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폭풍의 언덕>과 <본격소설>

‘위대한 소설’이란 무엇인가

"근대에 들어서서 서양 문명의 지배가 온 세계에 확대되고, 서양소설이 잇따라 일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이래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의 많은 소설가는 서양소설에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자기 언어로 써 보고 싶다는 모든 예술의 근원에 깃든 모방의 욕망에 사로잡혀 일본 근대문학을 꽃피워 갔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시도는 일본 근대문학의 큰 흐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큰 흐름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캐서린으로 출연한 영화 <폭풍의 언덕>(1992·위)과 로렌스 올리비에가 히드클리프 역을 맡은 영화 <폭풍의 언덕>(1939·아래)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

일본 소설가 미즈무라 미나에는 자신의 장편 <본격소설>(2002년작)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서양소설을 일본어로 다시 쓰기’는 비단 일본 근대문학의 관습일 뿐만 아니라 미즈무라에게 현실로 일어난 문제였다. 미즈무라는 영국인들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애소설로 꼽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2위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3위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과 유사한 이야기를 다시 썼다. 그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건 가토 유스케란 문예지 편집자로부터 다로와 요코와 마사유키라는 세 사람의 치명적인 러브스토리를 들었고, 이것이 ‘한 편의 소설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소설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자란 소녀 시절부터 ‘이런 게 소설’이라는 소설관이 작가 안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를 쓴 언스트 곰브리치는 풍경화가 나온 뒤에야 사람들이 그림에서 봤던 풍경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그곳에 피크닉 바구니를 펼쳤다는 인지심리학적 관점을 소개했는데 이는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설적인 이야기는 소설이 나온 뒤에야 탄생한다.

서양소설을 일본어로 다시 쓰기
<본격소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본격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라는 첫 장에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서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미즈무라 미나에가 등장한다. 일본 카메라 회사의 뉴욕지사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어느날 이즈마 다로라는 운전사를 데려온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매력을 풍기는 다로는 영업쪽으로 업무를 바꿔 직장에서 승승장구한다.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본토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 듯하지만 미국 경쟁사로 스카웃되면서 더욱 성공한다. 일본 교포사회에서 다로는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다. 풍문에 따르면 그는 일본이 거품경제로 흥청망청하던 시절에 많은 투자자를 유치하고 벤처사업을 벌이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한편 미즈무라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두 권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가 된다. 미국 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스탠퍼드대에 머물던 그는 가토 유스케란 편집자를 만난다. 가토는 미국에 오기 직전에 일본의 고급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에서 후미코라는 가정부를 통해 사이구사 집안의 외손녀 요코와 시게미쓰 집안의 손자 마사유키, 요코 집안 인력거꾼의 손자뻘로 만주에서 중국 마적과 일본 여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인 다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잠시 다로와 대화를 나누던 가토는 다로가 미즈무라라는 소설가를 소녀 시절에 알았다는 말을 듣고 미즈무라에게 다로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첫 장에서 설명한 뒤 소설은 후미코의 1인칭 시점과 3인칭 전지적작가 시점을 오가면서 세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소설 <폭풍의 언덕>에 실린 삽화. 히드클리프의 야성과 고뇌를 표현했다.

작가는 <본격소설>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20세기 일본소설의 규범이 된 서구의 ‘본격소설’은 무엇이고 서구 소설이 일본식으로 변형된 형태인 ‘사소설’이란 무엇인가 등 소설 장르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즈무라는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가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씀으로써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허구’라는 규정부터 깨뜨린다. 또 서양의 ‘본격소설’과 같은 소재를 같은 구조로 쓰면서도 근대소설의 특징인 전지전능한 화자 대신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넣어 소설 속에서 작가가 느끼는 일본 사소설의 특성을 보여 준다. 요컨대 문학사와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을 통해 서양소설과 일본소설은 결코 같아질 수 없음을 입증한다.

‘상상에서 나온 허구’ 규정 깨뜨려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폭풍의 언덕>과 <본격소설>을 겹쳐서 읽도록 만든다. 여름 휴가를 떠난 가토 유스케는 길을 잃고 한 별장에 들어선다. 거기에는 중년남자가 된 다로와 노년의 후미코, 빨간 잉어가 수놓인 유카타를 입은 소녀 요코의 혼령이 있다. 이튿날 가토는 후미코를 통해 사이구사 집안의 세 할머니 자매, 하루에, 나쓰에, 후유에를 만난다. 쇼와 시대부터 부유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은 가세가 기울었지만 여전히 가루이자와의 별장에서 호사의 흔적이 느껴지는 일상을 보낸다. 서양관이라고 불리는 별장, 최신 옷본을 갖춘 도쿄의 양장점, 직수입한 고급 식기세트, 식모와 인력거꾼, 집안의 대소사,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 가서 클래식과 건축을 전공한 손자손녀들…. 세 자매는 이런 환경에 둘러싸여 살았다. 시게미쓰 집안은 이런 점에서 사이구사 집안보다 한 수 위다.

패전 직후인 1950~1960년대의 나날들 속에서 요코와 다로는 아직 어린아이다. 나쓰에 할머니의 외손녀인 요코는 집안 분위기와 달리 외로우면서도 자유롭게 성장한다. 어느날 만주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다로가 요코 집안의 일꾼인 삼촌을 따라온다. 어린 시절부터 우정과 연민을 쌓아 온 요코와 다로는 운명적으로 얽히면서 두 몸 속의 한 영혼과 같은 솔 메이트가 되지만 결코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사랑의 정열과 그에 비례해 높아지는 현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다로가 훌쩍 미국으로 떠난 뒤 절망에 빠진 요코는 시게미쓰 집안의 귀공자인 마사유키와 결혼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다로가 돌아오면서 세 사람 사이의 정신적 동거가 계속된다. 그러다가 긴장을 견디지 못한 마사유키가 요코를 비난하자 요코는 집을 뛰쳐나가 추운 별장에서 수면제를 먹은 채 잠이 들고, 폐렴에 걸려 죽는다.

