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고단한 주인공들’

베이비 붐 세대의 영화 -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 <포레스트 검프> <와이키키 브라더스>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는 전쟁의 폐허가 수습된 1955년부터 산아제한정책이 발표되기 전인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약 816만명에 이르는 이들의 퇴직이 가까워지면서 베이비 붐 세대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58년 개띠’는 베이비 부머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숫자로 따지면 1959년생 82만명에 비해 2만명이나 적지만 이들이 지니는 상징성은 만만치 않다. 처음 ‘뺑뺑이’로 고교 입시를 치렀고, 유신독재 말기에 대학시절을 보냈으며, ‘넥타이 부대’의 주역으로 민주화를 이끌었다. 마흔에 접어들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혹독함을 겪은 이들은 부모 부양과 자식 교육의 틈바구니에서 노후를 맞게 됐다.

일본 단카이 세대의 향수를 자극한 영화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에서 히로미, 준노스케, 류노스케가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는 장면.

일본 단카이세대의 향수 자극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베이비 부머는 현대사의 굴곡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으며 시대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대개 전쟁 직후에 태어난 이들은 급속한 경제 성장이 가져 올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그 결실을 맛본다. 빈곤한 부모세대와 단절해 대량소비와 대중문화 및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로서 이들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진보주의를 체득한다. 한편으로는 심한 경쟁 상태에서 살아감으로써 입시·취업·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겪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지나간 시절을 회고할 때 베이비 부머의 관점은 유독 빛난다.

일본영화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2006년)은 1차 베이비 부머인 단카이(團塊) 세대의 향수를 자극해 크게 성공을 거둔 영화다.

1947~1949년생인 단카이 세대는 일본의 산업화를 이끈 역군들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란 신화를 창조한 이들은 이후 거품경제의 몰락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자식세대인 단카이 주니어로부터 ‘경제적 동물’이란 조소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은퇴 후에도 일을 놓지 않고 문화소비의 주체로 나서면서 세대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올웨이즈>는 단카이 세대의 유년기인 1958년의 도쿄 변두리인 유히 3번가를 배경으로 한다.

유히 3번가 사람들이 스즈키네 집에 새로 들여온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역도산의 레슬링을 지켜보는 장면.

허름한 자동차 수리점과 문방구가 마주 보는 좁은 골목. 수리점 ‘스즈키 자동차’의 사장 아들 스즈키 잇페이는 “테레비, 테레비”를 외치면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전파사에 주문한 텔레비전이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지만 주문이 밀려 언제 올지 모른다. 그 무렵 교복 차림의 시골소녀 호시노 무쓰코(호리키타 마키 분)는 기차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도쿄에 도착해 번쩍거리는 고층건물을 보고 자신이 취직할 ‘스즈키 자동차’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소년잡지에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삼류소설가 자가와 류노스케(요시오카 히데타카 분)는 문방구를 운영하면서 ‘순수문학가’로 등단할 날을 꿈꾸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실망감 속에 스즈키 자동차의 수리공이 된 무쓰코는 다혈질인 스즈키 노리부미(쓰쓰미 신이치 분) 사장과 다투면서도 열심히 일한다. 류노스케는 문예지에 응모한 소설이 또다시 낙선되자 동네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다. 댄서 생활을 접고 술집을 차린 이시자키 히로미(고유키 분)는 기생이던 옛날 친구 후루유키 가즈코의 사생아 아들 후루유키 준노스케를 맡아서 골머리를 앓던 중에 어리숙한 류노스케에게 아이를 슬쩍 맡긴다. 얼떨결에 생판 모르는 류노스케와 문방구에서 살게 된 준노스케는 그가 자신이 탐독하는 소년잡지의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고 흥분한다.

