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 ‘책의 마법’에 걸리다

<책 읽어주는 여자>와 <더 리더>

"책을 카세트에 녹음해서 듣는 세상인데 지금이 무슨 공작부인이나 황후나 얘기 상대 귀부인들의 시대라고 집으로 찾아가서 책 읽어 주는 여자 노릇을 한단 말야.”

나무조각가 김진송씨의 작품 ‘책을 덮지 마’.

프랑스 작가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 (1986년작)에서 34세의 여자 주인공 마리 콩스탕스 G는 자신에게 책 읽어 주는 일을 해 보라는 친구 프랑수아즈의 권유에 이렇게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마리는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며, 그로 인해 그녀와 책을 읽어 주는 대상 사이에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진다.

읽어 주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교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최근 책읽기봉사단(북 스카우트)을 발족시켜 양로원·요양원·데이케어센터에 있는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 주며, 내년에는 대상을 아이들까지 확대한다고 한다. 자원봉사자가 식사나 목욕을 돕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몸이 불편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간헐적으로 책을 읽어 준 적은 있지만 공공 부문에서 책읽기 사업을 벌이는 것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요즘 한국은 카세트에 녹음해서 듣는 시대를 한참 지나 집에 앉아서 공공도서관에 인터넷으로 접속하면 MP3 파일로 오디오북을 대출할 수 있는 시대다. 더욱 편리한 여러 가지 방식을 놔두고 서로 마주 앉아 일회성의 발화로 책을 읽어 주는 것은 책을 읽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깊은 교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작가들의 낭독회, 가깝게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 주는 엄마를 생각하면 된다.

책을 읽어 주는 일이 지니는 심오한 의미를 작품 소재로 끌어들인 소설로는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1985년작)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1995년작)를 들 수 있다. 두 편 모두 책으로도, 영화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책 읽어주는 여자>는 1990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대상, <더 리더>의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릿은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각각 받았다. 그런데 책 속의 책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제대로 느끼려면 영화보다 책이 제격이다. 두 소설에는 많은 책 제목과 인용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책들은 소설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마리 콩스탕스의 말을 빌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내가 텍스트를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텍스트들이 나를 선택”하는 상황이 된다.

‘책 읽어 주는 여자’란 직업은 마리의 무료한 일상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연극학교 시절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결혼과 함께 배우의 길을 포기했다. 남편 필립은 자기생활에 빠진 건실한 엔지니어이며, 아이는 없다. 일을 찾고자 하는 그녀에게 엉뚱한 아이디어를 많이 가진 프랑수아즈는 가정방문 독서사를 권유한다. 프랑수아즈에 따르면 그것은 병자, 장애인, 노인, 정년퇴직자, 독신자 등에게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마리는 구직 광고를 내기 위해 신문사로 찾아가는데 광고 담당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엉뚱하고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마리의 은사인 롤랑 소라 교수의 반응도 다소 냉담하다. 광고가 나간 뒤 하나둘씩 고객이 생기기 시작한다. 첫 번째 고객은 하반신 불구이자 예민한 감성과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인 14세 소년 에릭이다. 에릭의 엄마는 외부와의 접촉을 늘리기 위해 마리를 고용한다. 마리는 소라 교수의 권유대로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을 들고 가서 ‘손’이란 작품부터 읽어 준다. 살인사건과 벽에 걸려 있는 엽기적인 손의 이미지는 에릭에게 발작을 일으킨다. 그러나 에릭은 계속 마리의 방문과 책 읽기를 기대한다. 그는 마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스커트 아래로 드러나는 그녀의 무릎을 훔쳐본다.

두 번째 고객은 헝가리 귀족 출신인 뒤메닐 장군 부인. 침대에 누워 있는 80살의 환자인 그녀는 백내장 때문에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 그녀가 마리에게 읽어 달라고 한 책은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 비판>이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형성한 텍스트에 고무된 부인은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열정을 새삼 불태운다.

이어 독신의 사업가와 8살짜리 소녀가 마리의 고객이 된다. 대규모 니켈 광산을 가진 사업가 미셸 도트랑은 사업상 만찬에서 문학 이야기를 하며 교양을 과시해야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없다. 책만 잡으면 곯아떨어지는 탓이다.

책을 확대해 만든 장식물로 꾸며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퀴즈리 책마을 입구의 모습. 사진제공/정진국

또 어린 클로렝드의 엄마는 부동산 개발업자로 바깥일이 너무 바빠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정서적 접촉을 할 시간이 없다. 이들은 마리에게 더욱 정서적으로 밀착한다. 마리는 미셸에게 누보 로망의 고전인 클로드 시몽의 <사물들의 교환>을 읽어 준다. 그러나 그는 책 내용에는 신경쓰지 않고 마리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친다. 클로렝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듣다가 기분이 들떠 가까운 공원에 소풍을 가자며 엄마의 보석을 걸치고 나온다. 그 바람에 마리는 절도 및 유괴범으로 몰린다.

마리는 이모저모로 수난에 빠졌다. 에릭은 마침내 치마를 무릎 위로 걷어올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속옷을 입지 말아 달라는 대담한 부탁을 한다. 장군 부인은 노동절에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시위대를 향해 국제공산당가를 틀고 붉은 깃발을 흔든다. 유괴 미수와 정치적 선동의 혐의를 받은 마리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혀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된다. 여기에다 미셸은 온갖 유혹을 한다. 그럼에도 책 읽어 주는 여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는 마리의 노력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미셸의 요구대로 알몸이 돼 침대에 누워서 이상한 포즈로 책 읽기를 계속한다.