<본격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가 꽃피웠다가 스러져가는 데 따른 처연함이다. 서양을 향한 문호가 활짝 열리던 시절에 일본의 신흥자본가 계급은 신문물을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귀족 신분으로 올라선다. 19세기 서양소설이 일본에 들어와 본격소설이 된 것처럼 대화 중간에 몇몇 영어 단어를 섞어쓰면서 서양 부르주아의 일상을 모방하는 것이 ‘하이 칼라’의 표지가 되던 시대다. 영국에 유학한 마사유키의 어머니보다 더 영국적이던 세 자매는 안톤 체홉의 <체리 과수원>의 무대를 옮겨 놓은 듯한 젊은 날의 ‘다이와 로맨티시즘’을 그리운 마음으로 회고한다. 식민지 콜로니얼 양식처럼 독특한 형태로 빚어진 일본 근대문화는 불평등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지만 소설 속의 세 자매는 물론 작가인 미즈무라에게도 아름다운 과거로 남아 있다. 어렸을 때 일본을 떠난 미즈무라에게는 다이와 로맨티시즘의 잔재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다.

<본격소설>에 나오는 가루이자와의 서양관.

에밀리 브론테가 가족과 함께 살던 요크셔의 목사관.

이런 점에서 <본격소설>의 배경인 가루이자와는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음울하고 황량한 히이드 벌판에 비해 훨씬 아름답다. 진본보다 더욱 진본 같은 부르주아의 일상은 섬세하고 세련되게 가꿔졌다. 또 마사유키는 <폭풍의 언덕>에서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질투하는 에드거와 비교할 때 훨씬 ‘젠틀맨’이다. 예일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교수인 그는 다로와 요코의 관계를 인정하고 묵인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이 요코와 다로의 사랑을 안타깝게 지켜봐 온 후미코가 사실은 다로와 한때 격렬한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세 할머니 가운데 막내이면서 평생 독신인 후유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점도 특별하다. 정교한 레이스처럼 짜인 <본격소설>은 ‘터프’한 <폭풍의 언덕>에 비해 훨씬 성숙한 여성들의 세계에 근접했다.

<폭풍의 언덕>은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저택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의 주인 히드클리프를 만나러 온 세입자 로크우드가 언쇼가의 딸 캐서린과 린턴가의 아들 에드거, 캐서린의 아버지가 데려온 거지 소년 히드클리프의 사연을 가정부 넬리로부터 듣는다는 플롯이다. 원작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나오는 히드클리프는 매우 집요하고 잔인하다. 또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 캐서린(엄마와 동명), 히드클리프와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 헤어턴 사이의 사랑과 화해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작가가 직접 작품 속으로 들어간 <본격소설>에서는 가토가 가루이자와를 방문한 때로부터 3년 뒤 시점에 작품이 마무리된다. 미국 체류를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미즈무라는 소설의 배경인 가루이자와에 가 보지만 세 할머니 자매가 어쩔 수 없이 팔아 넘긴 별장은 흔적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첫 장에서 작가가 공언한 대로 실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통째로 작가의 창작인가.

소설이 문화의 중심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문학은 콘텐츠의 일종이 됐다. 작가 미즈무라에 따르면 “본격소설 개념은 일본 근대문학의 역사 속으로 매장돼 도서관 구석에서 조용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야흐로 다양한 소설 형식이 동등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나란히 늘어서 있고, 본격소설 같은 개념은 규범성을 지니지 않는다”. 어쩌면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정신의 집을 짓던 ‘문학소녀’라는 것도 20세기의 화석일지 모른다. 사춘기의 미즈무라는 “순간적인 감상의 부추김에 이끌려 아즈마 다로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옛날 소설을 읽으며 자랐기 때문에 석기시대 같은 꿈을 이상형으로 그리고 있었던 건지, 보통 소녀였기 때문에 남자가 나보다 교양이 풍부하길 원했던 것인지 어쨌든 내 사랑의 상대가 내가 읽지도 못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대전제였다”고 고백한다.

진본보다 더 진본 같은 부르주아 일상
위대한 여성작가의 전형인 에밀리 브론테(1818~1848)는 ‘문학소녀’로서 짧은 생을 마쳤다. 성공회 사제인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의 부임지인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제인 에어>의 작가인 언니 샬럿 브론테와 함께 자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소일했다. 그리고 자신이 늘 산책하던 요크셔 벌판의 한 폐가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이란 단 한 편의 소설을 남겼다.

악마적이며 거친 매력의 소유자인 히드클리프는 1939년에 만들어진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체현했다. 미국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년작)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백만장자가 돼 돌아온 개츠비의 역할 모델도 히드클리프다. 이런 남자가 천연기념물이 되는 것처럼 소설가의 고유한 아우라 역시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소설가가 수많은 소설을 쏟아내는 시대의 작가 노릇은 단 한 권의 책으로 세계문학사에서 추앙받는 인물이 된 에밀리 브론테의 시대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이 힘들다.

명작의 재구성

미즈무라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음악가나 무용가, 화가가 되려면 천부적인 재능과 오랜 시간의 혹독한 단련 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에 비해 소설가가 되는 것은 정말 간단하다. 누구나 문장을 쓸 수 있고, 누구나 하룻밤 사이에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조용한 하늘의 소리가 귓가에 울리면서 ‘너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섭리다’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