미국의 현대사, 우연과 착각의 연속
드디어 스즈키네 집에 텔레비전이 도착한 날, 동네 잔치가 벌어진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역도산이 레슬링 경기에서 가라테 촙을 날리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갑자기 접촉 불량으로 화면이 뚝 끊기고, 흥분한 류노스케가 채널 다이얼을 쑥 뽑아내자 난장판이 된다. 그 순간 상한 슈크림 케이크를 몰래 먹은 무쓰코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원작 만화 특유의 과장된 동작과 유머가 넘쳐 흐르는 이 동네는 당시 일본사회의 축소판이다. 악마라는 별명의 의사 다쿠마는 무쓰코를 방문한 뒤 히로미의 술집에 들렀다가 닭꼬치를 사들고 집에 가던 중 길가에 쓰러져서 아내와 딸과 함께 닭꼬치를 먹는 꿈을 꾼다. 그의 아내와 딸은 전쟁 때 방공호로 가다가 폭격을 맞고 죽은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만주 후하성 628부대에 있던 야마타씨를 찾는다”는 방송이 나오고, 담배가게 할머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새로 나온 콜라를 마신다.

미국 현대사를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 속에서 우연과 착각의 연속으로 재구성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

어느날 준노스케는 류노스케와 히로미가 엄마 가즈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잇페이와 함께 전차를 타고 엄마를 찾아간다. 그러나 엄마는 나오지 않는다. 돌아올 차비가 없는 아이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잇페이의 엄마가 “어려울 때 뜯어 보라”며 스웨터 팔꿈치에 꿰매 준 부적에서 돈을 찾아내 집으로 돌아온다. 준노스케를 친아들처럼 사랑하게 된 류노스케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문학적 재능을 보이는 아이에게 만년필을 선물한다. 그리고 히로미에게 무형의 반지를 주면서 청혼한다. 이튿날 히로미는 사라진다. 그녀는 아버지의 병 수발 때문에 빚을 많이 지고 팔려다니는 신세였다.

둘만 남은 준노스케와 류노스케. 설상가상으로 준노스케의 부자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를 찾아가려 하지만 실패한다. 스즈키 사장 부부로부터 설 귀향 기차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무쓰코는 자기가 도쿄로 떠나는 것을 반기던 매정한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스즈키 부인에게 매달 보낸 편지를 보고 뒤늦게나마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고향으로 가는 날, 무쓰코는 차창 밖으로 파리 에펠탑보다 33m 높은 333m짜리 도쿄 타워의 위용을 보게 된다.

도쿄 타워 건립 50주년을 앞둔 일본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 이 영화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설정으로 거품경제 몰락 이후 지쳐 있던 일본인, 특히 노년의 그늘에 접어든 단카이 세대를 그리운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어느덧 60대가 된 관객들은 준노스케와 잇페이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의 고통에도 아랑곳 없이 늘 신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던 골목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편 미국 베이비 부머를 대변하는 영화로는 <포레스트 검프>(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1994년)를 꼽을 수 있다. 어른이 된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 분)가 아들을 스쿨버스에 태워서 학교에 보낸 뒤 “인생은 초컬릿 상자와 같다. 초컬릿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명대사와 함께 들려 주는 과거의 이야기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큐 75에다 불편한 다리에 보조기구를 낀 어린 포레스트 검프는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된다. 트레일러에서 아버지와 둘이 사는 제니만이 그의 편이다. 검프의 특유한 몸짓은 자기집 하숙생이었던 무명의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영감을 주어 로큰롤 황제를 탄생시킨다. 아이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달리기의 일인자가 된 검프는 미식축구로 대학에 진학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역시 달리기 덕분에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출해 전쟁 영웅이 된다. 링컨기념관 앞에서 열린 반전시위에 연사로 초대된 그는 마이크가 꺼져 엉뚱한 연설이 탄로날 위기를 모면한 뒤 첫사랑인 제니(로빈 라이트 펜 분)를 만난다. 포크송 가수를 꿈꾸던 제니는 히피가 됐다.

