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한국전쟁이 남긴 ‘심오한 질문’

<순교자>와 <광장>

강산이 여섯 번 바뀌었고, 갓난아기가 환갑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중학교 2학년생 4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전쟁이 1950년에 일어난 사실을 모르는 학생이 42%였다(포항지역사회연구소)고 한다. 이 전쟁이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1950년 11월 25일 국군의 평양 철수 결정에 따라 폭파된 대동강 철교 위로 같은 해 12월 12일 피란민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 AP 소속 사진기자인 맥스 데스퍼가 촬영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 ‘대동강 철교’이다. |퓰리처상사진전 주최측 제공

이런 통계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신문과 방송은 실록부터 드라마까지 다양한 기획과 특집을 쏟아냈다. <작은 연못>, <포화 속으로> 같은 영화도 개봉했다.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천안함 침몰 사건이다. 아직도 진상이 오리무중인 이 사건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속되는 냉전구도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한국전쟁은 소설·영화·드라마 등에서 서사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돼 왔다. 영화의 경우 특히 그렇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군과 인민군으로 맞서게 된 형제의 이야기로 스펙터클한 화면과 보편적 휴머니즘에 호소한 덕분에 1000만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통일의 염원을 남북한 병사들의 놀이와 우정으로 퇴행시킨 뒤 그런 판타지를 찢고 침입하는 분단의식을 대비시켜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다. ‘옛날 옛날 어느 곳에 동막골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식의 우화인 <웰컴 투 동막골>은 주민들의 능청스런 천진함 앞에서 남북의 대결을 무화시킨다. 옥수수 창고에서 터진 폭탄이 팝콘 눈을 내리게 하는 장면은 많은 이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들 작품에서 한국전쟁은 배경으로 물러나며 구체적 사실이 생략된 추상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세월의 힘이다.

이 시점에서 김은국의 <순교자>와 최인훈의 <광장>이란 1960년대 소설 두 편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불과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한국전쟁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김은국과 최인훈 당대의 전쟁문학은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형국이 된 민족의 비극이라는 수난사의 관점, 또는 혹독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과 우정 등 휴머니즘의 관점이 대부분이다. 생생한 세부가 살아있을망정 조망과 지성의 힘이 부족하다. 그런데 이 두 편의 소설은 한국전쟁의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문제 의식을 끌어냄으로써 5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종교적·이데올로기적 문제의식 제기
<순교자>(The Martyred, 1964년)는 재미작가 김은국(1932~2009)의 영어소설이다. 함경남도 함흥의 기독교 집안 출신인 김은국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공산당 치세가 시작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목포고를 거쳐 1950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전쟁이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해병대에 입대한다. 미군사령관 아서 G 트루도 소장의 부관이었던 그는 소장의 도움으로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들베리대, 아이오와대에서 공부한다. <순교자>는 김은국이 아이오와대 창작 석사를 마치면서 쓴 졸업작품을 2년 동안 개작한 것이다.

작가 김은국(왼쪽)과 최인훈.

작품의 시간은 1950년 10월 평양 탈환에서 이듬해 1·4 후퇴를 거쳐 5월까지다. 육군 정치정보국 평양파견대에 배속된 대학강사 출신의 이대위는 파견대장 장대령으로부터 6월 25일 평양에서 12명의 목사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명령을 받는다.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아 온 목사들은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끌려가 총살당한다. 그런데 원래 끌려간 사람은 14명이었고, 그 가운데 신목사와 한목사는 살아서 돌아왔다. 순교자 가운데에는 평양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박목사도 있는데 그의 아들인 박대위는 이대위의 친구다. 박대위는 아버지의 광적인 신앙을 혐오해 의절한 상태다.

장대령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 탄압의 경우로서 국제적 중요성, 특히 미국에서 큰 중요성을 가질 만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살아남은 두 목사 가운데 정신이상이 된 한목사를 제외한 신목사가 진실을 밝히고 동지들의 순교 장면을 증언해야 한다. 장대령은 진실을 알지만 이대위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 어느날 목사들의 총살에 참여한 북한군 소좌가 체포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다. 죽은 이들은 진정한 순교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공산당에 협조한 첩자가 끼여 있으며, 몇명은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구걸했다. 특히 박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다”며 무신앙의 절대고독 속에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북한군이 신목사를 살려준 이유는 그만이 정당한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이대위는 이 같은 순교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만 신목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평양의 기독교 신자들을 위해 순교 사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내세를 믿고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사들이 배교자이며 무신앙의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신자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순교 사건이 만들어지려면 살아남은 신목사가 거꾸로 배교자가 돼야 한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에게 협조함으로써 살아남았다는 간증을 하고 신자들에게 용서를 빈다. 처음에 분노하던 신자들은 신목사의 간증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고, 이어 12인의 순교추도 예배가 행해진다.

