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자립적 여성들의 진보한 삶

<댈러웨이 부인>과 <디 아워스>

소설과 영화가 가장 행복하게 결합한 사례로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1925년)과 영화 <디 아워스>(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2년)를 꼽을 수 있다. 무수한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나 둘 사이의 관계는 통상 ‘원작이 훌륭하냐’ ‘영화가 원작을 능가하냐’는 식으로 평행선을 긋는다. 이에 비해 <댈러웨이 부인>과 <디 아워스>는 유기적으로 맞물려 들어간다. <디 아워스>는 멋들어지지만 난해한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작품세계를 감동적이면서 쉽게 설파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왼쪽)와 영화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분한 니콜 키드먼.

공로는 우선 영화 <디 아워스>의 원작소설을 쓴 미국 작가 마이클 커닝햄에게 돌려야 한다. 커닝햄은 자신의 소설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소설을 재해석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댈러웨이 부인>과 자전적 소설 <세월>(The Years, 1937년)을 모티브로 한 커닝햄의 작품 <세월>(The Hours, 1999년)에는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있는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또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의 주부 로라 브라운,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1990년대 뉴욕의 출판 편집자이자 레즈비언 여성 클라리사 본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구성처럼 커닝햄의 <세월>은 이 세 여성의 특별한 하루를 교차시킨다. 소설을 매개로 이어진 세 여성은 각자 다른 시대와 삶을 살면서도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영혼의 동반자이자 동지적 관계를 이룬다.

커닝햄의 소설은 1941년 작가 버지니아의 자살로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느끼는 일상의 고통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다시 찾아온 정신분열증 앞에서 고뇌하던 버지니아는 어느 날 아침 남편 레너드에게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와 주머니에 무거운 돌을 넣은 채 서섹스의 우즈 강으로 걸어 들어간다. 버지니아의 죽음은 작품 전체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다. 작가는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는 생의 이면에 늘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하며, 그것이 ‘세월’이란 점을 말하기 위해 그녀의 죽음을 도입부에 놓는다.

다른 시대를 사는 세 여성의 하루
시계는 다시 1923년 한적한 시골인 리치먼드의 하루로 돌아간다. 두통에 시달리는 작가 버지니아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생각해 낸 상태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이 직접 꽃을 사 오겠다고 말했다.’ 신경쇠약으로 두 차례 자살까지 시도한 버지니아의 건강을 염려해 남편 레너드는 시골로 이사했다. 호가스 하우스로 불린 이곳에서 그는 소일 삼아 호가스 출판사를 차려 책을 인쇄하고 있다. 소설 구상에 몰두하는 버지니아는 레너드로부터 “다른 부부처럼 함께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자”는 핀잔을 듣는다. 하인들도 글쓰기에 빠져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안주인을 비아냥거린다. 버지니아의 소설 속에서 1923년 6월 런던에 사는 하원의원 댈러웨이의 부인 클라리사는 저녁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50대 초입에 들어선 그녀는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음에도 공허와 절망을 느낀다. 버지니아는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끝낸 뒤 자살하게 할까 말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오후가 되자 런던에 사는 언니 바네사가 세 아이를 데리고 버지니아를 방문한다. 버지니아는 아이들이 정원에서 발견한 죽은 새를 묻으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언니네 가족이 떠난 뒤 버지니아는 갑자기 옷을 입고 리치먼드역으로 달려간다. 아내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급히 뒤쫓아온 레너드에게 버지니아는 시골생활이 질식할 것 같다면서 런던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리친다. 레너드 역시 흥분하지만 런던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한 뒤 버지니아를 집으로 데려온다.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인 리턴 스트레이치(왼쪽), 비타 색빌웨스트(가운데)와 어울리는 버지니아 울프(오른쪽).

커닝햄의 소설에 나오는 버지니아의 삶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학자이자 문필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프린셉 덕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에게는 지적 장애인 딸, 줄리아에게는 2남1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2남2녀가 태어났다. 버지니아는 그 가운데 셋째였다. <국가인명사전>의 편집인이기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버지니아는 일찍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열세 살에 어머니, 스물 두 살에 아버지를 잃으면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및 환청 등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아버지의 사후 덕워스 후손과 스티븐 후손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맏언니 버네사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 버지니아 등과 함께 블룸즈버리로 이사한다. 이를 계기로 토비의 친구인 클라이브 벨,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레너드 울프 등이 모이면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집단인 블룸즈버리 그룹이 형성된다. 서른 살에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 버지니아는 첫 소설 <출항>(1915년)을 발표한다. 이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쓴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1927년), <세월> 등으로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가 된다. 그럼에도 평생 따라다닌 정신병은 작가를 자살로 몰고 간다.

커닝햄은 이 같은 버지니아 울프의 분신으로 로라 브라운과 클라리사 본이라는 두 사람의 미국 여성을 더 창조한다.

둘째를 임신한 로라는 남편 댄의 생일에 어린 아들 리처드(리치)와 함께 케이크를 만든다. 그러나 살림 솜씨가 없는 로라는 케이크 만들기에 실패한다. 그녀의 불안과 공허감은 아들에게 전염된다. 그때 이웃인 키티가 로라를 찾아와서 자궁의 병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됐다며 개를 부탁한다. 눈물 흘리는 키티를 위로하던 로라는 순간적으로 키스를 한다. 로라는 다시 케이크를 만든 뒤 리치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겨 놓고 차를 몰고 외출한다. 호텔에 혼자 투숙한 로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꺼내 읽으면서 ‘다른 세상에서라면 책을 읽으며 인생을 보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의 일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로라는 남편 댄의 생일파티를 치른다.

