회는 화평법 제정에 대한 산업계의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서를 통해 최소 등록 기준 톤수, 화학물질평가위원회 관련 사안, 평가 대상물질 지정에 관련된 조항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지경부가 산업계의 목소리를 내세워 화평법의 취지를 담고 있는 내용을 바꾼 셈이다.

전문가들이 가장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제품’ 관련 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동일한 화학물질이 어떤 제품에 사용되느냐에 따라 위험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평법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사를 하고 등록하도록 만들었지만, 지경부가 이를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환경안전연구소 이종현 소장은 “화학물질의 용도가 변경되면 이에 따른 위험성도 함께 조사를 해야 하는데, 지경부가 이 조항을 삭제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지경부의 반발로 수정된 화평법을 보면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이 REACH 제도처럼 기존 화학물질을 모두 등록하지 않은 것”이라며 “유해화학물질을 지정하고 변경하는 데 관계부처가 협의를 하면 기업체의 로비 때문에 유해물질 지정이 최소한으로 축소될 것이 뻔하다”고 지적했다.

지경부 산업환경과 관계자는 “환경부와 지경부의 입장은 다르다. 화평법이 산업체에 부담을 많이 주지만,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 도입에 찬성했다. 다만 도입에 부작용이 있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의를 한 것”이라며 “제품 관련 조항을 뺀 것은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품공법)으로 관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품공법을 개정하면 화학물질 사용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국민 생명권과 건강권 약화된 화평법
지경부와 산업체는 “화평법을 도입하면 기업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A기업체 환경 관련 관계자는 “화평법 도입을 전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라며 “기업체 목소리는 지경부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연구원은 화평법을 도입하면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최소 2조1000억원에서 최대 7조9000억원으로 추산했다. 환경부는 최소 982억원에서 최대 4400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추산했다. 전문가들은 “산업연구원이 부풀렸다”고 평가했다. 2008년 5월 그린피스가 펴낸 <독성 로비>(TOXIC LOBBY/REACH 제도 무력화를 위해 기업체가 많은 로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REACH 제도로 인해 매년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금액이 2억 유로(한화 2778억원)로 계산됐다. 한국과 EU의 경제규모로 따져봐도 산업연구원의 주장대로 2조원에서 8조원의 비용 부담은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경제]차 떼고, 포 떼고…‘한국형 리치’의 수난

화학물질 관련 제도에는 7개 부처 14개 법률이 존재한다. 환경부의 ‘유해법’,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 지경부의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 등이다. 이 법률 중에서 산업용 원료물질의 심사 및 안전을 담당하는 법은 환경부의 ‘유해법’이다. 환경부 화학물질과에서 펴낸 ‘전문가 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국내에 유통된 85% 이상 화학물질의 유해성과 위해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예견된 일이었다.

환경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화평법이다. 화평법이 중요한 것은 신규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기존 화학물질의 유해성과 위해성을 검사한 자료를 등록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한국형 REACH 제도인 셈이다. EU는 REACH 제도 덕분에 1981년 9월 이후에 유통된 화학물질 3000여종과 1981년 9월 이전에 개발되어 사용 중인 화학물질 3만여종의 유해성과 위해성 정보를 등록했다. EU에 제품을 수출하는 국내 업체도 REACH 제도 기준에 맞게 제품을 만들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EU에 수출하는 제품과 내수용 제품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차이가 있어도 국내법의 미비로 별 상관이 없었던 것. EU에서는 제품 사용이 금지된 화학물질이 국내에서는 사용 가능해도 이를 제재할 수 없는 것. 화평법은 이런 부작용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추진됐다. 하지만 지경부와 산업체의 반발로 법안이 누더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화평법은 산업계의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국민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약화됐다”면서 “지금의 화평법으로는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문제를 예방할 수 없다. 유해화학물질 생산자의 책임성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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