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춘향의 끝없는 변신

당대 한국사회 욕망을 되비추다

춘향, 봄의 향기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춘향의 생일은 사월초파일이다. 이때 맞춰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서는 춘향제가 열린다. 춘향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판소리 춘향전을 공연하며, 미스 춘향을 뽑는 이 행사는 전국에서 열리는 수백 개의 지역축제 가운데 가장 오래 됐다. 1931년 시작돼 한국전쟁 와중에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80회째 이어져 왔다. 민족 최대의 고전이라는 <춘향전>과 일제시대에 시작된 춘향 기리기의 역사, 영화·드라마·오페라·뮤지컬·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에서 수없이 변용된 춘향은 당대 한국 사회의 욕망을 되비추는 거울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전북 남원 광한루의 춘향 사당에 봉안된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

연애소설의 재미와 해학과 풍자 가미
<춘향전>의 탄생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체로 조선 영조에서 순조 시대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무속에서 나왔다는 설, 암행어사설화·열녀설화에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져 판소리로 응집됐다는 설, 실존 인물인 암행어사 성이성의 행적과 허구가 결합됐다는 설 등이 있다. 판본 이본 4종, 사본 20여 종, 활자본 50여 종, 번역본 6~7종이 전해지며 이 가운데 경판 <춘향전>과 완판 <열녀춘향수절가>를 대표적인 작품으로 친다. <춘향전>이 민중 사이에서 끈질기게 읽혀진 것은 연애와 사회의식이 골고루 버무려졌기 때문이다. 춘향과 이도령의 가슴 저린 사랑과 이별, 재회, 결합은 연애소설의 구조로서 손색이 없다. 여기에다 참판의 서녀이자 퇴기의 딸인 춘향이 양반가의 정실부인이 된다는 평등사상, 탐관오리의 악행을 고발하고 응징하는 계급의식, 월매·방자·향단 등 주변 인물들의 해학과 풍자가 더해져 민중에게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이런 춘향은 일제 문화통치기에 시작된 춘향제를 통해 제도권으로 흡수된다. 전북 남원에서 춘향의 사당을 짓고 단오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춘향 기리기 사업이 시작됐다. 1934년부터는 춘향의 생일인 음력 사월초파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바뀌었으며, 1939년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춘향의 영정을 그려서 봉안한다. 민족자본가인 현준호 호남은행장의 의뢰를 받아 춘향 영정을 그린 이당은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고학자·조각가·문화사학자에게 자문했으며, 조선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 이 영정이 6·25 한국전쟁 때 훼손되자 이당은 1962년 다시 춘향의 영정을 제작해 송요찬 내각수반을 통해 사당에 봉안했다. 한편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춘향제는 명창대회를 신설하고 춘향을 선발함으로써 문화축제의 면모를 갖추며, 1974년에는 전국판소리명창대회로 확대돼 첫 장원으로 조상현 명창을 배출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명창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는다.

숱한 화제 몰고 다닌 한국영화 흥행 보증수표

문희·신성일이 출연한 <춘향전>(1971년).

<춘향전>은 대부분의 예술 장르에 원작으로 등장했지만 특히 영화와 관련이 깊다. 흥행 보증수표였던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제작됐다. 1922년에 나온 첫 번째 <춘향전>은 일본인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만든 무성영화다.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고전의 영화화 붐이 일었으며, 한국영화의 상업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1935년에는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감독 이명우)이 만들어져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1955년 이규환의 <춘향전>이 개봉했을 때는 서울 인구 150만명의 10%인 12만명이 국도극장으로 몰려왔다. 여세를 몰아 1957년에는 여성국극을 영화화한 <대춘향전>(감독 김향)이 나왔다.