버지니아의 삶에 기초한 커닝햄 소설
한편 클라리사 본은 전 애인인 리처드로부터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 초입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장으로 꽃을 사러 나간다. 작가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식에 맞춰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리처드는 우울증에다 에이즈 환자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 리처드와 헤어진 클라리사는 동성 애인인 샐리와 15년째 함께 살면서 리처드를 보살피고 있다.

파티를 통보하러 간 클라리사에게 리처드는 심한 히스테리를 부린다. 아침부터 그와 한바탕 싸움을 치른 클라리사는 시상식 준비를 위해 오후에 다시 리처드의 아파트를 찾아가는데 리처드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리처드의 우울과 방황의 원인을 제공한 어머니 로라가 클라리사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다. 둘째를 낳은 뒤 아침식사를 차려 놓고 홀연히 사라진 로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사서로 살았다. 리처드를 사이에 둔 두 여성은 처음 만난다.

1999년 퓰리처상과 펜 포크너상을 받은 커닝햄의 소설은 영화 <디 아워스>로 더욱 유명해졌다. 니콜 키드먼(버지니아 울프), 줄리안 무어(로라), 메릴 스트립(클라리사 본)이라는 쟁쟁한 여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뛰어난 심리묘사로 세 여성의 삶에 육박한다. 또 원작소설에서 비중이 작았던 로라에 대해서도 동등한 몫을 할애한다. 영화 속 로라는 호텔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처럼 강물이 자신을 덮치는 악몽을 꾼다. 자살을 포기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둔 남편 댄은 흡족해 하며 자신이 로라와 결혼한 경위를 설명한다. 전쟁터에 나간 그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순간마다 우울해 보이던 고등학교 동창 로라를 떠올린다. 로라를 차지하는 게 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였다. 로라는 남편에게 억지 웃음을 짓지만 화장실에서 혼자 울음을 터트린다.

원작보다 섬세한 명배우의 심리연기
커닝햄 소설과 영화 <디 아워스>에서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죽일까 말까를 계속 고민한다. 나중에 완성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보면 댈러웨이 부인은 옛 구혼자로 인도에서 막 돌아온 피터 월시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고 약간 후회스런 감정으로 자신의 생을 돌아보기는 하지만 자살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인다. 오히려 자신의 파티에 사전 예고 없이 수상이 온 것을 놓고 자랑스러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국 부르주아 여성의 허세를 드러낸다. 대신 죽음은 댈러웨이 부인이 아침에 꽃을 사러 나갔을 때 마주친 젊은 남자인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의 몫이 된다. 전쟁에 나갔다가 이탈리아 여성 루크레치아와 결혼해 런던으로 돌아온 이 광인은 자신을 감금 치료하려는 폭력적인 의사의 손에서 놓여나고자 창문에서 몸을 던진다. 평온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한 꺼풀 벗겼을 때 존재하는 죽음의 이미지인 셉티머스는 댈러웨이 부인의 ‘더블’(또 다른 자아)이다. 커닝햄의 소설에서 셉티머스는 리처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리처드는 어머니 로라가 끝까지 살아남은 것과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 <디 아워스>에서 1950년대의 주부 로라 브라운으로 나온 줄리언 무어(왼쪽)와 2000년대 출판 편집자인 클라리사 본으로 나온 메릴 스트립.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49년(영화에서는 1951년)의 로라 브라운, 1990년대(영화에서는 2001년)의 클라리사 본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동성애 성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에서 버지니아는 언니 바네사에게 키스를 한다. 작품 속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딸 엘리자베스와 어울리는 ‘위험해 보이는 여자’(페미니스트) 미스 킬먼에게 끌린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로라는 키티에게 키스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동성애는 클라리사에게 와서 당당한 사랑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는다. 리처드의 죽음으로 지친 그녀는 샐리와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립적 삶에서도 여성들은 진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대단한 재능을 지닌 성공한 작가이지만 자신의 삶은 남편 레너드의 관대한 이해와 보호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로라의 남편 댄 역시 집안 살림을 못하는 로라를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아내의 심리상태를 전혀 가늠조차 하지 못한 둔한 남자였으나 매일 아침 아내를 위해 꽃을 바쳤다. 그럼에도 로라는 주부 이상의 무엇이 되기 위해 가정을 버려야 했다. 죽음을 꿈꾸었으나 결국 남편과 딸, 아들마저 앞세운 뒤 살아남은 로라가 영화 속에서 클라리사에게 “당신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고 했을 때 클라리사의 표정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 샐리와의 동거, 엄마를 이해해 주는 딸…. 그러나 클라리사 역시 자기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무너져 내리는 내면을 추스려야 했다. 이 부분에서 메릴 스트립은 보톡스 주사를 맞지 않은 여배우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섬세한 표정 연기를 한다.

명작의 재구성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싸우면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그 삶을 접을 때가 됐다.”(버지니아 울프)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사이의 위험한 외줄타기는 세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운명이기도 하다. 출산의 고통이 곧 기쁨이고 식구와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면서 죽고 싶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 이런 점에서 세 여성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