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제 친자식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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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실수로 16년만에 자식 바뀐 사실 안 어머니의 처절한 육성 토로

법원의 판결로 친자식을 찾을 길을 잃은 이숙희씨(가명). 행여 기른 딸이 알아볼 수 있어 사진을 어둡게 처리했다.

법원의 판결로 친자식을 찾을 길을 잃은 이숙희씨(가명). 행여 기른 딸이 알아볼 수 있어 사진을 어둡게 처리했다.

"제가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어 낳은 친자식을 찾게 도와주세요.”
이숙희씨(가명·46)의 말은 절규에 가까웠다. 산부인과 실수로 아이가 바뀐 줄 모르고 16년간 남의 딸을 키워온 그는 최근 법원의 판결에 크게 좌절했다. 7월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3부(이준호 부장판사)는 “ㄱ산부인과의 과실이 인정되는 만큼 이숙희씨 가족에게 ㄱ산부인과가 총 7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면서도 “산부인과가 출산 당시 태어난 신생아들에 대한 분만기록정보까지 공개할 의무는 없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씨 입장에서는 친자식을 찾을 길이 사실상 막힌 셈이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친딸이 아니라니…
이로부터 며칠 후 기자는 이숙희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씨의 변론을 맡고 있는 변호사를 통해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어렵게 마련한 자리였다. 장소는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교외의 한 찻집이었다. 이름을 가명으로 한 것은 그가 기른 딸이 아직 이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아직 고등학생인 딸이 행여 이 사실로 혼란을 겪을까봐 두려워했다.

“딸 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주변에선 엄마 아빠와 하나도 안 닮았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중학생 이후론 얼굴은 물론 체형도 저와는 전혀 달라요. 그래도 제 딸이 아니라는 의심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다니….”
이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친딸과 생이별한 채 살아야 했던 이씨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씨앗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둘째아이를 임신해 만삭이던 이씨는 극심한 산통을 느껴 남편과 함께 급히 경기도 구리시의 한 산부인과에 갔다. 그리고 도착한지 얼마 안돼 아이를 낳았다. 임신 7개월이 지나 받은 초음파 검사 결과 아들인 듯했는데 딸이라고 했다. 그래도 기뻤다. 이씨와 남편은 딸을 금지옥엽처럼 길렀다. 그러나 남편은 딸이 초등학생일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뛰어야 했다. 다행히 이씨가 오래 전부터 벌여온 개인사업은 현재 상당히 안정된 수준에 올라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도록 키웠지만 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엄마가 바쁘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딸은 잔병치레 없이 잘 자랐다. 성격이 활달한 아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친딸이 아니란 사실을 이씨가 알게 된 것은 지난해 여름이다. 고등학생이 된 딸이 내민 신체검사기록표에 딸의 혈액형이 A형으로 돼 있던 것. 자신과 남편의 혈액형은 모두 B형이기 때문에 자녀는 O형과 B형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씨는 ‘설마…’ 하며 딸을 데리고 시내의 한 병원을 찾았다. 딸은 물론 자신의 혈액형을 다시 검사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 병원에서도 이씨는 B형, 딸은 A형으로 각각 나왔다. 이씨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딸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니 딸이 초등학생 때도 학교 신체검사에서 A형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검사의 오류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다.

며칠간 혼자 속으로 끙끙대다가 딸을 출산한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다행히 해당 병원은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1992년 당시 출산을 집도한 ㄴ원장도 그대로였다. ㄴ원장은 “유전자검사를 한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씨는 고심 끝에 딸이 잠자는 사이에 머리카락 몇 올을 뽑았다. 그리고 전문기관에 유전자검사를 의뢰했다. 피 말리는 2주간의 기다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충격은 컸다. 이씨와 딸은 친자관계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실을 안 직후 딸을 보는 순간 딸이 낯설게 느껴졌어요. 그리곤 곧 죄책감이 밀려들었지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했어요. 친엄마를 모른 채 사는 딸이 측은하기도 하고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ㄱ산부인과에 전화를 걸었다. 원장은 처음에는 “진료기록을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전화를 걸어와 이씨와 같은 날 이 병원에서 딸을 출산한 또 다른 산모가 있었다면서 산모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를 알려줬다. 이씨는 해당 주소지로 찾아갔다. 그러나 성큼 초인총을 누를 수가 없었다. 혹시 친딸이 이 집에 있을지 모른다는 흥분감 때문이었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는 마침 엄마와 딸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이들 모녀는 몹시 닮았다.

