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사람]피아노걸 노영심의 인생 실험

“연주회는 죽을 때까지, 조용하게 계속 해야죠”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그를 만나는 동안 20년이라는 시간의 경계를 여러 번 넘나들었다. 작곡가 노영심에서, 가수 노영심, 방송인 노영심, 피아니스트 노영심, 음악감독 노영심, 자연인 노영심까지….

인연이란 묘하다. 20년 전 인기가수의 특이한 노래를 듣고 그것을 작사·작곡한 앳된 소녀를 TV에서 보고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기자는 속으로 분을 삼켰다. ‘나의 청춘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는 곡조에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가사, ‘희망사항’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미 기성세대가 됐음을 깨닫게 한 노래였다. 다시 말하면 내 청춘에 가장 선명하게 조종을 울려준 그를 20년 후에 인터뷰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서울 명동성당 경내의 한적한 건물 복도에서, 두 번째는 그 부근의 어느 빈대떡 집에서였다. 그렇게 된 데는 (좀 민망한) 사연이 있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쳤을 때였다. “20년 전에 했던 인터뷰와 어쩌면 똑 같네요!”

그의 인터뷰 소감, 그것은 기자에게 뼈아픈 것이었다. 다른 기자가 20년 전에 물었던 이야기에서 맴돌았다면 이번에는 청춘이 아니라 기자생활에 조종을 울려야 할 판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는 일, 한 번 더 기회를 갖자고 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면서 하는 게 어때요?”라고 했더니 되돌아온 대답이 또 한 번 기자를 놀라게 했다. “그보다는 낮술이 낫지 않겠어요?”

노영심을 기억하는 사람의 70%가 ‘예전에 부른 노래가 좋았는데 지금은 뭐 하세요?’라고 묻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 지금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겁니까.
“저기…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나. 제가 연주활동이나 작곡을 하니까 사람들한테 보이는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지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하거든요.”
첫 질문부터 달갑잖은 모양이다. 대답이 약간 까칠하다. 노씨는 이화여대 음악대학 작곡과에 재학 중이던 1989년 가수 변진섭의 노래 ‘희망사항’을 작사·작곡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직접 작사·작곡하거나 리메이크한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그리움만 쌓이네’ 등을 부른 가수로서, 또 KBS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 방송 진행자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대중가수나 방송 MC는 그가 목표로 삼은 활동이 아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의 본업은 작곡과 연주, 특히 피아노 연주다. 매년 5월 17일 여는 그의 피아노 콘서트는 벌써 17년의 연륜이 쌓였다. 2000년부터 시작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도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그는 대중가요 앨범보다 피아노 연주 앨범을 훨씬 더 많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수이자 방송인, 즉 15~20년 전 그의 모습에 대중의 기억이 머물러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켰으니 유쾌할 리 있을까. 그 다음 질문도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복수전’의 의미를 띠고 말았다.

가수, 작곡가, 방송인, 피아니스트, 음악감독 등 여러 직업명 중에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드나요.
“글쎄요. 저는 처음부터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제가 한 어떤 행적을 보고 그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 행적의 강도나 부피가 예전에 했던 것이 그들의 눈에 더 강하고 크게 보일 뿐이지 제가 거기 머무르는 건 아니에요. 그냥 뭐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대중음악으로 데뷔해서 그때의 강한 인상이 대중에게 오래 각인된 것이 불만스러운 모양이죠.
“불만은 아니고요. 그렇게 불리는 것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는 것… 초월한 것 아닐까요.(웃음) 정확히 제가 목표하는 바는 있지만 항상 사람들이 갖고 가는 이미지 안에서 말이죠. 사람들이 저를 딴 데서 찾는 것 같아요. 제가 없는 곳에서 저를 찾는 거예요. ‘요즘 뭐 하세요’라고 하는 건 TV에서 저를 찾는다는 얘기잖아요.”

TV 출연은 일부러 안 하는 건가요.
“나갈 일이 없는 거죠. 지금의 TV가 만드는 문화환경에서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별로 없어요.”

예술 활동을 하면 꼭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팬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TV 출연 같은 것도 필요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혀 안 하지도 않고…. 아, 얼마 전에 나갔어요. PD수첩 20주년 기념 때….(웃음) 제가 TV에 나갈 때는 어떤 모양으로 나가야 된다는 걸 놓고 생각하잖아요. 그걸 판단했을 때 과연 지금 나가서 새로운 게 있을까라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연주를 하는 거니까요.”

