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철완 아톰>과 20세기

지구의 슬픈 역사 반영한 ‘약자의 비애’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인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철완 아톰>이 다섯 번째로 리메이크됐다. 1952년 만화로 처음 태어난 <철완 아톰>은 196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1966년까지 193화를 방영했다. 1964년에는 극장판인 <아톰:우주의 용사>가 나왔고, 1982년 <신(新) 철완 아톰>이 텔레비전 시리즈로 다시 제작됐다. 극중에서 아톰이 태어난 해인 2003년, 소니 픽처스는 <돌아온 아톰>이란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들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아톰은 다시 할리우드로 수출돼 2009년 <아스트로 보이>란 3D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됐다. ‘아스트로 보이’는 역대 아톰이 외국에 수출될 때 붙여진 영어 이름이다.

2009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아스트로 보이>(위)와 2003년 소니 픽처스가 만든 <돌아온 아톰>(아래). 아톰에 비해 결기가 부족해 보이는 아스트로 보이는 상의를 입고 있다.

최근 개봉한 <아스트로 보이>는 원작에 못 미친다는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잘해 봤자 본전.’ 성공한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하는 아들의 숙명이다. 인간적인 슬픔과 고민, 동심이 교차하는 야무진 꼬마 아톰의 모습 대신 영양을 충분하게 섭취해 늘씬하게 컸지만 왠지 맥이 없어 보이는 요즘 아이들처럼 밋밋한 로봇 소년이 화면에 존재한다. 원조 아톰은 빨간 팬츠와 검은색 장화를 신은 레슬링 선수 복장인데 반해 아스트로 보이는 웃옷를 입고 있는 것도 왕년의 아톰 팬에게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아동성추행에 대해 매우 민감한 미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반나체로 나오는 장면이 많으면 경고를 받는다고 한다) 여러 차례 만들어진 만큼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고, 화면 효과도 그리 특별하지 않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보던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재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무엇보다 작품이 태어난 시대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아톰이 당시 팬들의 감성에 작용하던 힘을 그대로 가져오기란 불가능하다.

패전·피폭의 일본 정서에서 탄생
태어난 연도로 따질 때 환갑이 다 돼 가는 아톰은 20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톰의 이름인 ‘원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한국, 중국, 동남아를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인류 최초의 원폭 피해국이 됨으로써 결국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라는 정서를 갖고 전후시대를 맞이한다. 종전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제독이 이끈 미국의 신탁통치는 패전과 피폭의 우울한 정서를 가중시켰다. 서구 열강을 따라 아시아를 제패하는 유사 제국주의의 맹주를 꿈꾸다가 결국 폐허가 된 일본의 역사적 맥락에서 아톰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당시 일본 사회를 연상시킨다. 2003년의 지구. 과학부 장관인 덴마 박사에게는 도비오라는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이 있다. 어느날 도비오가 교통사고로 죽자 슬픔에 잠긴 덴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이 생긴 로봇 아톰을 만든다. 처음에 아톰을 도비오처럼 귀여워하던 덴마 박사는 아톰이 성장하지 않자 그가 아들을 대신할 수 없다는 데 실망해 아톰을 서커스단에 판다. 관중 앞에서 로봇 묘기를 선보이던 아톰은 덴마의 후임 과학부 장관인 오카노미쓰 박사에게 발견돼 그와 함께 살게 된다. 10만 마력의 힘과 7가지 초능력을 지닌 아톰은 악당들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전사로 새롭게 태어난다.

덴마 박사는 전쟁 당시 일본인 누구나 가족의 죽음을 겪었듯이 사랑하는 아들 도비오를 잃었다. 그는 아톰을 만들지만 절망과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로봇이면서도 인간의 기억과 마음을 지닌 아톰은 아톰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을 겪는다. 그러나 아톰은 자신의 고통을 뒤로 한 채 지구를 침략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거대한 로봇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 버림 받은 슬픔,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는 일본 전후시대의 멜랑콜리한 감성을 자극한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지구(일본)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아톰의 모습을 전후 일본의 시대적 과제와 겹쳐서 읽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2005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된 이동기의 작품 <국수를 먹는 아토마우스>.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는 서구인과 달리 젓가락을 사용하는 모습은 아토마우스가 아시아 출신임을 보여 준다.

히로히토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태어난 데즈카 오사무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었다. 그는 오사카시 바로 옆의 신흥관광 도시인 다카라즈카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 대기업인 스미토모의 중역이던 아버지는 어린 데즈카에게 프랑스제 영사기로 디즈니 만화영화를 틀어 주었다. 데즈카가 규세이중 마지막 학년이던 1945년 3월, 패전 직전이던 도쿄와 오사카에 연합군의 대공습이 가해졌다. 당시 오사카의 공장에 동원돼 일하던 데즈카는 공장 옥상 감시탑에서 공습경계를 서다가 3시간 폭격으로 13만가구가 불타고 3100여 명이 숨지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이런 경험은 그의 만화에서 하나의 시각적 원형이 된다. 데즈카가 전쟁을 일으킨 기성세대 대신 꼬마 아톰을 내세워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이 같은 불행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데즈카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오사카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 과정에 입학한다. 이 과정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한 군의관 보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 과정을 이수하면 전문학교 졸업 자격을 주었다. 그는 1953년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면허를 받지만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줄곧 병행한 만화가의 길을 택한다. 18세이던 1946년 <엄마의 일기장>이란 작품을 쇼코쿠민신문에 연재하면서 데뷔한 데즈카는 이듬해 로버트 스티븐슨 원작의 <신보물섬>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40만부나 팔았다. 또 1950년 <라이언 킹>의 원조인 <정글대제>를 <만화소년>에 연재한 데 이어 23세 때 출세작인 <철완 아톰>을 같은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33세 때인 1962년에는 나라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는다. 그가 의사 신분을 유지한 것은 당시 만화가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무시프로덕션을 설립해 1963년 1월 일본의 첫 국산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내놓는다.

