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신경숙의 ‘부석사’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산사의 전설, 상상력의 날개 달아 주다

꽃샘 추위가 지나간 나뭇가지에 새순이 파릇파릇 솟아나기 시작한다. 봄기운을 느끼기 위해 동네 뒷산이라도 오르고 싶은 계절이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산에는 어디에나 절이 있고, 절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또한 빠지지 않는다. 도통한 스님이 산을 오르다가 지팡이를 꽂았다는 일상적인 전설에서 시작해 무서운 용이 동해를 배경으로 번쩍번쩍 날아다니며 전투를 벌이는 동아시아 규모의 전설까지 가지각색이다. 근대 이전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공공 영역이었던 절집에서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무수한 사연이 오갔을 테고, 그 정수가 절에 남아 있는 전설이다.

춘천 청평사의 전설을 형상화한 구조물(위쪽)과 영주 부석사의 선묘 초상. | 춘천시·여행작가 유성문

시공을 초월한 삶의 원형인 전설은 후대의 작가들에게 다채로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전설에 끼어들게 마련인 비현실적 판타지와 풍부한 상징이 새로운 이야기로 태어나는 데 안성맞춤이다. 그 가운데 절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변주한 작품이 신경숙의 단편소설 <부석사>(2001)와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이다.

<부석사>는 200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자 작가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꼽는 작품이다. 소설 속의 ‘그녀’와 ‘그’는 1월 1일 부석사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이웃사촌이고, 각자 실연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1월 1일에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일방적인 방문 약속이 잡혀 있으며, 상처받은 경험 때문에 공격 성향이 강한 한 마리의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모른 채 연결돼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의상대사를 사랑한 한 여인의 전설
반듯한 대칭구조로 이뤄진 이 소설에 왜 ‘부석사’란 제목이 붙었을까.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되고 아름다운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의 뒤편 바위에 맷돌처럼 놓여 있는 ‘부석(浮石)’의 전설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661년(문무왕 1년) 불교 공부를 위해 당나라를 향한 의상은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해 한 신자의 집에 머물게 됐다. 그런데 그 신자의 딸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해 결혼을 청한다. 의상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선묘의 불심을 일깨운다. 선묘는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을 돕겠다”는 원을 세웠고, 의상은 종남산에 있는 지엄을 찾아가 화엄학을 공부했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 준 편의에 대해 감사를 표한 뒤 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을 위해 준비한 법복과 집기를 전하기 위해 급히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났다. 그러자 선묘는 떠나는 배를 향해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는 용이 됐다.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 화엄을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 무리 500명이 살고 있었다. 이때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서 도둑들을 물리치고 절을 창건하게 했다.

영주 부석사 전경.

부석사의 뜬 돌은 지금도 실과 바늘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떠 있다고 하여 많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눈을 부릅뜨도록 만든다. 중력의 법칙을 이겨낸 뜬 돌의 존재는 의상대사와 선묘가 지닌 신통력의 상징이면서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선묘는 의상을 사랑했지만 그에게 닿지 못한다. 불제자가 되어 그의 길을 좇았고, 용이 되어 바다를 건넜으며, 끝내는 그가 세운 사찰의 돌로 남았다. 그러나 의상이 선묘의 구애를 받아들였다고 한들 그 사랑은 얼마나 영원할 수 있었을까.

소설 <부석사>의 남녀에게 사랑은 불가해한 것,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의 남자 친구 P는 다정다감한 연인이었다. 신호등을 건널 때는 한쪽 팔로 도로를 가로막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벌써 약국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명시적인 약속은 없었지만 그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P는 한마디 통보도 없이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 그러고서도 자신을 잡지 않은 그녀를 책망하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퍼트린다. 더욱이 유부남인 P는 그녀의 생일에 꽃바구니를 보내고 1월 1일 집에 찾아온다고까지 했다.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의 여자 친구 K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군대에 간 그는 K를 잊지 못했지만 K는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않는다. 갑자기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통보를 받은 그가 휴가를 나와 장례식을 치른 뒤 K의 집을 찾아갔을 때 K는 그와 함께했던 연애의 습관을 다른 남자를 상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똑같은 집 앞 치킨집에서 밤 12시를 넘겨가면서 미적거리고,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든 뒤 길쪽으로 접한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입맞춤을 나눈다. 부석사를 향하는 그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있다. 다큐멘터리 PD인 그는 다친 수리부엉이가 치료를 받고 야생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찍었지만 그것이 조작이라는 모함을 한 당사자는 가장 가까운 동료 박 PD다.

그녀의 남자 친구 P와 그의 여자 친구 K 및 박 PD는 진짜 존재하는 인물일 수도 있지만 각박한 현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갖는 한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턱없이 믿었다가 배신 당한 경험, 진심을 내놓지 않는 연인에 대한 오해와 미움은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뜬 돌의 틈처럼 나와 타자 사이에는 절대적인 심연이 놓여 있다.

이들은 부석사로 가지만 부석사에 도착하지 못한다. 북한산 산책길에 함께 채소 서리를 하다가 알게 된 두 사람은 다소 충동적인 부석사행을 통해 서로를 조금씩 알아 간다. 사이좋게 도시락을 나눠 먹고, 여자가 산책길에서 주워 온 개가 실은 남자가 버린 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승용차가 지방도로 접어드는 순간 부석사는 멀어지고 난데 없이 눈 속 낭떠러지에 도달한다. 사람 사이가 그렇듯이 이들의 부석사행과 부석사 사이에도 미묘한 틈이 있다.