KBS ‘작은 음악회’ 이후 피아노 연주에 집중한 까닭이 뭡니까.
“예, (난감한 듯 웃음) 당연하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거죠. 남들은 그걸 이해할 수 없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저한테는 자연스러워요. 제가 유명해지고 방송을 했던 게 제가 어떤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어디서 자동문이 열리면 ‘아, 거기가 어떤 방인가’ 하며 들어가고 그 다음에 또… 그렇게 예까지 온 거죠.”

피아노는 6살 때 어머니가 시키니까 시작하고, 중간에는 여태 배운 게 아까워서 못 그만두고,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기 위해 계속했다고 한다. 이런 환경 요인이 아니라 스스로 피아노를 해야 되겠다고 자각한 건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란다. 그 무렵 작사·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갑자기 유명해지고, 방송을 하게 된 것을 그는 ‘소풍’에 비유하기도 했다.
“제가 노래를 한 것은 가수라서가 아니라 피아노로 할 수 있는 작업의 연장이었어요. 제 노래는 제가 잘 소화를 하잖아요. 앨범을 만드는 어떤 구성이나 조건들에 있어서 제 노래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고요. ‘작은 음악회’를 2년 하고 딱 보니까 저한테는 그게 자연스럽지 않은 거였어요. 너무 빨리 판단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이고 길게 갖고 가야 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생각이 그렇더라도 결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사람들은 이걸 글로 쓰면 굉장히 의미를 두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런 걸로 더 쉬운 게 있는데 좀 더 어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 실험 중이죠. 저라는 인생을 갖고 계속 실험 중인 거예요. 그것이 실패할 수도 있지만 말이에요.”

과거에서 맴돌던 화제가 현재로 돌아온 건 이 즈음이었다. ‘피아노걸(그의 홈페이지 주소가 www.pianogirl.co.kr다)의 인생 실험’, 꽤 섹시한 제목이 될 것 같다. 그것은 뒤에 이루어진 ‘낮술 인터뷰’와 섞어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
노씨는 1년에 두 차례 피아노 콘서트를 연다. ‘명동대성당 5월 문화축제’ 기간에 개최하는 ‘노영심 5월의 피아노’와 크리스마스 공연인 ‘노영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5월의 피아노’는 5월 17일, ‘크리스마스 선물’은 12월 25일 전후로 아예 날짜까지 못 박아 놓았다.

“1994년 ‘이야기 피아노’를 시작한 게 ‘작은 음악회’를 그만둘 시점이었거든요. 날짜를 5월 17일로 정한 데는 작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보다 그렇게 못 박아 놓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어디서든 하는 것이니까… 5년 전 명동축제가 생기면서 ‘5월의 피아노’로 차를 갈아타고 명동성당으로 들어왔어요. 무료 연주이다 보니까 제가 공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최고의 공연이거든요. 관객과 공연하는 사람이 아주 잘 맞아 떨어져요.”

벌써 17년이 됐는데, 언제까지 한다는 계획은 없습니까.
“죽을 때까지 하는 거죠. 조용하게 계속, 크게 홍보하지 않고 하지만 저는 만족해요.”

두 정기 피아노 연주회 외에 최근 그가 한 공연이나 활동을 보면 그의 ‘인생 실험’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해 1월 강원 평창 허브나라 농원에서 한 ‘음력 크리스마스’ 공연은 다문화가정을 돕기 위한 연주회였다. 전남 해남 미황사 공연은 폐교 직전의 서정분교를 살리는 데 커다란 힘이 됐다. 지난 5월 21일에는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을 추모하는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서울 종로구 동성고등학교 안에 있는 불법체류자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병원인 라파엘 클리닉에서도 몇 차례 공연을 가졌다.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특별한 까닭이나 사연이 있습니까.
“제가 하는 실험 중에 제가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걸 어떻게 소화할까라는 게 포함돼 있어요. 유명하면 유명세를 치러야 하잖아요. 저를 잊어버리고 유명한 것에 이끌려서 가게 되는 것도 많죠. 아니면 그걸 이용해서 제가 뭔가를 할 수도 있고요. 그럴 때 그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어요. 제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항상 제 음악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 데서 시작을 해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된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없겠군요.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음악을 합니까.
“무얼 하나 만들어서 팔지언정 누굴 도와준다는 생각이 들면 좋은 거죠. 제가 곡을 만들면 좋아하는 가수한테 줘요. 일로써 거래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면 집중을 하게 되죠. 제가 하는 영화음악은 굉장한 상업영화는 아니에요.

