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스님과 소년의 ‘아름다운 인연’

<오세암>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얼마 전에 열반한 법정 스님이 “내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은 이미 1971년에 ‘미리 쓰는 유서’란 글에서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요!’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스님의 제자들이 찾아낸 그 소년은 1970~1973년 스님이 서울 봉은사에 머물 당시 공양주 보살의 아들로 종무소에 배달된 신문을 스님의 처소까지 가져다 드리고 어깨도 주무르면서 스님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스님이지만 그 소년이 자식과 비슷한 존재로 가슴에 남아 있었던 듯하다.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원작 동화의 의미와 한국인의 정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수작으로 꼽힌다.

스님과 소년의 이야기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 나온다. 금욕과 수도생활을 하는 종교인에게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스님 따라 절로 들어간 어린 남매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마음을 지닌 아이들은 종교인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인의 처소는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기에는 너무 심심하고 부족한 게 많은 곳인지도 모른다. 순백의 영혼은 천상의 부름을 받거나 타락한다. 이야기의 끝은 늘 애틋하고 가슴 저린다.

동화작가 정채봉이 1985년에 발표한 작품 <오세암>은 다섯 살에 성불한 꼬마의 이야기다. 작가는 설악산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오세암에 얽힌 전설을 듣고 이를 동화로 고쳐 썼다.

스님은 눈발이 날리는 포구에서 거지 남매를 만났다. 대여섯 살 된 길손이는 앞이 안 보이는 누나 감이가 “누구니?”하고 묻자 “스님이야. 머리에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는 사람이야”라고 대답한다. 이들이 얼어죽을까 봐 걱정이 된 스님은 부모 잃은 조카들이라고 하기로 하고 절로 데려간다. 감이는 부엌일을 거들면서 그럭저럭 밥값을 하는 반면에 길손이는 선방으로 날짐승을 몰아오고 법회 때 방귀를 뀌는 등 장난이 심해 젊은 스님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자 스님은 마등령 중턱의 관음암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길손이에게 함께 가자고 한다. 스님으로부터 공부를 하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길손은 “바람도 보고 하늘 뒤란도 보고 싶다”면서 따라나선다.

애니메이션 <오세암>

암자에 도착한 길손은 심심한 나머지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문둥병 걸린 스님이 머물렀다는 방문을 연다. 거기에는 머리에 관을 쓰고 연꽃잎 위에 선 관세음보살의 그림이 걸려 있다. 엄마를 가지는 게 소원인 길손은 관세음보살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음식을 바치고 재롱도 떤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장터에 가면서 길손에게 “무섭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관세음보살님을 찾으라”고 말한다. 돌아오던 길에 폭설을 만난 스님은 조난을 당하고, 50일이나 지나서야 감이와 함께 암자에 도착한다. 길손이 죽은 줄 알았던 스님은 법당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길손이와 마주친다. 놀란 스님에게 길손은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 주셨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뒷산 관음봉에서 내려온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은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되었다”고 말한 뒤 파랑새가 되어 날아간다. 그리고 길손은 엄마 품에 안긴 듯 편안한 얼굴로 죽어 있다.

이 이야기는 2003년에 애니메이션 <오세암>(감독 성백엽)으로 다시 태어났다. 원작의 정서를 십분 살린 이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안타깝게도 흥행에 실패해 충성도 높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영화에서는 길손이 감이에게 바다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하늘같이 생긴 물인데 보리밭같이 움직여”라고 하는 말처럼 원작에 없는 주옥 같은 대사들이 돋보인다. 또 남매가 화재로 엄마를 잃게 된 사연과 생전의 엄마가 감이에게 댕기를 매 주던 추억 등 과거를 몽타주로 처리하고, 설악산 일대를 실사해 소박하면서 완성도 높은 장면을 선보였다. 길손이가 감자를 나눠준 부인에게서 엄마의 포근함을 느끼는 에피소드, 남매가 절에서 살면서 동네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에피소드 등을 추가해 고아 남매의 슬픔과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강조했다.

<오세암>은 1643년(인조 21년) 설정 스님이 관음암이란 암자를 중건해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전해진 관음영험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마르셀리노의 기적은 오세암의 전설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스페인 영화가 <빵과 포도주의 마르셀리노>(감독 라디슬라오 바흐다·1954년)다. 주인공 마르셀리노 역을 맡은 아역배우 파블리토 칼보는 1955년 칸영화제 특별아역상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 수도원 전설에 비슷한 이야기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성 마르셀리노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려 사람들이 산꼭대기의 수도원으로 향한다. 몸이 아파 집에 남은 소녀는 기도를 해 주러 온 신부로부터 수년 전 수도원에 살던 마르셀리노에게 일어난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오세암>과 비슷한 내용의 스페인 영화 <빵과 포도주의 마르셀리노>에서 마르셀리노가 십자가의 예수 곁에서 숨을 거둔 장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마을에 3명의 수사가 와서 폐허가 된 성을 고쳐 수도원을 세운다. 이들의 노력으로 수도원은 커지고 수사도 12명으로 늘어난다. 어느날 수도원 앞에 갓난아이가 버려진다. 수사들은 아이의 부모를 찾아 보고 마을에서 맡아 키울 집도 물색하지만 형편이 닿지 않자 성인 마르셀리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직접 키우게 된다.