1961년에 개봉된 두 편의 춘향 영화는 ‘춘향전(戰)’이란 말까지 만들어 냈다. 홍성기 감독·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경합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감독과 주연 배우가 부부 사이인 이들의 대결은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며, 이후 이들이 납북되기 전까지 신필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1971년 문희·신성일 주연으로 만들어진 <춘향전>은 이어령이 각색한 최초의 70㎜ 영화였고, 국내 최초의 2D 애니메이션 역시 <성춘향뎐>(1999년)이었다.

이처럼 춘향의 생명력이 길었던 이유는 대중과 친숙한 소재인 데다 텍스트의 개방성, 등장인물의 개성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춘향에게서 강조된 것은 정절이었다. 남원의 춘향제는 시기적으로 볼 때 첫 번째 영화 <춘향전>의 흥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유화정책과 문화통치로 민족문화의 발굴과 보급이 활발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도령을 향한 춘향에게 순정과 그로 인한 고통은 피지배 국민의 역사적 행로를 대변한다.

그러나 첫 <춘향전>이 일본인 극장주에 의해 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춘향제의 시작에는 식민지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이당의 춘향 영정이 조선 미인이 아니라 일본 미인의 얼굴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영정의 입혼식 때 조선기생 100명이 줄을 잡고 행렬을 벌였다는 사실은 ‘춘향=기생’이란 인식을 보여 준다. 당시 조선 기생이 지배자인 일본 남성의 기호를 자극하는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존 기반 자체가 부일협력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기생 춘향의 정절을 기리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다.

이효정·조승우가 출연한 <춘향뎐>(2000년).

이후 영화에서 나타난 춘향의 성격 역시 당대의 사회상과 맞물린다. 1961년에 나온 <춘향전>과 <성춘향>에서 패자가 된 김지미의 춘향은 슬픔을 자극하는 눈물 많은 춘향이었던 반면에 승자인 최은희의 춘향은 현모양처형의 슬기로운 춘향이었다. 당시는 청순가련하고 순종적인 전통 여성보다 산업화,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가정의 중심으로 주부의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성춘향>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방자(허장강)·향단(도금봉)의 코믹 연기 역시 1960년대 대중문화 속에서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 준다. 1971년 <춘향전>의 주연을 따내기 위해 여배우 트로이카인 문희·남정임·윤정희가 경합을 벌였다든지 홍세미·장미희가 각각 1968년의 <춘향>(감독 김수용)과 1976년의 <성춘향전>(감독 박태원)의 춘향 공모를 통해 데뷔했다는 사실을 통해 춘향이 당대 미인의 판도를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춘향이 더욱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옷을 입게 된 것은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년)에 와서다. “세기가 바뀌었는데 웬 춘향”이란 질문에 대한 답변은 형식의 혁신으로 나타났다. 21세기 초입의 <춘향뎐>은 오페라 또는 뮤직 비디오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조상현 명창이 부르는 판소리 ‘춘향가’가 흐르는 가운데 각 대목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극의 내용이 대개 판소리로 전달되고 간간이 등장인물의 대사가 나온다는 점에서 서양의 오페라와 비슷하면서도 그것이 무대 위의 실연이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뮤직비디오와 유사하다. 영화 속에서 조 명창이 무대에 올라 고수와 더불어 판소리 공연을 하며, 그것을 보는 극중 관객이 화면을 볼 수 없다는 점은 공연과 영화를 넘나드는 매체 실험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2010년 <춘향전> 방자와 사랑에 빠지다
<춘향뎐>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은 관광객처럼 낯선 시선으로 원전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런 의도는 도입부에서부터 드러난다. 전통예술 전용극장인 정동극장에서 열리는 판소리 공연을 관람하러 온 학생들은 “춘향전 뻔한 거 아니야”라든가 “너무 지겨울 것 같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무지에서 비롯된 이들의 불평은 공연이 진행되면서 몰입과 감동으로 바뀐다. 한편 극중 관객과 달리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화면도 보는 영화 관객들은 풍성하게 펼쳐지는 남도문화의 향연에 동참할 수 있다. 남원의 이몽룡가, 월매가, 관가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통 의식주는 외국 관객은 물론 국내 관객의 탄성마저 자아낼 만큼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춘향전이 날조된 이야기라는 가정 아래 방자·춘향·몽룡의 욕망을 그린 영화 <방자전>.

