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예술가를 슬프게 하는 ‘예술복지’

대학로 지하철 계단 앞 거대한 광고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림을 못 그리겠다면 지금 당장 연락하세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광고였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는데, 진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약하나마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2월, 내 작업실로 몇 분이 일을 하러 왔다. 양평에 가서 특강을 하기로 했는데 그 청중들에게 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사전 촬영을 하러 온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현대 도시와 문화에 대한 여러 질문을 했고 나는 설익은 답변을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을 했다.

흘낏 보니 카메라를 다루는 두 사람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문 대대로 이어져왔다는 중국집 주방장이 수타면을 뽑은 듯하였고, 뷰파인더를 응시하는 눈빛은 조훈현 같은 국수가 반상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몇 분 되지도 않을 분량을 저렇게 공들여 찍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용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51+>의 한 장면 | 다음 영화

며칠 후, 그러니까 3월 초에 양평에 특강을 하러 갔다. 그들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특강 하는 모습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화면을 찍어서 정밀하게 편집하고 정성껏 사후 보정을 통해 완성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역시 그 두 사람의 솜씨와 정성은 그날의 그 어떤 사람보다 밀도가 높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열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이가 있어야 작품을 할 수 있는 감독들
얘기를 나눠보니,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쪽에서 이미 준밀한 작품들을 세상에 알린 감독들이었다. 2010년 5월 마포구 동교동의 재개발 공사 과정에서 불거진 칼국수집 ‘두리반’ 사태, 이에 참여한 가난한 인디 음악가들의 문화적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51+>를 만든 정용택 감독이 그 한 사람이었다. 인상적인 턱수염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완화하면서 세상의 표리를 아울러 응시하되 인간사 흐르는 눈물은 놓치지 않는 듯 보였다. 게다가 중후한 목소리라니. 낮은 목소리로 웃는 사람은 견실하다.

다른 한 사람은 2013년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흰기러기상’을 수상한 조세영 감독이었다. ‘흰기러기상’이 어떤 수위의 상인지 몰라서 물어봤더니, 살짝 웃으면서 ‘대상’이라고 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살짝 웃는 사람은 아름답다. 조세영 감독의 대상 작품이 <자, 이제 댄스타임>이다. 모성성과 여성성이 긴장하고 충돌하는 ‘낙태’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올 봄에 여러 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되었고 곧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나는 그 작품을 보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다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높은 수준과 경륜을 지닌 감독들이 왜 내 작업실로 또 양평으로 촬영을 하러 왔을까. 속으로 짐작은 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영 감독이 말했다. “벌어야 작품 하죠.” 덧붙이기를, 주말 결혼식장의 촬영은 이미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격전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예식업체들이 저가 납품으로 후려쳐도 워낙 많은 학생들이 예식 촬영 알바를 뛰기 때문에 돈도 안 되고 공들여 찍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밖의 작은 일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자기 작품을 해야 할 시간에 계속 남의 추억을 찍으러 다닐 수도 없다고 했다. <자, 이제 댄스타임>의 개봉을 앞두고 숱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그런 일을 할 짬도 없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대학로 인근)에 붙어 있는 예술인복지재단의 광고 | 정윤수

대학로에 일이 있어 갔다가 지하철 계단 앞에서 멈춘 적이 있다. 거대한 광고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림을 못그리겠다면 지금 당장 연락하세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광고였다. 광고 그 자체로 아주 잘 만든 것이었다. 광고판 속의 글씨는 정말 물감이 모자란 듯 힘들게 꿈틀거리면서 희미해졌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는데, 진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약하나마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모두 2713명의 예술가들이 ‘예술인 긴급복지지원’ 사업에 문을 두드렸다. 미술이 806명(29.7%)으로 가장 많고 연극 607명(22.4%), 영화 384명(14.2%), 음악 325명(12.0%), 문학 266명(9.8%), 만화 75명(2.8%), 대중예술 73명(2.7%), 국악 67명(2.5%), 무용 64명(2.4%), 사진 46명(1.7%) 등이 신청했다. 이 가운데 560명이 6월 중순 현재 선정됐다. 이들에게는 매달 100만원씩 3~8개월간 지원된다.

현장 이해 없는 예술복지재단의 행정
이렇게 정리는 되었지만 올해 내내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업이다. 신청 자격 및 그 서류가 예술가에 대한 대접은커녕 인간적 비애감을 느낄 정도였다는 후문도 있었다. 생계 곤란을 입증하기 위해 너무 많은 서류와 절차와 기준이 있어 과연 ‘긴급지원’인가 하는 점도 제기된 바 있다.

지난 5월 13일, 예술인복지재단이 ‘건강보험료 납입고지액이 최저생계비(2014년 4인가구 기준 월 163만원) 200% 이하여야 한다’는 새 기준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도 문제였다. 생계 곤란으로 인하여 건강보험 가입 자체가 안 돼 어쩔 수 없이 가족의 피부양자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대거 탈락할 뻔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아무리 하찮은 죄인이고 중범을 저지른 악인이라 해도, 누군가가 수인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주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했다. 그런 진심이 작동해야 한다.

이 재단과 관계법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지난 2011년 1월,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지병과 생활고 끝에 세상을 떠난 비극 때문에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이때 생각해야 할 것은 각 장르별 특성과 해당 분야 예술가들의 생존방식에 대한 꼼꼼한 현장 확인이다. 예컨대 가난한 연극배우의 경우, 물리적인 시간 투여는 저녁 공연 서너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밖의 시간에 알바를 구해서 뛰기는 너무 어렵다. 작품에 몰두하기도 어렵고 지속적인 알바를 할 수도 없다. 영화 쪽의 젊은 예술가들은 본격 촬영이라도 시작되면 자는 시간 말고는 전혀 짬을 낼 수가 없다. 신청 비율이 가장 높은 미술 쪽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진짜 물감 살 돈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