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서편제’와 ‘밀양’

용서를 말하는 두 가지 방법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 행복할 수 있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천년의 빛’과 ‘서편제’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서편제> (위),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밀양>의 한 장면.

달라이 라마는 <용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그의 가르침은 티베트 민족이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하다.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중국에 대해 끝없는 증오와 복수심을 가졌다면 그들은 아예 멸족했거나 더 큰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돈다. 사랑과 평화의 논리를 따름으로써 티베트는 불행과 공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영적 고향이 됐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자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자비로운 심성과 더불어 오랜 성찰과 명상, 인간관계의 문제와 사물의 실상에 대한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아주 특별한 용서의 방식, 한(恨)
작가 이청준(1939~2008)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서편제>(감독 임권택·1993년)와 <밀양>(감독 이창동·2007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편제>를 지배하는 정서는 한(恨)이다. 판소리는 남도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한에서 태어난 예술이고, 한을 지님으로써 제대로 된 소리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렇다면 한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맞대응하는 대신 안으로 곰삭이는, 아주 특별한 용서의 방식이다.

<서편제>가 한국영화사에서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이청준과 임권택이란 두 예술가의 행복한 만남 때문이다. 이청준의 연작 단편 ‘천년의 빛’과 ‘서편제’(나머지 한 편인 ‘선학동 나그네’는 영화 <천년학>의 원작이 된다)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판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꾼들의 고달픈 삶을 유감 없이 담아냈다. 그러면서 남도 특유의 정서와 세속을 넘어선 삶의 비의 같은, 이청준 문학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옮겨 놓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근대화 바람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이다. 동호(김규철 분)는 전라도 보성의 소랫재 주막에서 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부잣집 잔치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 분)은 그곳에서 동호의 어머니 금산댁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수양딸 송화(오정혜 분)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기와 함께 죽고 만다. 유봉은 소리품을 파는 틈틈이 송화에게는 소리, 동호에게는 북을 각각 가르친다.

그러나 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중 동호는 어머니가 유봉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과 유봉의 강압적인 교육방식,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가출한다. 유봉은 남은 송화마저 그 뒤를 따라갈 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한 나머지 비소를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 가는 송화를 정성껏 돌보지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둔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 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난다. 북채를 잡은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버지와 똑같은 북장단 솜씨로 그가 동호임을 안다. 그러나 오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헤어진다.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딸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 놓기 위해,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페미니스트 논객들 사이에 적잖은 논란을 낳았다. 자신이 못다 이룬 예술에의 집착 때문에 딸의 몸을 유린한 아버지의 잔인성은 여성의 육체를 볼모로 삼아서 민족주의적 감정을 고조시키는 감독의 가부장적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또 유봉이 눈 먼 송화의 머리를 빗겨 주고 비녀를 꽂아 주는 장면을 상기시키면서 근친상간 관계라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제자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 그 계통의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학적으로 포장되는 건 분명 불편한 일이다.

피해자의 용서 앞서 회개한 가해자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자 평화와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다.

그러나 용서란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송화는 아버지가 일부러 자신의 눈을 멀게 했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을지 모른다. 또 아버지의 고백을 들은 뒤에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면서 소리를 저버릴 수도 있다. 그녀가 담담한 마음으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끊어낼 정도의 절창을 뽑아내는 경지에 이른 것은 단지 눈먼 그녀가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일까. 소리꾼으로서 송화가 이른 자기완성의 경지는 동호의 한마저 녹여 낸다. 오누이가 북을 치고 소리하는 장면의 카타르시스는 분노, 절망, 소멸과 같은 단어들과는 상반되는 자리에 놓여 있다. 송화에게 예술은 용서에 이르는 사다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밀양>에서는 유괴범과 아이를 잃은 엄마 사이에 하느님이 개입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던 피해자가 어렵사리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하지만 가해자는 이미 회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뒤였다. 그렇다면 용서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이 영화는 묻는다.

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이 죽은 뒤 어린 아들 준과 함께 남편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김종찬(송강호 분)을 알게 된다. 신애는 종찬의 도움으로 집을 얻고 피아노 학원을 차린다. 신애는 상처가 많은 인물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고, 음악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배신 당한 경험이 있고, 끝내 혼자 남았다. 그녀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이웃에게 “땅을 보러 다닌다”며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며칠 뒤 주검으로 돌아온다. 범인을 잡고 보니 신애의 돈을 노린 태권도 학원장이다.

괴로워하던 신애는 이웃의 도움으로 기독교에 귀의하고, 많은 망설임 끝에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간다. 그런데 범인은 이미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믿으면서 평안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한다. 그런 범인의 모습은 신애에게 극심한 혼란을 준다. 교회와 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광적 행동을 일삼던 신애는 정신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퇴원한 뒤 종찬의 도움을 받으며 옛집으로 돌아가 마당 한 구석의 햇빛 한 줌을 발견한다. 비밀스러운 햇빛, 즉 밀양(密陽)이다.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는 아들을 잃은 엄마가 죄인의 얼굴에서 평화와 구원을 발견하고 절망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돼 있다. 마땅히 고통 받아야 할 사람이 평화를 얻었다면 세상의 정의는 사라진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그런 권한을 하나님이 가로챘다. 이 대목에서 사회적 정의는 종교적 정의로 차원을 달리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용서는 신애가 그늘진 앞마당에서 한 줌의 햇빛을 발견함으로써,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살아감으로써 이르게 되는 경지다. 즉 범인과의 관계를 떠날 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해진다.

두 영화가 나온 시기는 14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원작 소설은 비슷한 기간에 쓰였다. 이청준은 유신 말기에 모든 비판적 발언이 막혀 있는 정치 상황을 경험하면서 아무리 억압해도 무너지지 않는 존엄성 같은 게 있다는 생각으로 ‘서편제’를 썼다. 스스로도 정서가 너무 메말라 정(情)의 씨앗자루를 남기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또 광주항쟁 직후에 나온 ‘벌레이야기’는 피해자는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이야기하는 상황을 보고 피해자의 절망감을 그린 작품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현실을 곧바로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다.

원작자가 경험한 시대적 상황 담아

영화 <밀양>의 시사회에 나왔던 작가 이청준.

생전의 작가 이청준은 삶을 캄캄한 밤에 산길을 더듬어 가는 것에 비유하곤 했다. 그런 인생의 도정에서 문학은 ‘방금 누가 지나갔으니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 거짓말이란다. 그가 평생을 바친 ‘소설이란 거짓말’은 그 말의 가치를 믿음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안고 남은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위무, 인생의 부끄러운 상처와 아픔을 풀어내는 씻김질이었다.

세계에 대한 비극적 상황 인식, 실패자에 대한 공감은 그의 가족사와 분리되지 않는다. 좌익 활동을 한 아버지는 작가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장남인 형님도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은 이청준은 자연스레 어머니와 가족, 일가 친척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오히려 모두가 바라던 법대가 아닌 문리대를 택하고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평생 전업작가로 살면서 30여 권에 이르는 전집을 남겼다.

명작의 재구성

그런 그가 자기 삶의 원형이자 스스로 가장 특별하게 여긴 작품이 단편 ‘눈길’이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고향집에서 대처로 공부하러 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지막 잠을 재우고 이튿날 새벽에 떠나보낸 뒤 눈 위에 찍힌 자식의 발자국을 되밟아 돌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 세상 정처없는 것들의 가엾음을 드러낸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에서 태어난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이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