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관료 좋아하다 발등 찍혔다

박 대통령, 내각ㆍ참모진에 정치권 인사보다 말 잘 듣는 관료들 대거 발탁…

세월호 대처 실패하자 생각 바뀐 듯 “관료사회 적폐 척결” 강조

세월호 침몰사고 사흘째인 지난 4월 18일,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하루 종일 오락가락했다. 이날 오전 11시쯤 중대본 관계자는 “잠수인력이 선체로 들어가는 진입경로를 확보해 식당까지 통로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오후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범정부 대책반으로 구성된 중대본은 오후 3시 30분 브리핑에서 “잠수인력이 선내 진입에 실패했다”고 정정 발표했다. 금방이라도 선내 수색작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재난 대응의 사령탑인 중대본은 현장의 기본적인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대본 관계자는 “우리도 뉴스 속보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며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

박근혜 대통령이 2월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정홍원 국무총리(앞줄 왼쪽) 등 국무위원들이 배석해 담화를 듣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관료만 선호한 1인 통치스타일 자업자득
박근혜 대통령은 유달리 관료를 선호했다. 대통령직 인수위 때부터 “가장 중요한 인사 기준은 전문성”이라며 관료를 대거 등용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국가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전혀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세월호 사고로 비탄에 빠진 국민 앞에서 대통령 얼굴만 바라보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우선 청와대부터 사고에 대한 상황관리와 수습과정에서 조정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사고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는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밝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이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관료 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관료 출신이 청와대와 내각의 주류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제1기 청와대와 내각 인선에서 잘 나타난다. 내각의 경우 총리와 장·차관 35명 가운데 관료 출신이 74%(26명)에 달했다.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 장관 등이 관료 출신이며, 정치인과 학자 출신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극소수였다. 박 대통령의 통치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진도 절반이 관료 출신이었다.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51명 중 고시 출신은 23명이었다. 홍남기 국정기획비서관, 오균 국정과제비서관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료를 발탁한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여권 일각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관료들이 정치권 인사들보다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관료들을 친위대로 활용함으로써 청와대를 중심으로 대통령 직할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진영 전 복지부 장관처럼 대놓고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권 출신 인사들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박 대통령이 2인자를 두지 않는 스타일인 만큼 ‘1인 통치스타일’에 관료들이 안성맞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박 대통령의 관료 선호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육사 출신을 주로 등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시 출신 공무원을 국가재건사업에 투입하는 등 관료들을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남덕우(총리)·이승윤(경제부총리)·김만제(경제부총리)·김용환(재무부 장관) 등이 맹활약했다.

이 같은 인사스타일로 인해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대선캠프 출신 인사들을 챙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박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이정현 홍보수석과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등 의원시절 보좌진 등 소수의 정치권 인사들만 청와대로 데리고 갔다. 대선캠프에서 정책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지난 대선 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박근혜 후보를 위해서 밤낮없이 뛰었지만 여지껏 돌아온 것은 없었다”며 “박 대통령이 캠프 출신을 챙기지 않은 것은 (박 대통령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도 청와대 근무자 절반 정도를 캠프 출신으로 채웠었다. 대통령이 새로 임명할 수 있는 청와대 행정관 이상 자리는 200여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료·교수·정치권인사 고루 등용해야
전문가들은 청와대와 내각에 관료, 교수, 정치권 인사 등 다양한 집단이 고루 포진돼야 국정운영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여러 집단에서 인재를 충원해야 특정 집단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등 견제와 균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5년 단임제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관료조직이 청와대와 정부를 장악하면 대통령의 개혁작업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개혁을 하려면 집권 초기에 바짝 밀어붙여서 신속히 진행해야 하는데,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고분고분할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시 출신이라는 특수한 인연으로 맺은 관료들은 집단적으로 이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득권이 손상받는다고 생각할 경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개혁 추동력을 약화시킨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 공기업 및 검찰개혁의 실적을 보면 초라하다. 한 행정 전문가는 “공기업 개혁의 경우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이유가 없다”며 “어차피 퇴직하면 공기업에 가서 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개혁을 하면 자리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관료들이 청와대를 장악하고 있으면 청와대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나올 수 없고, 새로운 정책을 과감히 펼치기 어렵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관료들이 청와대에 보고하는 보고서를 보면 과거 소속 기관에서 만들었던 보고서에 제목만 바꿔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관료들은 청와대에서 일해도 청와대가 아닌 자기 조직을 위해서 일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청와대에 파견된 관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정권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이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관료를 믿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관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4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관료사회의 적폐를 확실히 드러내 해결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무위원들에게 “각자 국민과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그 직에서 물러날 경우에도 후회 없는 국무위원들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처리과정을 보면서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며 “박 대통령은 관료들이 이렇게까지 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료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박 대통령이 관료사회의 폐쇄성과 저항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관심거리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