병원서 당시 출산기록 공개 거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신생아가 바뀔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사진은 신생아들로 가득찬 서울시내 한 종합병원의 신생아실. <경향신문>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신생아가 바뀔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사진은 신생아들로 가득찬 서울시내 한 종합병원의 신생아실. <경향신문>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의 혈액형을 물었더니 A형이래요. 그래도 혹시 몰라 혈액형 검사를 해봐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그 집 엄마와 딸이 흔쾌히 그러라고 해요. 토요일 밤이어서 문을 연 병원이 없어 한참을 헤맨 끝에 검사를 할 수 있었어요. 진짜 A형이었어요. 아닌 거 알면서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요. ‘대체 이 애가 아니라면 내 딸은 이제 또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하는 막막함이 밀려들었어요.”

이씨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1992년 당시 ㄱ산부인과에서 이씨와 같은 날 출산한 산모는 이집 엄마 딱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당시 이씨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흘 중 이씨보다 하루 먼저 또는 하루 늦게 출산을 한 경우다. 하루 먼저 태어난 아기가 두 명 정도이고 하루 늦게 출생한 아기 또한 두 명 정도로 알고 있다. 혈액형을 확인한 이씨의 기른 딸과 이 집 아이를 제외하면 4~5명의 아이만 더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ㄱ산부인과는 더 이상 아이들의 기록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 “법으로 할 테면 하라”며 버텼다.

“의사에게 소송도 제기하지 않을 거고 돈도 청구하지 않을 테니 제발 친자식을 찾을 방법만 알려달라고 애원했어요. 신생아가 서로 뒤바뀐 거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만큼 실수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변호사를 찾아간 거예요.”

형사시효는 만료돼 민사로 해야 했다. 이씨는 ㄱ병원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와 출산 당시 같은 병원에 있던 신생아들의 출생 기록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다. 그렇게 1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씨가 심적으로 받은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딸 몰래 혼자 눈물을 쏟은 날이 많았어요. 모두 잠든 새벽에 강변을 무작정 달리기도 했고요.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원통하기도 했어요.”

소송 과정에서 이씨는 잘 살고 있는 다른 가정을 파괴하는 여자로 몰리는 수모까지 당했다. ㄱ산부인과 변호인 측이 “기록이 공개될 경우 이씨가 당시의 산모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 가족들에게 심한 정신적 고통을 줄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했다. 지금까지의 판례를 봐도, 병원이 분만기록정보를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이번 재판부의 판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실제 1994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친아들이 다른 아이와 바뀐 줄 모른 채 17년을 키운 부모의 이야기는 2001년 11월 KBS <인간극장>에도 소개됐다. 이 부모는 1994년 당시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병원의 진료기록을 받아보게 해달라는 문서송부촉탁신청을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친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법원서 병원 손 들어줘 찾을 길 막막
그런데 이숙희씨한테는 법의 힘을 빌려 친자식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차단된 것이다. 이씨는 사흘간 ㄱ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들에 대한 기록을 내주지 않는 의사도, 친자식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 법원의 판결도 납득하기 어렵다.
“내 자식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고,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제가 남은 생을 편히 살 수 있겠어요? 제 친자식이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찾지 않을 수는 없는 거예요. 또 제가 낳은 자식이나 기른 자식이나 친부모를 만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산부인과에서 서로 바뀐 아이가 친부모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 2000년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모은 KBS2 <가을동화>. |  KBS 제공

