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와 문화]방송사들의 ‘문화 프로그램 죽이기’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 방송 모습. <경향신문>

경제계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문화계가 덩달아 위기를 맞고 있다. 대한민국 방송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잇단 문화 프로그램들의 폐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EBS의 간판급 프로그램인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도 논란거리 중 하나다. 7년여간 방송해오던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올 봄 개편을 맞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말부터 유행처럼 번지던 지상파 TV의 문화 프로그램 폐지가 결국 라디오 방송에마저 옮겨오지 않을까 하던 일부의 걱정이 현실이 됐다. 이번 개편에서는 <책으로 만나는 세상> <강지원의 특별한 만남> 등 EBS 라디오의 다른 문화 관련 프로그램도 함께 문을 닫는다. 이제 EBS 라디오에서 문화를 만날 일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문화 한 페이지>의 폐지 계획이 알려지자 청취자들과 방송 관계자, 문화계 인사들의 반대 서명과 항의가 빗발치고 여러 공연단체가 의견서를 개진했으나 결국 외면받고 말았다. 2월 17일 방송사 측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프로그램의 ‘퀄리티’가 낮아서 폐지하게 됐다고 설명했지만 이 ‘질 낮은’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바로 몇 달 전 한국방송대상에서 진행자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다. ‘수준 낮은’ 프로그램에 수상의 영광을 뺏긴 많은 대한민국의 방송 진행자를 떠올리자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문화 프로그램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용적’이라는 외국어 프로그램들이 자리 잡을 예정이다. <팝스 잉글리시> <영어가 있는 재즈> <모닝 스페셜> 등을 확대·신설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버린 EBS의 영어사랑에 얼마나 많은 청취자가 귀를 기울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방송사는 편성권의 독립을 이야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권력이나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뜻에서 독립이지, 그 사회적 책임의 회피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돈벌이 사정이 시원찮다고 혹은 웹 사이트의 방문자 수가 적다고 문화 프로그램을 없앤다면,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저 방송사의 직무유기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시사와 문화

EBS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요즘 우리 방송가의 편성정책을 보면 정말 걱정이 앞선다. 언론법 개정을 둘러싸고 미디어의 공영성에 대한 논란이 어느 때보다 거세지만, 정작 우리나라 방송사들의 유례없는 ‘문화 프로그램 죽이기’에는 어느 방송 관련 단체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BBC의 초대 사장이던 존 리스 경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 공영방송”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혹시 우리 방송사들은 수익성 창출이라는 유혹에만 허우적대다 정작 국민이 원하고 또 어려운 현실에서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문화 정보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종원<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jwon@s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