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액터 뮤지션 뮤지컬의 실험

뮤지컬 배우가 연주를 한다. 노래하며 연기하기도 바쁠 텐데 수준급의 기교마저 보여준다. 감탄이 절로 터져나온다. 창작 뮤지컬 ‘모비딕’이다.

액터 뮤지션 뮤지컬. 조금은 생소하다. 연기자가 연주자의 역할도 함께 하는 형식이란 뜻이다. 아무리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 ‘엄친딸’이 대세라지만 이쯤 되면 무대 위 배우들에게 질투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뮤지컬을 감상하는 색다른 즐거움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뮤지컬 <모비딕>

우리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요즘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렸던 인기작 중에는 액터 뮤지션 형식이 더러 있었다. 손드하임의 작품을 존 도일이 연출한 2005년 리바이벌 뮤지컬 ‘스위니 토드’나 2006년 ‘컴퍼니’가 대표적이다.

작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기와 노래, 연주를 모두 함께 보여주니 뮤지컬 말고는 감히 꿈꿔보기조차 힘든 형식이다. 참신한 발상의 전환이 이색적이어서 “우리 무대에서는 과연 언제쯤?”이란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불과 수년 전인데, 이제 창작 뮤지컬로도 이런 유형의 작품을 만나게 됐다. 학습능력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두뇌를 가진 민족임을 새삼 절감할 수 있다.

이상적인 단계별 시장을 거치며 작품을 숙성해온 사례라는 점도 반갑다. 뮤지컬 ‘모비딕’은 최근 우리 무대에서 시도되고 있는 여러 검증과정을 거치며 성장해온 창작 ‘우등생’ 같은 뮤지컬이다. CJ문화재단의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 선발돼 독회(reading)를 가졌고,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창작 지원작으로 선정돼 1시간 남짓한 트라이아웃 무대도 꾸며봤다. 프로듀서의 안주머니에 숨겨놓았다 느닷없이 관객들에게 내미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실험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 시장으로 진입하는 이상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성장시킨 셈이다. 상업무대에서의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 지난해, 좀처럼 돈 벌기 힘들다는 초연임에도 이미 좋은 흥행을 기록한 이면에는 이런 정성과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올해 무대는 한층 더 성장했다. 새롭게 가세한 두 주연배우, 윤한과 지현준의 등장은 기존의 배우들과 어울려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했다. 특히 퀴퀘크 역의 지현준의 무대는 특별했다. 때로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동물적인 움직임을 통해 그는 작품이 원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완벽히 구현했다. 초연 당시 연주가가 연기를 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인지 좋은 연주 끝에 대사와 연기가 어설픈 미완의 결점을 보였다면, 올해 앙코르 무대는 그야말로 일취월장해서 무척 흡족하다. 연기가 안정되니 연주도 더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오랜만에 관객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무대였다.

1989년 웨스트엔드에서는 80년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미스 사이공’이 막을 올렸다. 멜로드라마적인 줄거리와 거대한 헬기 세트 등이 단연 화제가 됐다. 하지만 그해 영국 최고 권위인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지컬상을 받은 작품은 ‘미스 사이공’이 아닌 ‘금단의 별로의 귀환(Return to the Fobidden Planet)’이었다. 중소형 극장에 세트 변환도 없는 작품이었지만 여섯 명 남짓한 출연진이 매 뮤지컬 넘버마다 악기를 바꿔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며 극을 진행하는 액터 뮤지션 형식의 실험이 그 진가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재해석해야 하며, 또 일탈과 파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오랜 진리를 상업무대인 뮤지컬계에서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다.

문화내시경

스타와 자본의 논리가 무대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요즘 우리 뮤지컬 산업에서 ‘모비딕’이 보여준 파격과 실험은 그래서 반갑고 또 소중하다. 해마다 더해지는 완성도는 이 뮤지컬이 오래 사랑받는 좋은 창작 콘텐츠로서의 성장 가능성도 보여주는 것 같아 즐겁다. 이런 무대가 있어 더 행복한 2012년 따뜻한 봄날이다.

원종원<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