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레슬링 국가대표 선수에서 한국 화가로

남도 묵향의 여정

인사동 홍어집에서 우연히 처음 만나 힐끔 힐끔 얼굴 생김을 살피는 나에게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였다는 소개에 이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가난한 서생(書生)인 나는 무척이나 서호(西湖)가 궁금했다. 아울러 고향이 영암이라 월출산 풍경을 많이 그리고 싶다는 말에서 향수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고향과 월출산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 위해 낙관을 부탁하여 부족한 솜씨로 어지럽게 새겨 보내니, 다시 화집에 몇 글자 써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아 뿌리치지 못하고 용기를 내었다. 이는 분명 4~5년 전, 밤새 막걸리에 홍어를 무던히도 얻어 마시고 하춘화의 ‘영암아리랑’를 불러대던 인연의 연속이며, 전시할 그림을 간추리는 뒤편에 서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를 읽고 먼 희망의 기운을 느낀 감회의 일언(一言)으로 생각하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 이영철 ‘서호 화백의 개인전에 부쳐’ 중에서

한국 화가 서호 유성안(54)의 귀는 잔뜩 일그러져 있다. 그렇지만 손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서호는 특이하게도 레슬링 선수 출신 한국 화가기 때문이다. 서호의 고향은 전남 영암 서호다. 그곳은 월출산의 서쪽 자락으로, 이를테면 서호의 탯자리는 월출산인 셈이다. 월출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체(山體)가 크고 수려하다. 서호 역시 크지 않은 키에 몸집은 제법이지만 결코 용모가 수려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뒷골목에서 맞닥뜨렸으면 공연히 겁이나 먹게 할 그런 용모다.

서호는 경찰관이던 아버지 슬하의 열 남매 중 둘째 아들이자 막내였다. 영암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녔고, ‘어지간히 공부도 못 하고 그냥 개구진’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곧바로 광주의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는데, 당시 군수를 지내던 큰아버지 집에 보내진 것은 일종의 유학이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재수 끝에 어렵게 조대부고에 들어갔다. 조대부고는 그에 훨씬 앞서 광주로 유학 온 형 몽안이 다녔던 학교기도 했다.

그가 조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한 것도 다 형 때문이었다. 형은 잘 나가던 레슬링 선수였다. 전국 체전에 출전해 따낸 메달만도 금메달 하나에 은메달 하나, 동메달이 두 개. 그는 특별한 계기도 없이 형이 하니까 그저 덩달아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도 운동신경만큼은 타고났는지 주니어 대표선수로 뽑혀 한·일 교환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일본도 갔다오고, 졸업 후에는 부산에 있는 실업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운동선수로서의 정점을 눈앞에 두고 생각지도 않은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79년, 그는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레슬링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우승했다. 그가 우승한 자유형 62㎏급은 바로 직전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레슬링 금메달을 따낸 체급. 그는 당연히 한껏 꿈에 부풀어 태릉 선수촌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게 웬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던 미국이 끝내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면서 한국도 그에 동조하여 불참을 선언했고, 그렇게 한 운동선수의 꿈도 속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1981년, 여의도에서 ‘국풍81’이 열렸다. 당시 태릉 선수촌에 있던 국가대표 선수들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운동선수에게는 필생의 꿈이나 다름없는 올림픽. 그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좌절한 선수들은 훈련을 하면서도 마치 좌표를 잃은 듯 무기력하기만 했다. 다음 올림픽이 있지만, 그 기회가 다시 오리란 보장은 없다. 선수촌에서는 흔들리는 선수들을 달랜답시고 가끔 극장 같은 곳에 나들이를 시켰다. ‘국풍81’을 단체 관람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졸래졸래 따라갔던 서호는 그곳에서 전혀 엉뚱한 것에 붙들리고 말았다.