검프의 행운은 계속 이어진다. 우연히 워터게이트 호텔의 맞은편 호텔에 묵는 바람에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한 조직원을 신고하고, 반복학습에 강한 덕분에 오랜 냉전을 종식하는 핑퐁외교의 첨병이 되어 중국에 원정경기를 다녀온다. 베트남전 당시의 상사와 새우잡이배를 사들여 돈을 번 뒤 과일회사로 알고 있던 애플사의 주식을 사서 큰 부자가 됐다가 모두 기부한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검프는 제니를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제니는 다시 떠난다. 제니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미국 전역을 3년 동안 달린 검프는 유명인사가 돼 제니와 재회한다. 시한부 인생인 제니는 검프에게 아들을 남기고 죽는다.　　

파란만장했던 미국 현대사를 포레스트 검프의 생애 속에서 우연과 착각의 연속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에는 베이비 부머의 삶의 궤적이 압축돼 있다. 20세기 후반의 사회 변혁을 주도한 미국의 베이비 부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에서 1964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다. 이들의 청춘기였던 1960년대는 인종차별 철폐와 여성권리 신장, 베트남전 반대, 로큰롤 음악과 마약, 텔레비전과 자동차의 보급, 자유연애와 이혼 등 격렬한 변화로 들끓었다. 그 결과 젊은 시절의 베이비 부머는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지만 1980년대 유례없이 풍요롭고 안정된 삶이 계속된 데다 9·11테러의 영향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수로 회귀한다.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베이비 붐이 시작된 1946년에 나란히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꿈과 이후의 현실이 갖는 괴리를 한 음악가의 인생유전에 담은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한국 베이비 부머의 삶은 어떤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영화계에서 매우 희귀한 여성감독인 1960년생 임순례는 자기 세대의 정서와 경험을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년)에 담았다. 유신독재 시절이던 1970년대, 정치 상황은 억압적이고 우울했지만 급속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대중문화가 발전하고 늘어난 대학생 계층을 중심으로 청년문화가 꽃을 피웠다. 고등학생 특유의 치기와 낭만을 발산하면서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을 부르던 철없는 밴드 마스터의 인생사는 꿈과 현실 사이의 영원한 괴리를 느끼게 한다.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하는 남성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아마 IMF로 인한) 불경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출장밴드로 전전한다. 팀의 리더인 성우(이얼 분)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번도 가지 않은 고향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에 일자리를 얻어 팀원들과 귀향한다. 수안보로 가던 도중에 색소폰 주자 현구(오광록 분)는 밤무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처자식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다.

청소년기의 꿈, 이후 현실과의 괴리
수안보에 도착한 성우는 고교시절 밴드를 하며 꿈을 나누던 친구들과 재회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친구들은 생활에 찌든 중년이 됐다. 약국을 하는 민수는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됐고, 시청 건축가에 근무하는 수철은 환경운동가가 된 인기와 시위가 있을 때마다 마찰을 겪으면서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 성우의 스승이던 음악학원장은 알코올 중독자가 돼 출장밴드로 연명한다. 성우의 첫사랑인 인희마저 남편과 사별하고 트럭 야채장사를 하면서 억척스레 살아간다.

명작의 재구성

한편 여자를 좋아하는 오르간 주자 정석(박원상 분)은 여전히 여자를 꼬드기면서 문제를 일으킨다. 강직한 드러머 강수(황정민 분)는 목욕탕의 때밀이 아가씨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재주가 없어 데이트 한 번 못하던 차에 정석이 때밀이 아가씨에게 접근한 사실을 알게 되자 큰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대마초에 손을 댄다. 결국 강수는 밴드를 떠나고, 성우는 급하게 음악학원장을 팀에 합류시킨다. 그럼에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손님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손님들이 열광하는 건 드럼을 배우고 싶어하는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류승범 분)가 애드리브와 함께 선보이는 현란한 몸짓이다. “우리들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 친구 수철은 성우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런 인생의 물음 앞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