마르셀리노는 6살 때까지 바깥세상과 격리된 채 수도원 안에서 수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다. 그러다가 들녘에서 예쁜 아줌마를 만나고 그녀에게 마누엘이란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날 이후 마르셀리노의 마음속에는 엄마라는 존재가 생기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차차 외로움으로 변한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축제에 간 마르셀리노의 장난으로 축제가 난장판이 되자 수도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관리는 폐쇄를 요구하고, 수사들이 이 문제로 걱정과 슬픔에 잠기자 마르셀리노는 더욱 외로워진다.

그는 수사들이 절대 가지 말라던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손에 못이 박힌 채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만난다. 늘 평온한 모습의 예수만 보던 마르셀리노는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곧 예수가 배가 고파 보인다고 생각한다. 꼬마는 수사들 몰래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가 예수께 드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친구가 된다. 이런 그를 기특하게 여긴 예수는 ‘빵과 포도주의 마르셀리노’란 이름으로 축복을 내린다. 그러나 엄마를 향한 마르셀리노의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한편 마르셀리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수사들은 다락방으로 가는 아이의 뒤를 밟았다가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한다.
예수: 마르셀리노야, 가까이 오렴. 네가 착한 일을 했으니 선물을 주고 싶구나.
마르셀리노: 엄마가 보고 싶어요. 예수님의 엄마도요.
예수: 그러려면 깊은 잠을 자야 한단다.
마르셀리노: 지금은 잠이 안 와요.
예수: 내 품에 안기면 잠들 수 있단다.
마르셀리노: 좋아요.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는 마르셀리노를 안아 주고, 강렬한 빛이 비친 뒤 십자가에 예수의 형상이 다시 나타나면서 마르셀리노는 깨어나지 못하는 깊은 잠에 빠진 채 십자가 옆의 의자에 앉아 있다. 예수는 아이를 너무 사랑해 일찌감치 천국으로 데려간 것이다. <오세암>과 마찬가지로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손등에 못자국이 선명한 예수가 손을 내밀어 마르셀리노가 건네는 빵을 받는 장면이나 아이를 안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장면은 압권이다.

사계절의 순환에 맞춰 한 동자승의 성장을 다룬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개구리의 몸에 돌을 묶는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죄의 세계에 빠진다.

소년과 스님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로는 김기덕 감독이 만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년)이 있다. 경북 청송의 주산지에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암자를 세워 놓고 촬영한 이 작품은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의 주제를 풀어낸다.

스님과 둘이 사는 아이는 늘 심심하다. 절 바깥으로 나가는 스님을 따라서 나물을 캐러 간 아이는 물고기와 뱀과 개구리의 허리에 돌을 매달아 놓는다. 아이의 장난을 지켜본 스님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 중 어느 하나라도 죽었으면은 너는 평생 동안 그 돌을 마음에 지니고 살 것이다”라고 꾸짖는다. 아이는 부리나케 달려가지만 이들은 이미 죽었다.

업을 짓기 시작한 아이는 소년이 되고, 그의 앞에 소녀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이름 모를 병을 앓는 소녀를 스님에게 맡기고 돌아간다. 소년과 소녀는 사랑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소녀를 쫓아내고, 소년은 소녀를 찾아 떠난다. 도시에서 간음한 아내를 죽인 청년은 절로 도피한다. 추적해 온 형사들에게 체포되기 전에 그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 반야심경을 새기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윤회의 흐름 속에 서로를 비추는 거울
추운 겨울, 형기를 마친 남자가 다시 암자로 돌아온다. 그는 노승의 시신을 거두어 다비장을 치르고 불당을 정리한다. 젊은 날의 죄를 씻어 내려는 듯 용맹정진은 끝이 없다. 어느날 밤에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아이를 버리러 온다. 밤새 흐느끼다가 새벽에 길을 나서던 여자는 얼음이 꺼지면서 물에 빠져 죽는다. 어김없이 돌아온 봄날, 아이는 이제 암자의 주인이 된 스님이 어린 시절에 한 것과 똑같이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허리에 돌을 매다는 장난을 친다.

명작의 재구성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수출영화 가운데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인 이 영화에서 아이와 스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스님은 아이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며, 아이의 미래는 스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들은 윤회의 흐름 속에서 각자 한 고리를 차지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악업을 질타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