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 파네라이, 루미노르 - 신세대 감성 자극, 21세기 들어 재조명

오피치네 파네라이(Officine Panerai)는 시계업계에서 흔치 않은 이탈리아 태생의 브랜드라는 사실 외에도 하나의 신드롬과 같다. 파네라이가 손목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한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이들의 시계는 일반인들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오직 소수 군인들만을 위한 시계였다.

이런 파네라이가 세상에 알려지고 파네리스티(Paneristi)로 불리는 특정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21세기 들어 뜨겁게 재조명되며 인기를 누리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키워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스위스 그룹에 인수 이후 승승장구
우선,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파네라이를 흔들어 깨운 일등 공신으로는 ‘록키’와 ‘람보’ 시리즈로 유명한 세계적인 액션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영화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그는 우연히 로마의 한 시계숍 쇼윈도에 전시된 파네라이의 루미노르(Luminor) 시계를 보고 운명처럼 첫눈에 매료된다.

루미노르 1950 PAM 372

웬만한 성인남성 손목 위를 꽉 채우는 큼지막한 사이즈의 쿠션형 케이스에 아라비아 숫자로 12-3-6-9만 표시된 극도로 단순한 다이얼, 그리고 크라운을 보호하는 반달 형태의 크라운 가드와 방수 성능 보장을 위해 크라운을 케이스에 밀착시켜 고정시키는 지렛대를 닮은 레버로 구성된 이 개성 넘치는 시계를 그는 결국 구입했고, 실생활에서는 물론 공식석상이나 영화에도 곧잘 착용하고 등장할 만큼 좋아했다.

남성미 넘치는 그의 근육질 체격과 파네라이의 시계는 제짝을 만난 듯 잘 어울렸고, 이런 이미지에 매료된 남성팬들 사이에서 차츰차츰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주목에 고무된 파네라이 역시 홍보대사를 자청해준 실베스터 스탤론를 향한 감사와 헌정의 의미로 그의 별명인 슬라이(Sly)를 따서 슬라이테크(Slytech)라는 스페셜 모델을 1995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 무렵 실베스터 스탤론은 친구인 아놀드 슈워제네거에게도 파네라이를 선물한다. 이 세기의 두 액션배우의 우정에 파네라이가 일종의 아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후 1997년 스위스 럭셔리 그룹인 리치몬트에 인수된 이후부터 파네라이는 날개라도 단 것처럼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출시된 루미노르 마리나 시리즈는 단숨에 히트를 쳤고, 각 모델별 한 해 제작 수량이 몇천개 이내로 정해져 있는지라 시계를 구하기 위한 경쟁 또한 갈수록 치열해졌다.

루미노르 마리나 1950 PAM 422

파네라이가 21세기 들어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게 된 또다른 숨은 요인 중에는 오버사이즈 시계의 유행도 한몫 한다. 기계식 시계의 부흥과 더불어 과거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커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시계 크기에 대한 관용이었다.

남성용 시계 사이즈로는 커봐야 40㎜ 정도가 마지노선이라고 여겼던 과거와 달리 44㎜, 심지어 47㎜에 이르는 손목시계로는 전례 없이 큰 사이즈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에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브랜드 중 하나가 파네라이였다.

1936년 이탈리아 왕립 해군 소속의 특수부대원들을 위해 제작된 파네라이 최초의 손목시계인 라디오미르(Radiomir)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47㎜ 케이스에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해당 시계 형태와 디자인은 현재의 파네라이 컬렉션에도 외관상의 큰 변화 없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유물을 발굴·재현하고 즐기는 이른바 복고 트렌드의 유행 또한 파네라이 시계가 현대의 시계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 파네라이 컬렉션을 양분하는 라디오미르나 루미노르 같은 명칭들은 사실 야광도료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둘 다 방사성 원료인 라듐을 바탕으로 한 특수혼합물로서 라디오미르는 1916년에, 루미노르는 1949년에 각각 파네라이에 의해 개발되고 특허 등록되었다.

이 자체 발광성 파우더를 개발한 의도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야간 군사작전에서나 이탈리아 해군 폭파대원들이 저속주행 어뢰를 타고 심해로 잠수해 촌각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도 시간을 용이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에야 수퍼루미노바라는 비방사성 야광 원료가 개발되어 여러 종류의 시계나 장비에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20세기 초에 발광성 파우더를 개어 시계 다이얼판에 도포했다는 자체가 혁신적인 것이었다.

일상 속에 즐기는 고급 브랜드 효시
낮이건 밤이건 어떤 상황에든 최상의 시인성을 보장하는 군용시계를 만들기 위한 파네라이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다이얼판을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플레이트로 포개는 방식을 택했다.

루미노르 마리나 1950 PAM 422 앞뒷면

마치 스텐실 기법처럼 상부 플레이트에 미리 숫자 인덱스 부분만 파낸 뒤 하부 플레이트 위에 겹친 다음 파인 빈 공간에 라디오미르나 루미노르 같은 자체 개발 도료를 층층이 채워 올렸다.

이는 평평한 단일 플레이트 위에 발광성 물질을 얹는 방식보다 더 많은 양이 소모됐지만, 그만큼 더 밝은 밝기와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파네라이만의 이 독특한 다이얼은 후대에 샌드위치 다이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2000년도 들어 파네라이의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는 이렇듯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길항하며 상승작용을 한 데 기인했다. 2차 세계대전과도 연관이 있는 군용시계로서의 역사적인 배경과 잊혀진 과거의 유산을 발굴해 현대의 시계 애호가들이 열광할 만한 코드들을 추가하는 파네라이의 끈질긴 노력, 그리고 이를 열렬하게 호응해주는 마치 컬트 집단과도 같은 마니아들의 충성도까지, 삼박자가 맞물리며 파네라이는 창립 이래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

특히 루미노르 컬렉션은 파네라이를 대표하는 핵심이자 현대 손목시계의 아이콘 중 하나로 통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파네리스티들은 루미노르 시계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다양한 색상과 소재의 가죽 스트랩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면서 시계를 그야말로 액세서리처럼 즐기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공통된 관심사를 지닌 회원들과 서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파네리스티닷컴 외에도 국내 최대의 시계 커뮤니티인 타임포럼 내의 파네라이 게시판만 보더라도 국내 마니아들의 열정 또한 얼마나 대단한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기본 수백에서 수천만원에 달하는 고급시계의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시계를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여러 갈래로 즐기는 문화를 형성시킨 브랜드도 어쩌면 파네라이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

시계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이들이 보기에는 고급시계를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시계를 단지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성인 남자들의 장난감’처럼 향유할 수 있는 놀이문화 형태로 치환시켰다는 점은 분명 파네라이가 지닌 또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