듣는 사람 각자의 상황이나 열망
순진 솔직한 문체, 유머, 에로티시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 작품은 책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물리적으로 보여 준다. 문학이론가 롤랑 바르트가 말한 대로 독자로서 우리는 책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책은 단순히 저자의 생각이나 상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독자는 단어나 문장에 고정된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각자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는다. 이 때문에 텍스트가 지니는 의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 또 독자들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의미화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가 드러난다.

마리가 고객들에게 읽어 준 책에는 각자의 상황이나 열망이 담겨 있다. 에릭은 모파상을 통해 감성을 발견했고, 마르크스의 책은 병석의 귀부인에게 공산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켰다. 사업가에게 문학은 욕정을 부추기고, 아이는 환상적인 동화에서 해방감을 맛본다. 텍스트는 수동적으로 독서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독자의 삶에 깊이 개입한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마리는 곤란하면서도 멋진 경험을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책 읽어 주는 여자라는 직업을 포기한다.

<책 읽어주는 여자>의 원제인 ‘La Lectrice’가 프랑스어 여성명사인데 비해 <더 리더>의 원제인 ‘Der Vorleser’는 독일어 남성명사다. 즉 ‘책 읽어 주는 남자’란 뜻이다. 독일의 법학교수이자 판사, 소설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더 리더>에서도 책을 읽어 주는 일은 주인공의 관계를 중요하게 규정한다. 나아가 이 작품은 문맹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알려 준다. 독일인의 의식을 아직까지 짓누르는 나치 협력과 과거사 청산문제까지 겹쳐서 <더 리더>는 훨씬 진지하고 철학적이며 비극적인 텍스트가 된다.

스무살 연상의 여자와 소년의 사랑
남자 주인공 미하엘 베르크의 회고로 설정된 이 소설은 스무 살 연상의 여자와 소년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15살 소년 미하엘은 간염에 걸려 휴학 중이다. 어느 날 길에서 토한 그는 자신을 도와 준 전차 차장 한나를 만난다. 한나의 성숙하면서 신비로운 매력에 끌린 그는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한나의 집을 찾아간다. 땔감으로 쓸 조개탄을 날라주다가 온 몸에 탄가루를 뒤집어쓴 미하엘에게 한나는 목욕을 하도록 하면서 그를 유혹한다.

엄마와 아들만큼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외줄타기처럼 위험하고 불안하다. 미하엘은 한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나가 언젠가부터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책 읽기, 목욕, 섹스라는 리듬을 갖게 되고 <오디세이>로 시작된 책 읽어 주기는 <에밀리아 갈로티> <간계와 사랑> <어느 건달 이야기> <전쟁과 평화>로 이어진다. 다시 건강해져 복학한 미하엘이 학교생활과 한나 간의 밀회 사이를 좌충우돌하던 어느 날 한나가 갑자기 사라진다.

난독증인 여자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 준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더 리더>.

갑작스런 이별 때문에 고통을 느끼던 미하엘은 법과대학생이 돼서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러 갔다가 한나를 발견한다. 전쟁 당시 지멘스를 그만두고 친위대에 들어간 한나는 여자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했다. 한나는 아우슈비츠로 보낼 여자들을 선별했고, 더욱이 패전 직전 포로들을 집단 이송하면서 교회에 가둬 놓고 폭격을 맞았는데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몰살시켰다.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이 모두 한나에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항변을 포기한다. 계속 재판을 지켜보던 미하엘은 한나가 여러 가지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게 글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한나는 지멘스에서 근무조장으로 승진할 기회가 생기자 그곳을 떠났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녀는 가스실로 가기 직전의 소녀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책을 읽게 했다. 이는 성적 착취로 오해를 받았다. 전차 차장으로 일하던 한나가 갑자기 미하엘을 떠난 것 역시 전차 회사에서 운전기사 교육을 받아 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나가 재판에서 종신형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숨기고자 했던 것, 인생의 모든 선택과 고통을 관통한 비밀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한나로 인해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인생 전체에 대한 허무와 무의미에 부닥친 미하엘은 소년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한나를 위해 책을 읽고 그것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교도소로 보낸다. 다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시작해 안톤 체호프, 하인리히 하이네, 프란츠 카프카로 이어진다. 4년째 되던 어느 날 한나가 쓴 짧은 편지를 받은 미하엘은 그녀가 비로소 글을 배웠음을 알게 된다. 한나는 테이프에 녹음된 음성과 책을 대조하면서 혼자 글자를 깨우쳤다. 그러는 사이에 미하엘은 문맹의 삶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당혹스러움과 불안에 대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소모하는 정력에 대해, 이로 인해 실제 삶에서의 에너지 상실에 대해. 한마디로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18년의 복역 이후 가석방 결정을 받은 한나는 출감을 앞두고 미하엘과 재회하지만 석방 당일 아침 목을 매고 자살한다. 한나는 감옥 안에서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됐다. 그녀는 건강하고 깨끗하고 진실한 여자였다. 그러나 글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었다. 그런 상실감을 뒤늦게나마 보상받은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명작의 재구성

책은 매력적인 동시에 치명적이다. 책은 항상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였다. 그래서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했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장에 독을 묻혀 연쇄 살인을 불러왔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서로 다른 세대가 책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존 킨들이나 아이패드에 전자책을 다운받는 시대가 왔지만 이들 소설을 읽고 있으면 물질로서의 책에 대한 애정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