저예산 영화이거나 어디서 지원을 받아서 만드는 영화, 그런 좋은 작업이죠. 그걸 하나 맡아서 하면 몇 개월 매이게 돼요. 지금은 드라마 음악 작업이 멈춰 있는데 그것도 하나 하고요. 그 중간에 정기 공연이 있어요. 그러면 1년이 그냥 가요. 그 외에 틈틈이 제가 하게 되는 일을 만나게 되는데 그건 잘 판단을 해요.”

어떤 판단요?
“이야기가 어떤지, (함께 할) 사람들의 마인드가 어떤지를 보죠. 이런 것들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조인(참여)을 해요. 재미있는 일을 하게 되는 거죠. 그 정도로 1년이 다 가는데 사람들은 저를 못 본다고….(웃음)”
영화와 드라마의 음악감독은 노씨의 활동을 넓혀준 영역이다. 영화감독 한지승씨와 결혼한 것도 그의 데뷔작 ‘고스트맘마’의 주제음악을 맡은 게 인연이 됐다. 영화 ‘미인’ ‘꽃섬’ ‘싸움’과 드라마 ‘연애시대’ ‘씨티홀’ 등이 노씨가 음악감독으로서 역량을 발휘한 작품이다. 남편 한씨가 연출한 ‘연애시대’는 노씨에게 2006년 한국방송대상 음악부문 대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어떤 영화를 봅니까. 최근에 본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가요.
“우리 영화로는 ‘이끼’가 괜찮았고, 외국영화는 ‘하얀 리본’이 인상적이었어요.”
여기서 또 말문이 막혔다. 더 물어봐도 기자가 본 영화와 일치하는 게 없다. ‘위대한 침묵’ ‘파코와 마법 동화책’ ‘바벨’ ‘K17’ ‘노이 알비노이’…. 예술적 감수성 못지않게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취향의 차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이 하는 역할이 중요할 텐데, 어떤 게 더 힘들었습니까.
“야한 음악을 만든 적이 있어요. 편집하기 전의 테이프를 다 보는 거니까 그게 야하다기보다 웃기더라고요. 재미있었어요. 힘드는 건… 드라마는 막노동이고 영화는 중노동이에요.(웃음)”

음악감독은 어떤 점이 좋다고 생각하고 보람을 느낍니까.
“저희 남편도 음악을 좋아하는데 (음악감독은) ‘영상의 글’을 쓴다고 해요. 오히려 제 음악이 이미지와 만나서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더 완전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연주하는 사람이 그래서 다 영화음악을 하거나 영상음악에 관여하고 싶어 하죠. 제가 피아노를 친다고 했을 때 그림을 그리잖아요. 눈앞에 그려볼 때 그게 더 선명해져요. 그걸 더 연구하고 공부하게 되니까 좋은 것 같아요.”
노씨의 음악은 묘한 마력이 있다. 곡은 물론 가사까지 감성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게 놀랍다. 낮술의 힘을 빌려 20여 년 동안 품었던 궁금증을 푸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라고 부르는 데 동의합니까.
“그래요? 그렇게 불러주는 것도 어쩔 수 없죠. 제가 하는 연주는 여백이 많으면서 자연하고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인 것 같아요.”

스스로의 음악을 정의해 보시죠. 어떤 음악을 추구합니까.
“제 음악에 대해서요? 제가 스스로 규명하기는 그렇지만… 사람들이 제 음악을 맑다고 하고, 애잔함이 있다고 해요. 감성적인 면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현상은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으면 사랑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에요.”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게 바로 그겁니다. 그런 음악적 감수성이 어디서 나옵니까.
“글쎄요. 솔직하거나 진실하거나 꼼꼼하거나….(웃음)”

신동호가 만난사람

자연이나 종교, 명상,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타일리스트, 또는 디지털 속도에 지치고 질린 현대인을 위로하는 아날로그의 미학,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푸하하!(웃음) 스타일리스트라고요? 그래도 좋고요. 음… 공통점이 있긴 하네요. 작고 소박하다는 건 저에게 모아지는 이미지이긴 한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미학적으로 농익어야 하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올 4월에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공연을 했어요. 음악감독으로서 지휘도 좀 하면서 하는 공연이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자신의 음악을) 집대성을 해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뭔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 확장돼야 하는, 그런 게 있잖아요. 작고 소박함의 다음 단계가 어떤 것인지, 작은 것이 더 작아지더라도 말이죠, 그런 걸 짚어줘야 되잖아요. 결국은 사람들에게 답이 있는 게 아닐까요.”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