춘향(이효정 분)과 이도령(조승우 분)을 맡은 배우의 나이가 원작에서 설정된 16세에 맞춰 어려진 점, 이들 사이의 육체적 사랑을 강조한 점도 <춘향뎐>의 특색이다. 임 감독은 춘향이 변학도의 갖은 협박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절을 지킨 이유에 대해 “몸이 기억하는 사랑 때문”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몸이 기억하는 질긴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영화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로 시작하는 사랑가에 맞춰 어린 두 배우가 초반에 벌이는 성적 유희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변학도의 성격과 암행어사의 응징 과정 역시 과거와 달라졌다. 변학도는 익히 알려진 포악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인상은 나쁘지만 핸섬한 엘리트 관료로 나온다. 그는 권위적이고 물욕이 강하다. 그러나 분별 없는 인물도 아니고 이도령이 자의대로 포승에 묶어 동헌 마당에 꿇릴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암행어사 출도 이후 이도령은 변학도에게 절차에 따라 전라감영으로 옮겨질 것을 통보한다. 그리고 춘향을 벌 준 이유를 묻는다. 그의 답변은 “어미의 신분을 좇아 기생이 되는 종모법을 부정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부정하는 국사범”이라는 명확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댄다. 이런 변학도의 변모는 조선이 나름대로의 행정·사법 질서가 유지되던 국가였음을 증명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2000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로는 처음 올랐다. 칸 영화제 최초 수상의 영광은 2년 뒤 <취화선>에 양보했지만 임권택 감독의 50년 영화인생을 통해 최고 영화로 평가받는다. <서편제>를 통해 국내에서 국민감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게 된 임 감독이 다분히 해외영화제 수상용으로 한국문화를 전시하기 위해 만든 지루한 작품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프랑스에서 흥행 성공을 거뒀고 미국에서도 처음 상업영화관에서 개봉해 좋은 성적을 올렸다.

올해에 이르러 <춘향전>의 변형은 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버선목처럼 뒤집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 <방자전>(감독 김대우)은 지금까지의 춘향전이 날조됐다는 전제에서 진행된다. 춘향과 이몽룡이 만난 곳은 광한루가 아니라 청류각이라는 음식점이며, 춘향은 이몽룡에 앞서 방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춘향은 사랑보다 신분 상승을 위해 몽룡을 선택하고, 몽룡은 출세를 위해 춘향을 이용한다. <방자전>은 마이너리티 시각에서 다시 쓴 주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갈수록 진실을 알기 힘든 현대사회에서 횡행하는 음모론의 시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되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명작의 재구성

춘향전 비틀기의 역사 역시 춘향전 영화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36년에 나온 <그 후의 이도령>(감독 이규환)은 이도령이 춘향을 변학도에게서 구해 서울로 올려보낸 뒤 암행어사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렸다. <탈선춘향전>(감독 이경춘, 1960년)은 홀쭉이와 뚱뚱이, 막둥이와 합죽이, 후라이보이와 살살이 등의 별명을 가진 당대 코미디언들의 잔치였다. <한양에 온 성춘향>(감독 이동훈, 1963년)은 서울에 올라온 춘향·몽룡 커플을 향한 변학도의 복수극이 노론·소론의 당파싸움을 이용해 펼쳐진다. <방자와 향단이>(감독 이형표, 1972년)는 무게 잡는 주연이 아니라 코믹한 조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2010년의 <방자전>은 1961년 <성춘향>에서 못생겨서 이몽룡이 아닌 방자역을 맡은 배우 허장강의 비애를 듣고 탄생한 영화라고 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