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탐색]20세기 초 조선 서민들은 무슨 일을 했나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 100여년 전 이 땅에 새롭게 등장했다가 지금은 사라졌거나, 그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지금은 종적을 감춘 직업들이다. 이런 직업을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서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이 살았던 무렵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20세기 초반 조선의 신문·잡지 기사를 바탕으로 지금은 역사의 퇴적층에 묻혀버린 근대 초기 조선 서민들의 일상사와 생활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
이승원 지음·자음과모음 1만3500원

사랑은 전화를 타고 흘렀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친왕 이강은 일곱 번째 결혼식에서 창덕궁 전화교환수 홍정순을 후궁으로 맞았다. 의친왕이 예순하나, 홍정순이 열아홉 살이었다. 조선에 첫 전화가 개설된 것은 1898년 1월 경운궁이다. 고종이 신하들에게 전화를 걸면 “네 번의 큰 절이 끝난 후 신하들은 공손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조선인 전화교환수는 1920년에 등장해 1930년대에는 수천명에 이르렀다. 고용주는 월급과 승진 이외에 당시 사정을 반영해 ‘퇴근 후 귀가 시 신변보호’까지 보장했지만, ‘감정노동’의 애로는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요즘 여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여성 전화교환수들은 남성들의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종로 우미관과 단성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목소리 배우’ 변사들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직종 중 하나였다. 극장마다 주임변사와 보조변사가 따로 있었고, 스타 변사는 고액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변사들은 월급쟁이였지만 그 월급이 일류 배우들의 수입보다 많았다.

근대 초기까지 조선에는 명칭만으로는 현대인들이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없는 직업이 있었다. 전기수가 대표적이다. 한글로 풀면 금방 감이 온다. ‘책 읽어주는 사람’이다. 전기수는 책을 보고 읽은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째로 외워서 낭독했다. 낭독은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전기수는 학교, 도서관, 기차, 버스처럼 근대적인 공적 영역이 생겨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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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전차와 버스가 출현하면서 등장한 여차장은 단박에 “신기한 구경거리”가 됐다. “버스를 공짜로 탄다는 이유”로 여차장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노동조건과 성적 모욕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은 성폭력에 무감각한 사회”였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소금꽃 나무>에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시절 겪은 성적 모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 땅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차별과 성적 폭력의 역사는 어지간히 오래된 일인 셈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