산부인과에서 서로 바뀐 아이가 친부모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 2000년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모은 KBS2 <가을동화>. | KBS 제공

이씨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한동안 먼 곳을 묵묵히 응시하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소송보다는 ㄱ산부인과와의 합의를 통해 원만하게 일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했다. 이는 이씨가 산부인과의 이름을 끝내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ㄱ산부인과 원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이유로 제가 입원한 기간에 이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들에 대한 기록을 소각했다고 했어요. 지난해에 저와 같은 날 출산한 산모의 기록 내용을 알려줄 때만 해도 1992년 당시의 산모들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나중에 소각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전 그분이 실제 그렇게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어요. 그분도 자식을 찾아 헤매는 어미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지 않으니까요. 전 병원 원장이 마음을 바꿔 제발 제가 친자식을 찾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길 바랍니다. 제가 친자식을 찾는 일은 기른 딸에게 친부모를 찾아주는 일이기도 해요. 제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에요. 친딸 만큼 기른 딸도 제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친자식을 찾아 꼭 아이들의 자리를 원위치시키자는 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아직은 고등학생이지만 성인이 되면 부모의 그늘은 큰 의미가 없어요. 최종 판단은 우리 아이들에게 맡겨야겠지요.”

그는 “이번 판결이 정당화된다면 대한민국 어느 누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이 땅에서 더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제 불거지자 병원측 기록 소각 주장
인터뷰를 마치자 이씨는 ㄱ산부인과를 다시 찾아가봐야겠다며 일어섰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행여 소송에 해가 될까 염려돼 발길을 끊었던 곳이다. 그동안 모든 대화는 변호사를 통해서만 했다. 그러나 1시간 후 이씨에게 들은 말은 원장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간호사를 통해 외출한 원장과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바쁘다며 메모를 남겨 놓으라는 말만 남긴 채 끊고 이씨의 전화는 더 이상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는 ㄱ산부인과가 왜 이씨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ㄱ산부인과의 소송대리인인 전모 변호사는 수차례에 걸친 기자의 전화와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았다. 친딸을 찾고자 하는 이숙희씨의 열망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이대로 물거품으로 끝날 것인가. 설령 고등법원에서 출산 당시 같은 병원에 있던 신생아들의 출생 기록을 공개하라고 병원 측에 명령한다고 해도 ㄱ산부인과가 기록을 소각했다면 소용이 없게 된다. 보관의무가 없기 때문에 설령 그렇게 했다고 해도 도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어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병원 측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씨가 느낄 분노와 기막힘, 아픔, 불안감이 기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뒤바뀐 아이 90% 이상 친부모에, 기른부모 선택한 경우도

