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그래도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는 갈릴레오의 한 마디를 바란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알리는 그 한 마디를 바란다. 살아있는 권력이 무엇을 요구하든 간에, 묵묵히 오직 진실만을 보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기를 바란다.

장면 하나. 때는 1633년 로마.(정확하지는 않다) 근대 과학혁명의 시발점을 만든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가 천동설과 지동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후 가택연금에 처하게 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진 그는 결국 교황청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굽혔지만, 나오면서 한 마디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Eppur si muove.”(그래도 지구는 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마다 갈릴레오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과학자가 됐으면,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다고 얘기를 해야지, 앞에서는 자기 의견을 부정해 놓고 뒷구멍으로 구시렁거리는 것은 무슨 심보냐?” 대략 이런 것이다. 그때마다 태양이 여러 항성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다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났다고 화형을 당했던 지오르다노 부르노 수사가 떠올랐다. 어쩌면 갈릴레오는 약 30여년 전에 있었던 이 화형 때문에 바짝 겁먹었을지도 모른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12월 12일 조사를 받기 위해 국토교통부 항공안전감독관실로 들어가고 있다. 조 전 부사장은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내리게 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의 주인공이다. | 김영민 기자

쉽게 거부할 수 없는 권력들의 횡행
그러나 중년에 이른 지금, 필자는 갈릴레오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 우선 갈릴레오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과학자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뉴턴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 그야말로 근대적 과학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필자가 갈릴레오에 대한 생각을 바꾼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부르노 수사는 말할 것도 없고, 갈릴레오처럼 사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한국 사회를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곧은 것을 곧다고, 굽은 것을 굽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점을 절감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에 들어 있는 ‘그래도’의 의미가 정말 무겁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누구나 쉽게 거부하기 어려운 권력들이 이런 저런 형태로 횡행한다. 마카다미아를 봉지째 주었다고 “야! 너 내려!”를 외치는 총수의 딸에게 직원들이 대항하기 어렵다. 불과 2년도 안 지난 2012년 2월 17일에 금융위원장까지 불러놓고 써내려간 분리경영 각서를 무시하고 외환은행과 하나은행 간 합병에 찬성하라고 회사가 요구할 때 일반 직원들이 이를 거부하는 것은 어렵다. LIG손보 인수를 볼모 삼아서 “야! 너희들 모두 사표 써!”라고 금융위가 압박할 때 KB금융지주 이사들이 이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유출된 문건은 찌라시”라고 대통령이 선을 그을 때 이에 개의치 않고 진실을 밝히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게 어렵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갈릴레오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서슬 퍼런 종교재판의 가능성 앞에서, 온갖 종류의 비인간적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에, 최악의 경우에는 산 채로 장작더미 위에서 통구이가 되고, 그 재는 티베르 강에 뿌려질 위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폭압에 소신을 굽혔다고 돌을 던지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갈릴레오의 한마디를 바란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알리는 그 한마디를 바란다. 회항시키면 회항하고, 내리라면 내려야 한다. 그래도 그 뒤에 “그래도 진실은 이것이다”라는 말을 기다린다. 각서 부정하라면 부정하고 통합 찬성하라면 찬성해도 또 누가 외환은행 통합 반대를 외치면 슬그머니 거기에도 서명해주는 작은 용기를 바란다. 감독당국이 나가라고 해서 나가더라도 나갈 때까지는 이사로서의 책임을 흔들림 없이 수행하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권력이 무엇을 요구하든 간에, 묵묵히 오직 진실만을 보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기를 바란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를 핑계 대며 미리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다. 눈처럼 새하얗게 살지 못했다고 꼭 희대의 사기꾼처럼 더럽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살면서 이런 좋은 일도 하고, 저런 나쁜 일도 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조그만 실수를 했다고 무조건 패도(覇道)를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얼마든지 돌아설 수 있고, 꼭 무슨 영웅적인 반전을 꾀해야만 면죄부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작은 사건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든다
필자는 요새 작은 일이 역사를 바꾸는 커다란 계기가 된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체험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의 난공불락 같던 인기를 ‘한 방에 보내버린’ 것은 광우병을 걱정하던 학생의 글 한 줄이었다. 요새 한참 언론을 타고 있는 삼성 이건희가의 불법상속 시도에 금이 간 것은 법학 교수 43인의 문제제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고, 무시무시한 권력만이 정의를 대신한 것처럼 보여도 이런 작은 사건이 언제나 좁은 틈새를 뚫고 나오곤 했다. 그리고 연약한 목소리는 곧 거대한 물줄기와 우렁찬 함성으로 변모하게 된다.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대한항공 직원들도 자괴감에만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 외환은행 직원들도 자포자기할 필요 없다. KB금융그룹 직원들도, 우리은행 직원들도 모두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자기 힘만 믿고 그것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남의 힘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그 권세가 끝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다 안다.

비상식의 사회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에 대한 교회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천문학의 발전을 위해 천문대를 설립하는 등 가시적 조치를 취했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얘기한 지 360여년이 흐른 뒤였다. 지난 7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카세르타시에 있는 오순절 교회를 방문하여 과거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한 데 대해 사과했다. 참 멋있고 용기 있는 모습이었다. 광포한 권력이 결코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 중에도 이런 입장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서강대 예수회를 방문했던 지난 8월 15일, 교황은 ‘자기 동지’들인 예수회 신부들에 대해 따끔한 군기잡기를 했다. “낮은 곳에서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사목자가 되라”고. 나라 밖의 추세와는 반대로 권력화·특권화하고 있는 자신의 동지들에게 300년이 넘는 역사의 교훈을 가르친 것이리라.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