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동남아 해역은 '해적의 바다'

'보물섬의 지도를 우연한 기회에 얻은 소년 짐 호킨스는 보물섬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보물섬에서 그는 해적인 실버 선장과 보물을 놓고 치열한 결투를 벌인다.'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의 주요 내용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자주 모습을 비추는 해적은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나뉜다. 예컨대 [피터팬]에 나오는 갈고리손의 애꾸눈 후크 선장과 [보물섬]의 외다리 실버 선장은 전자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이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나오는 하록 선장, 오는 9월 5일 개봉하는 [캐리비안의 해적-블랙 펄의 저주]에 나오는 잭 스패로우 선장(조니 뎁 분)은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물론 전자다. 보물을 찾아 불우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정의로운' 해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면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들은 약탈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영화나 소설의 내용은 잊어야 한다.

해적의 사전적 의미는 '해상에서 배를 습격해 재화를 강탈하는 도둑'이다. 해적은 13~14세기에 발트해-북해-영국해 등에 출몰하기 시작해 15세기에 최고로 번성하다가 영국 정부가 해적 진압에 나서면서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17세기 말 말레이시아-보르네오-남중국해-페르시아 해안 등에 잔당이 일부 남아 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해적은 완전히 쇠망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일부 지역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에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일반 사람은 해적이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재미난 소재'일 수가 있지만 바다를 통해 화물을 나르는 선원에게는 갑자기 나타나 총부리를 들이대는 '공포의 존재'일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해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통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국제상공회의소(ICC) 국제해사국(IMB) 해적신고센터(PRC)가 집계한 연도별 해적행위 발생 건수를 보면 1993년 103건이던 것이 96년에는 228건으로 2배 가량 늘었다. 이어 1999년에는 300건, 2000년 469건으로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2001년에는 335건, 2002년 370건으로 증가세가 주춤하긴 했으나 올들어 지난 3월까지 103건의 해적행위가 발생, 처음으로 1분기에 100건을 돌파했다.

문제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2,638건의 해적행위 중 55% 이상이 아시아해역(동남아 1,202건, 극동 262건)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1998년 9월 한국인을 포함해 모두 16명의 선원을 태운 파나마선적 화물선 텐유호(2,660t)가 말라카해협 근해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은 후 실종되는 등 지난 10년간 이 지역에서만 모두 7건의 피해를 입었다. 해적 문제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최근 해적이 전 세계적으로, 특히 동남아에서 기승을 부리는 것은 동남아의 경기 침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PRC는 분석하고 있다. 또 세계 무역의 발전으로 보통 수만 척의 선박이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고 있어 목표물이 늘어난 것도 한 요인으로 풀이되고 있다.

오공균 해양수산부 안전관리관은 "최근 해적행위가 총기 무장으로 선원 폭행-살해의 빈도가 높은 등 점점 흉포화되고 초국가적 조직범죄화가 되고 있다"면서 "전체 해적 범죄의 대부분이 한국 선박의 주요 이용 항로인 말라카해협 등 동남아해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데다 이들 해역은 9-11 테러 이후 해상테러의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동남아해역은 우리나라 수입 원유의 99%와 수출 화물 35%가 운송되고 있는 길목이다. 오 안전관리관은 "동남아해역에 한국 선박만 연간 2,000회 이상 운항되고 있고, 비록 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제3국의 국적선인 송출 선박에 승선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나라 선원이 해적 범죄에 노출돼 있음을 고려할 때 중차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가간 해적방지협력협정 추진

동남아 해역은 한국 선박에 해적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지리적 여건상 수색구조 등 직접적 대응이 불가능한 것으로 해양부는 보고 있다. 이 중 말라카해협은 길이가 약 800㎞, 폭은 최소 수십㎞에 불과한 좁고 긴 형태의 수로이나 세계 각국 선박의 통항 빈도가 높은 중요한 길목이다. 말라카해협은 최근 수세기 동안 해적이 주요 활동 거점으로 이용한 위험수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만일 이 해협에서 테러 공격이 자행될 경우 아시아 등 세계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으로 관련 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또 이 지역 해적은 총으로 무장하고 많은 수의 선원을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명

정부도 이렇게 해적주의보가 발령됨에 따라 1999년부터 해적 피해 방지를 위해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양수산부는 관계부처간 해적피해방지협의회를 구성하고 매년 7,000여 명의 선원을 대상으로 해적 대응 요령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홍보책자를 정기적으로 간행하고 있다. 또 아시아 지역 16개 국가간 해적방지협력협정의 체결도 추진 중이다. 이 협정이 체결되면 아시아 지역에 해적정보공유센터와 16개 국가에 각각 전담연락창구가 설치돼 국가간 24시간 긴밀한 해적정보교환체제가 구축된다. 말라카해협 등 해적 빈발 지역에 대한 순찰강화 등에 법적 구속력도 부과, 국제협력체제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완제 기자 jw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