행사장 안 한 부스에서는 즉석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꽃그림이나 화조도 같은 동양화를 그려주는 코너였는데, 그림을 그려주던 무명 화가의 능숙한 붓놀림이 그의 눈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림이라고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광주의 ‘우다방(충장로 우체국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판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어찌 보면 조잡할 수도 있는 그 그림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은 이미 선수촌으로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서둘러 선수촌으로 돌아갔지만, 선수촌에서는 그가 도망간 줄 알고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장창선 감독에게 불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줄은. 끝내 선수촌을 나온 그는 방황을 거듭했다. 그에게 뼈저린 좌절을 안겨준 레슬링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는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말이 경비였지 그곳에서 한 일은 ‘어두운 뒷골목’의 일이었다. 사고를 치고 뉴스에도 나갔다. 국가대표 선수에서 ‘어깨’로의 전락. 어느 날 형이 그를 불렀다. 형은 동네 목욕탕을 통째로 빌려놓고 그와 단둘이 욕조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깡패만은 되지 말라고. 그 역시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론 험악해 보여도 속은 온순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아닌가.

현재 전남 레슬링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형은 당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선을 넣어서 그를 때마침 레슬링부가 신설된 고향 영암의 한 고등학교 레슬링부 코치로 보냈다. 그는 40여 명의 선수를 데리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실의만은 끝내 어쩌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때 불현듯 그의 눈앞에 ‘국풍81’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림이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는 아내에게 무작정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방황하던 시절에 만나 결혼한 아내는 이미 아이까지 하나 낳은 상태였다. 그러나 말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어떤 실의를 알아차린 것이었을까.

막상 서울로 올라왔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도무지 기초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배운다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 배워야 한단 말인가. 그는 화구부터 샀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베끼고 또 베꼈다. 이것저것 흉내 내어 붓질을 해댔다. 잠시 미술교육원 같은 데를 나가보기도 했지만 워낙 기본이 안 된 그로서는 ‘성만 마른’ 일이었다. 그는 독학에 독학을 거듭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백해 김송배 선생 같은 이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15년쯤 무작정 붓질을 해댄 끝에 그는 겨우 그림에 눈을 떴다.

(위) 개도 가는 길, 36×53㎝, 마트지, 수묵담채, (아래) 신도 가는 길, 36×53㎝, 마트지, 수묵담채

서호는 2002년 월드컵 개막식날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힘이 있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을 모르고 그린 것이었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림이었다. 수묵과 채색으로 빼곡히 들어찬 그림에는 여백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서호는 자신의 그림에서 힘을 빼기로 했다. 물감도 최대한 적게 썼다. 묵 한 종지만으로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묵색의 간절함이 다한 뒤 나머지는 묵향이 채워줬다. 비로소 그는 ‘수워럽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 다른 서호만의 화면 추구는 자유로운 여백의 운용이다. 서호의 화면은 경물(景物)보다 여백을 강조하고 있다. 담묵(淡墨)으로 처리되는 넓게 펼쳐진 들판이나 밭, 멀리 포착되는 원경의 아스라한 산, 그리고 농묵(濃墨)으로 구사된 근경의 계곡과 언덕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시원한 공간을 만들어 여백의 미를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에 열린 서호의 두 번째 개인전에 부쳐 서예가 원당 이영철 선생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서호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종종 인적(人跡)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화에서 인적이 사라져버린 즈음에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인적은 그림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따뜻한 해학을 던져준다. 오는 10월 러시아에서 총영사관 주최로 열리는 초대전에 그의 그림이 초대된 것도 드문 그의 화제 덕분이다. 그의 러시아 초대전은 모스크바 올림픽 좌절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기도 했다.

요즘 서호는 인사동 화실에서 하루 종일 틀어박혀 산다. 가끔 아내가 운영하는 홍어집에 들르거나 잠깐씩 사람을 만나는 일을 빼고는 하루 6~7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왜 유혹이 없겠는가. 그러나 아내를 생각하면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답시고 변변한 가장 구실조차 못하는 자신 때문에 이제껏 아내는 무던히도 고생을 많이 했다.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처음 서울로 올라온 아내는 한때 동대문에서 커다랗게 패션업을 하다가 IMF 외환위기 때 집 두 채에 가게가 날아가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게 홍어집을 차린 아내는 이제 제법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사동 ‘홍탁의 낭만’하면 알만 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사람의 길

사람들이 서호의 그림에 대해서 물으면 아내는 자신을 그토록 ‘고생시킨 그림’들이 맑아서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다지 보통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그냥 웃어넘길 뿐이다. 그 속 깊음이 서호의 그림을 받쳐주고 있는 든든한 배경임을 서호인들 어찌 모르겠는가. 묵어서 오히려 깊은 홍어의 맛처럼, 오래 되어도 여전히 담백한 막걸리처럼.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