인간의 한계상황서 신앙의 역할 물어
<순교자>는 한국전쟁이란 상황을 놓고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의 의미를 탐구한다. “성 중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욥기 24장 12절)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신앙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묻는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식과 재산을 잃고 장님이 된 채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며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라고 우렁찬 소리로 힐책한다. 욥기에 대한 성서 해석은 고난을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 본다.

이 작품에서 이런 신비를 구현하는 인물이 신목사다. 그는 거짓의 십자가를 지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거룩한 희망을 준다. 중공군의 개입이 가까워지면서 철수 명령을 받은 이대위는 신목사에게 함께 서울로 떠날 것을 수차례 권유하지만 그는 끝내 평양에 남는다. 1·4후퇴 이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이북 피란민의 개척교회를 찾은 이대위는 여러 명의 신자들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신목사를 봤다고 증언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신성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순교자>가 발표됐을 때 작가 펄 벅은 “보기 드문 걸작”이라고 칭찬했고, 뉴욕타임스는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문학세계가 보여 준 도덕적·심리적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국내에는 1964년 장왕록 번역, 1978년 도정일 번역, 1982년 작가 자신의 번역으로 각각 소개됐다. 또 작품이 발표되던 해에 국립극단에서 허규 연출로 연극무대에 올랐으며, 1965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영화와 제임스 웨이드 작곡의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소년병을 소재로 만든 영화 <포화 속으로>의 한 장면.

한편 최인훈의 <광장>은 <순교자>보다 4년 앞선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자욱한 가운데 <새벽>지에 발표됐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정치사적 측면에서 보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광장>의 해”라고 할 만큼 <광장>은 혁명이 가져온 정치적 자유와 동일시 됐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전후 남북한의 체제를 모두 경험한 이명준이란 젊은이가 정전 이후 포로협상 때 중립국을 택하고 끝내 배에서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광장>은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간 한 젊은이의 초상이다. 서울의 모 대학 철학과에 다니는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의 친구 집에 기숙한다. 그 집 아들 태식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영미는 여동생 같다. 명준은 어느날 영미의 친구인 윤애를 소개받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남북 대립이 격화하면서 명준은 월북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숨막히는 상황에서 명준은 윤애에게 기대지만 윤애는 그를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계속 밀쳐낸다.

훌쩍 월북한 명준은 노동신문 기자로 일하게 된다. 그는 만주의 콜호즈(집단농장)를 취재하러 갔다가 경제계획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과 달리 여전히 가난한 인민들의 삶을 보고 사실대로 전하지만 그로 인해 자아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북한체제 역시 숨막히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인민은 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명준에게 윤애와 비슷한 모습을 한 발레리나 은혜가 나타난다.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녀는 명준과의 약속을 어긴 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예술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그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

이데올로기 대립 시대를 산 젊은이의 초상
인민군 장교가 돼 서울에 온 명준은 서울 주변의 공산당 시설을 촬영하다가 잡혀온 태식을 만난다. 자신을 위악적으로 포장함으로써 전쟁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던 명준은 그를 고문하고, 태식의 아내가 된 윤애를 욕보이려다가 결국 포기한다. 절망한 명준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간호병으로 지원한 은혜와 재회한다. 두 사람은 명준이 발견한 동굴에서 매일 만나지만 은혜는 명준의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한 뒤 전사한다.

<광장>에서 광장은 정치의 장이며, 밀실은 개인의 삶이 보장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며, 북한의 광장 역시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 지을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곳이다. 남한 정치는 “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이며, 북한 정치는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주체적인 혁명과 그를 통한 민주주의 쟁취의 과정이 생략된 정치는 부패와 억압을 낳을 뿐이다. 　

작품 초입에서 인도를 향하는 배에 탄 명준은 자신을 따라오는 갈매기 두 마리를 본다. 선장은 그것이 선원을 따라오는 사랑하는 여인의 혼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명준은 갈매기가 죽은 은혜와 그녀의 뱃속에 있던 아이의 영혼임을 알게 된다. 통역자의 신분인 그는 홍콩에서 상륙을 요청해 달라는 포로들의 요구를 물리치다가 곤욕을 치른 뒤 배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다.

<광장>은 남북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비판함으로써 1980년대 이후 비로소 사회과학과 문학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분단의 이념적 주제들을 20년 이상 앞서간다. 인민군 이명준은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이문열의 <영웅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의 선배 격이다.

명작의 재구성

작가는 이 책이 50년 동안 6개 판본으로 출간되는 동안 다섯 차례 개작했으며, 특히 1976년 문학과지성사 전집판에서는 한문투를 대거 한글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작품에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주인공 이명준에 대해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친구”라고 깊은 감정을 토로했다.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으로 서울대 법학과를 한 학기 남겨 두고 중퇴했으며, <광장>이 나올 무렵 육군통역장교로 복무하면서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는 김은국의 목포고 2년 후배이기도 하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