영화 <생활의 발견>은 실패한 영화배우 경수(김상경 분)가 겪는 해프닝을 그린 로드 무비다. 연극에서 영화로 전환을 모색 중인 그는 처음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다음 영화의 캐스팅마저 좌절되자 이런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경수는 선배 소설가 성우가 살고 있는 춘천에 갔다가 무용가인 명숙(예지원 분)을 만난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녀를 떨쳐 낸 뒤 고향 부산으로 향하다가 이번에는 열차 안에서 선영(추상미 분)을 만난다. 경수는 유부녀인 선영에게 반해 그녀를 따라 경주에서 내리고, 계속 구애를 하지만 거듭 낭패만 보게 된다.

청평사 전설을 차용한 영화 <생활의 발견>

홍상수의 영화는 동시대의 일상을 세심하면서 낯설게 보여 줌으로써 특별한 사건이 없이도 관객들에게 정서적 충격을 던져 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은 우리 모두가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일기장에조차 적기 어려운 속물성에 젖어 있다. 째째하고 구차스럽고 모순적이고 부끄러운,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소시민적 모습이 홍상수의 캐릭터가 지닌 흡인력의 비결이다.

경수 역시 이런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찌질’하다. 영화가 참패했는데도 영화사에 찾아가 200만원의 개런티를 받아 낸다. “나 당연히 받을 거 받는 거야”라고 항변하는 그에게 선배인 영화감독은 “사람 되는 거 참 힘들어. 하지만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는 유명한 대사를 던진다. 이후 영화는 경수가 어떻게 처절하게 망가지는지를 보여 준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춘천에 간 경수는 선배인 성우가 명숙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명숙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명숙은 경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고, 이튿날 명숙이 성우와 여관에 투숙한 걸 알게 된 경수는 욕지기를 하면서 비를 맞는다. 명숙의 사랑을 받던 처지에서 자신이 선영의 사랑을 구하는 처지로 뒤바뀐 경수는 더욱 전락해 간다.

기차에서 경수의 옆자리에 앉은 선영은 그의 연극팬이라며 반가워하지만, 친정인 경주에서 경수의 구애를 받는 그녀의 태도는 모호하기만 하다. 선영을 유혹하기 위해 경주에 여장을 푼 경수가 이튿날 집으로 찾아가자 선영은 쌀쌀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가 경수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이 중학생일 때 경수가 깡패로부터 구해 준 일을 털어놓는다. 선영은 경수와 동침하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다시 선영의 친정집 문 앞에서 서성이던 그는 선영의 남편인 운동권 출신 대학교수와 딱 마주친다. 그는 경수가 춘천의 소양호에서 어떤 여자와 오리배를 탈 때 라이터를 빌린 사람이다.

영화 바탕에는 청평사 회전문 전설
경수는 또다시 선영을 찾아가고,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영에게 점집에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점집에서 경수의 망신은 극에 달한다. 점쟁이는 선영의 남편에 대해 “높은 자리에 앉아 대중이 우러르는 사람”이라고 하고, 경수에 대해서는 “인덕도, 인연도 없으며 산천을 벗 삼아 산으로 산으로 떠도는 팔자”라고 한다. 이 말에 신이 난 선영은 다시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한 채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경수는 비를 맞으면서 처량하게 돌아선다.

<생활의 발견>은 경수라는 평범한 남자의 분투기다. 그는 직업에서도, 사랑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호텔밥 치고는 괜찮네”하는 거드름을 피우고, 예술가 티를 낸다. 술집에서 다투는 커플의 여자 다리를 흘깃거리는 그에게 남자가 시비를 걸자 그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 좋다면서 딴청을 부린다. “괴물이 되지는 말자”는 선배의 말과 달리 경수는 점점 비겁하고 비루한 괴물이 돼 간다. 그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불가사의한 전락에 대해 점쟁이의 점괘는 명쾌한 답변을 준다.

이 영화의 바탕에는 청평사의 전설이 있다. 춘천에 간 이튿날 아침에 경수는 선배 성우와 함께 소양호의 통통배를 타고 청평사를 향한다. 도중에 성우가 거북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청평사행은 중단되지만 이때 성우는 경수에게 청평사 회전문(回轉門)의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당 태종에게 평양공주란 딸이 있었다. 그런데 한 평민이 공주를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렸다. 임금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그를 사형에 처한다. 그러자 이 남자는 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몸을 친친 감는다. 너무 답답한 공주에게 한 도사가 조선의 청평사로 가 보라고 권한다. 청평사로 간 공주는 음식을 구해 오겠다며 회전문 안으로 들어간 뒤 나타나지 않는다. 공주를 찾으러 회전문 안으로 들어간 뱀은 공주를 만나지 못한 채 폭풍과 번개를 만나서 다시 뛰쳐나온다.

명작의 재구성

회전문의 전설은 <생활의 발견>의 구조를 형성한다. 경수는 공주를 쫓는 뱀이며, 선영은 그를 피해 달아나는 공주다. 공주를 사랑하면서 남자가 뱀이 됐듯이 경수는 점점 괴물이 돼 간다. 그가 비를 맞으면서 선영의 집 앞을 떠나는 라스트 신은 회전문에서 폭풍을 만난 뱀의 딱한 몰골이다. 삶은 반복이다.

<부석사>에서 ‘그’의 옛애인 K가 사랑의 행위를 반복하듯이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중학생 때 선영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일을 자신도 모른 채 어른이 돼 반복한다. 그리고 전설은 현대의 소설과 영화에서 반복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