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갑’을 알은체도 할 수 없는 ‘을’

SK브로드밴드ㆍLG유플러스 고객센터 기사들 기형적 계약형태…

자영업자도 아니고 근로자도 아닌 ‘근로자영자’ 갑의 횡포에 속수무책

“비쌀 때 하지 말고 오늘까지 신청할 사람 신청바랍니다. 잘 생각하세요. 비싸게 각매(강매)당하느냐, 자유롭게 지금 하느냐….”

LG유플러스의 고객센터 기사 천모씨는 자사 인터넷 전화만 3대를 개통했다. 기사들 사이에선 이른바 ‘자뻑’으로 불리는 자사제품 강매 때문이다. 한 회선당 1만6000원씩 기본료는 매달 꼬박꼬박 나가지만 개통수수료는 한 번 받고 끝이다. SK브로드밴드의 고객서비스 기사인 황모씨 역시 상황은 같다. 한 건 개통시키면 원청에서 나오는 수수료 3만3000원이 중간의 하청업체를 거치면 김씨 손에는 1만9602원이 돌아간다.

4월 10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고객서비스센터 비정규직 노조 결성 기자회견에서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때로는 마이너스 월급이 명세서에 찍힐 때도 있다. SK브로드밴드 기사인 이모씨는 지난해 6월 이전 달 월급 -24만2325원을 차감한 급여를 받아야 했다. 회사가 부담해야 할 퇴직금 적립분과 4대 보험료를 공제하니 아버지 간병 때문에 실적이 뚝 떨어진 그달은 말 그대로 한푼도 집에 들고 가지 못했다. 월급을 더 받기는 어려워도 깎이기는 쉽다. 기사에 대한 고객서비스 만족도 평가에서 10점 만점을 받지 못하면 수수료의 5~10% 또는 5만~10만원이 차감되는 센터도 있다. 단지 ‘좋은 점수 부탁드려요’라고 고객에게 말하기만 해도 아예 수수료를 한푼도 못받는다.

인터넷·인터넷전화·IPTV 서비스업체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기사들은 회사 마크가 찍힌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계약 형태가 저마다 다르다. 하청업체에 고용된 계약직도 있고, 개인사업자도 있다. 자영업자 ‘사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업체 소속 ‘노동자’도 아닌 ‘근로자영자’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원청 본사가 아니라 각기 다른 독립법인인 하청업체와 고용이나 계약관계를 맺고 있어 급여 지급 형태나 지위가 제각각이지만 양사의 기사들 모두 딱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고용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각종 업무감독과 지시를 내리는 원청 사업자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업무감독ㆍ지시 원청업체서 받아
SK브로드밴드는 전국 91곳에 고객센터인 ‘행복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각 센터가 독립된 법인인 1차 협력업체로 원청과 직접 계약을 맺고 있다. 아래로는 산하 2~3개 지역의 행복센터를 운영하는 중간업체에 도급을 준다. LG유플러스도 비슷한 형태다. 전국 70개의 고객센터가 별도의 법인 형식을 취하고 위로는 원청, 아래로는 중간업체와 하도급 계약을 맺는 식이다.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맺건 근로계약을 맺고 고용되건 간에 일의 내용은 같다. 설치 및 보수업무와 함께 영업까지 뛰어야 하는 기사들은 다단계의 하도급 구조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양사 모두 원청이 실질적으로 하청업체 소속 직원들에게 업무감독 및 지시, 교육 등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사 고객센터 기사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류하경 변호사에 따르면, SK브로드밴드는 B스마트 또는 웹OSS라는 전산시스템으로 기사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SK브로드밴드에서는 하청 직원들에게 ‘레벨업’이라는 이름의 정기교육을 시키는 한편, 영업실적이 부진할 때 ‘품질관리자’로부터 교육을 받게 하고 있었다. 또 기사 자격시험을 실시해 업무능력을 평가하고 이 점수에 따라 인센티브나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LG유플러스 역시 원청의 전산시스템을 이용한 업무처리와 교육, 상·벌금제도 등 전 부문에서 SK브로드밴드와 동일하게 하청 소속 기사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청업체들은 이름은 협력업체지만 사업경영상 실질적 독립성이 없기 때문에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된다는 것이 류 변호사의 판단이다. “업무지시와 처리 과정에서 오히려 센터장이나 하청업체 중간관리자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을 정도여서 형식상 도급계약이나 불법적 업무위탁계약을 맺고 있더라도 기사들은 원청과 실질적인 사용종속관계에 있다고 보인다.” 하도급이 아니라 파견법상 파견관계에 있다고 보더라도 불법이다. 류 변호사는 “AS나 개통 업무는 파견 가능 업종이 아니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노동부 장관으로부터 파견업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파견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실적 압박 극심, 수당 등은 배제
산업노동정책연구소의 정용식 연구원이 양사 고객센터 소속 기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SK브로드밴드의 경우 기사들의 40.5%가 기간제 계약직이었고 18.2%는 파견·용역 지위로 일하고 있었다. LG유플러스에서는 36.3%가 기간제 계약직이었고, 근로계약이 아예 없는 경우도 33%에 달했다. 파견·용역 지위에 해당하는 기사들은 12.3%인 것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점은 전체의 8.7%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기본급과 건당 수수료를 함께 받는 급여체계를 적용받는다고 답한 점이다.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개념이 섞인 이들 ‘근로자영자’의 경우 영업 압박은 극심하면서 ‘근로자’로서 받을 수 있는 수당 등의 혜택에서는 배제되고 있었다.

‘근로자영자’에 해당하는 기사 김모씨의 경우 기본적인 설치·보수업무 외에 영업 압박 때문에 휴일은 물론 업무 중 휴식시간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삼각김밥이나 햄버거를 먹으며 일해도 실적 채우기가 어렵다”는 김씨의 급여명세서에는 기본급 외에 아예 시간외 수당이나 휴일근무 수당과 같은 항목은 나와 있지도 않았다. 시시때때로 프로모션 지시가 내려오지만 3년이 지나도록 건당 수수료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양사의 기사들이 가입한 민주노총 희망연대노조는 두 회사에 대해 노사간 교섭을 실시하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사측은 “고용관계가 없는 독립법인 소속 직원들의 문제에 관련 없는 본사가 개입할 수 없다”며 양사 모두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노조 결성 이후 원청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은 속속 나오고 있다. SK브로드밴드의 경우 기사들의 명함에 협력업체 이름을 반드시 같이 넣도록 지시를 내리는 한편 일부 센터에서 “그동안의 계약은 형식상 체결했던 것”이라며 3차 하청업체 소사장과 새로 계약할 것을 강요하는 서류를 기사들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LG유플러스 역시 일부 센터의 경우 기사들에게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입사 시부터 4대 보험 미가입을 희망”했다는 내용을 담은 확약서를 요구하고 나섰다.

노조와 함께 양사 기사들의 노동실태에 관한 조사를 이어오고 있는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과정에서의 각종 부당노동행위나 부당해고 사례까지 접하고 있다”며 “고용노동부가 두 회사를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