과거에도 이숙희씨처럼 산부인과의 실수로 아이가 바뀐 사건은 많았다. 그나마 혈액형 문제로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사건들이다. 혈액형에 문제가 없어 끝까지 진실을 모른 채 산 가족까지 합하면 병원 실수로 뒤바뀐 아기들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상에 알려진 국내사건 중 하나는 1980년대에 TV를 통해 드러난 쌍둥이 딸 이야기다. 이발소를 운영하는 ㄷ씨는 쌍둥이 아빠였다. 그런데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또 쌍둥이 중 한 아이는 소아마비였다. 어느 날 ㄷ씨의 쌍둥이 딸 중 건강한 딸이 “아빠!” 하고 부르며 이발소에 왔다. 머리를 깎던 손님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한 동네에 사는 자신의 친구 ㄹ씨의 딸과 ㄷ씨의 딸이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 했다. 결론은 이랬다. ㄷ씨와 ㄹ씨의 부인들은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날 한 병원에서 출산했다. ㄷ씨는 쌍둥이를 낳았다. 그런데 간호사의 실수로 쌍둥이 중 한 아이와 ㄹ씨의 아기가 바뀌었다. 양쪽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른 채 한 동네에서 살다가 그나마 한쪽이 쌍둥이였기에 뒤늦게나마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이렇게 헤어진 친자식을 찾으면 90% 이상이 아이를 되찾아온다고 한다. 그런데 1994년에 드러난 사건은 친자식을 찾았지만 비슷한 사연이 있는 여느 가족과 달리 기른 자식을 계속 데리고 사는 경우다. 1970년대 중반에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한 두 산모가 역시 병원 실수로 자신의 아들이 아닌 남의 아들을 안고 퇴원했다. 양측 부모는 자신이 키우는 아들이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한쪽 부모 중 한 사람인 이영순씨는 아들 기호(가명)가 루프스라는 희귀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기호의 담당의사는 이씨에게 “기호가 입양한 아들이냐. 신장이식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친부모나 형제들에게 연락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병원을 왕래하면서 기호의 혈액형이 이씨 부부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A형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하던 이씨는 소송을 통해 자신이 아들을 출산한 대학병원으로부터 입원 당시의 다른 산모들의 분만기록?을 받아낼 수 있었다. 500명의 아이들 중 사내아이와 부부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B형과 O형을 추리니 23명이었다. 이씨는 일일이 주소지를 추적한 끝에 친아들 상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훈을 키운 부모는 상훈을 친부모에게 돌려보내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친아들인 기호를 데려가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상훈 또한 기른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씨는 기호는 기호대로 뒷바라지하되 호적이라도 제자리를 찾게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십수년을 지냈다. 2009년 현재 상훈은 결혼해 가정을 일구며 양쪽 부모집을 왕래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씨 부부는 결혼하지 않은 기호를 여전히 돌보며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역시 출산 때 병원에서 서로 뒤바뀌면서 운명이 바뀐 두 남자아이. 학생이 된 후 혈액형 문제로 자식이 뒤바뀐 것을 알게 된 부모는 자기 자식을 되찾았다. 그런데 한쪽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가정이었고, 한쪽은 가난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엘리트 부모 밑에서 성장하던 아이는 갑자기 비좁은 한 방에서 여러 형제가 함께 자는 것을 비롯해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기른 부모는 아이에게 자주 전화를 걸라고 했고, 아이는 실제 그렇게 했다. 반면에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가 뒤늦게 부자인 친부모를 만난 아이는 친부모의 집으로 들어간 후 친동생과 허구한날 다투었다. 어린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 때문이라고 부모는 판단해 더욱 감쌌다. 하지만 이 부모는 기른 아들도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결국 부자인 부모는 기른 아들의 친부모에게 연락해 자신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기른 아들의 학업을 자신들이 마치게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가난한 부모는 감사해 하며 받아들였다. 부자 부모는 기른 아들과 자신의 둘째아들을 함께 유학을 보냈다. 함께 살던 시절에 우애가 돈독한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던 첫째아들은 끼고 살면서 그동안 못준 사랑을 쏟았다. 이 사례는 보는 시각에 따라 경제적으로 윤택한 쪽은 두 아들을 얻은 것이지만 가난한 쪽은 두 아들을 잃은 것이 된 것일 수 있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1994년에 이영순씨 사건을 맡았던 신현호 변호사는 “1992~95년에 비슷한 사건만 10여건을 맡았는데 4건은 병원이 없어져서, 또 1건은 병원기록이 소실돼 친자식을 찾지 못했다”며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병원의 실수로 아이들이 바뀌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손바닥과 발바닥 인장을 찍고 팔찌를 채운다고 해도 언제든지 착오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집에서 출산하는 게 아닌 이상 아기가 뒤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지 않을까. 퇴원 즉시 유전자 검사를 하는 방법이다. 모든 부모가 자신의 아기가 친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검사를 의뢰해야 한다면 정말 이런 요지경 세상도 없을 듯하다. 낳은 정과 기른 정에 대해서도 다시금 곱씹게 하는 세상이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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