패전국이 거둔 애니메이션의 승리
1963년 1월 1일 오후 6시15분 일본 후지TV를 통해 첫 방영된 시리즈 <철완 아톰>은 미국이 못 해낸 일을 해냈다. 당시의 애니메이션 기술은 반년에서 2년씩 걸려서 한두 시간짜리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월트디즈니조차 텔레비전용 시리즈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디즈니를 능가하겠다는 꿈을 꾼 데즈카는 25분짜리 편당 50만엔이라는 헐값에 <철완 아톰>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세계 속에 우뚝 선 ‘재패니메이션’의 명성을 만들어 낸 동시에 업계의 저임금 구조를 고착시켰다. 시리즈가 계속되는 4년 동안 무시프로덕션의 애니메이터 가운데 두 명이 과로로 죽고 한 명이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이동기의 <아토마우스>(위)와 데즈카 오사무의 1963년작 <아톰>(아래).

<철완 아톰>의 성공은 패전국 일본이 거둔 작은 승리였다. 서양 근대의 초극이라는 과제는 일본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을 움직인 힘이었다. 패전 이후 실의감에 빠져 있던 일본은 <철완 아톰>에 이르러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전 세계를 경천동지하게 했듯이 오랜만의 승리감을 맛보았다. 작은 체구의 아톰이 큰 로봇들과 싸워서 이기는 장면은 일본이 미국을 이겼으면 하는 로망을 불러일으킨다. 비슷한 사례로 재일한국인인 리키도잔(역도산, 본명 김신락)이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을 배운 뒤 특유의 가라데촙 기술로 거인 샤프 형제와의 대결에서 이겼을 때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텔레비전의 레슬링 중계를 지켜보았다.

재패니메이션은 일본의 문화적 부활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일본의 전통문화는 유럽 상류사회에서 매혹의 대상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에 열광했고, 유럽 부자들은 공예품을 수집했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으로 낙인 찍힌 이후 일본의 전통문화를 드러내 놓고 찬미하는 건 외국인에게나 일본인에게나 모두 금기사항이었다. 군국주의를 만들어 낸 전통문화 대신 일본이 세계시장에 떳떳이 내놓고 세계인들 역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건 일본식으로 변형된 서양의 대중문화였다. ‘만화의 신’이라고 추앙받는 데즈카 오사무는 재패니메이션을 통해 이 일을 해냈다.

아톰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일본에 들어와서 다시 변형된 것이다. 데즈카는 아톰을 만들면서 미키마우스를 모방했다. “머리에 두 개의 뿔(삐친 머리카락)을 단 아톰의 머리는 까맣고 둥근 한 쌍의 귀를 지닌 미키마우스 머리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미국의 미키마우스가 일본 소년의 마음을 가진 혼종적인 로봇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톰은 피노키오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톰은 서양의 문물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받아들여서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이룬 일본 근대를 담은 캐릭터다.

이와 관련해 한국 팝아트의 선두주자인 이동기의 캐릭터 ‘아토마우스’를 떠올릴 수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끝나고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는 팝아트가 탄생했다. 팝아트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미술에 끌어들인 작업으로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넘나든다. 코리안 팝아트의 대표 작가인 이동기는 1994년 ‘리모트 컨트롤전’에서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쳐 놓은 ‘아토마우스’를 발표했다. 아토마우스는 아톰과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면서도 미키마우스처럼 코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 한국 남학생들이 입었던 일본식 검정교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A라고 새긴 이름표를 달았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잇달아 방송되는 애니메이션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보면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미키마우스는 일본에 와서 아톰이 됐고, 미키마우스와 아톰은 한국에 와서 아토마우스가 됐다. 서구문화, 아시아에서 선구적으로 서구문화를 수용한 일본의 근대문화, 일본 식민지배를 통해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한국 근·현대문화의 착종된 역사가 아토마우스라는 캐릭터에 담겨 있다. 그가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붙인 A는 아토마우스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대중문화의 세례 속에서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팝아트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낸 아트의 약자이기도 하다. 머리 색깔이 까만 아톰과 달리 수시로 색이 바뀌는 아토마우스는 록 음악을 연주하거나 우주를 날거나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기도 하는 ‘세계화된’ 캐릭터다.

디즈니 미키마우스에서 착안
아톰이나 아토마우스가 갖는 자부심 또는 비애는 일본이나 한국의 관객들만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정서이기도 하다. 아시아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모방하거나 때때로 능가하는 현대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스로 기준이 되지 못하고 남의 궤도를 따라가야 하는 자의 비애가 들어 있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및 민족주의가 경합하면서 만들어진 20세기 지구의 슬픈 역사이며, 이런 상황은 세기가 바뀐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명작의 재구성

할리우드가 <철완 아톰>을 수입해 리메이크했다는 건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20세기에는 우월한 서구문화가 열등한 아시아를 향해 거의 일방적으로 전파됐다면 21세기 문화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를 쌍방향으로 오간다. 오랫동안 세계 문화시장을 지배하면서 신선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힘이 약해진 할리우드가 거꾸로 아시아 문화를 수입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런 강자의 포용하는 제스처를 통해 큰 힘을 안들이고도 일본과 한국의 기존 아톰 팬들을 공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떠난 콘텐츠가 지니는 호소력과 감동은 팥소 빠진 찐빵처럼 심심해질 수밖에 없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