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군사적 신뢰구축이 통일 지름길

10인의 전문가 한반도 빅뱅을 말한다- 평화군축

정상회담 통해 남북 군비통제 해결에도 집중해야

이상현 <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

10월 초로 예정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다. 최근 호주 시드니 APEC 정상회담에서 만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검증가능하게 핵을 폐기하면 한국전 종전과 함께 평화조약 체결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보더라도 평화체제 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독 군사 분야에서만은 진전이 더딘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남북 평화군축이 그리 쉽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과 군축(군비축소)이 필수적이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는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다. 병기의 밀도 자체가 높기에 언제나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도는 지역이다. 한반도 군사 충돌의 가능성은 남북교류 협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발생한 두 차례의 서해상 충돌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축과 신뢰 구축을 통해 군비의 밀도를 낮춰 충돌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남북 화해와 통일의 물리적 조건을 이루는 길이다.

2000년의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간 각종 접촉이나 회담은 그 이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인 팽창의 이면에는 군사 부문과 비군사 부문 간에 상당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그동안 남북관계의 진전은 주로 경제 부문에서 이룬 성과에 기인한 것이다. 남북 간 인적·물적 교류는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확대되어 2002년부터 남한이 중국에 이어 북한의 제2 교역상대로 부상했다. 2004년에 첫 분양에 들어간 개성공단에는 현재 23개 기업이 북측 근로자 1만2000여 명을 고용해 월 1000만 달러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등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성을 넘어 성공적인 경협모델로 서서히 틀이 잡혀가는 모습이다. 또 6·15 정상회담 직후 시작한 철도·도로 연결사업으로 이어진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를 통해 하루에도 수백 대의 차량이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오가고 있고, 금년 5월에는 역사적인 경의선·동해선 열차 시험 운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군사 분야에서는 초보적인 신뢰 구축조차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군사분야의 신뢰 구축을 통한 실질적 긴장 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북교류 협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남북 군사당국은 2004년 두 번의 장성급 회담 이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우발적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한 군사 핫라인을 가동하고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선전물을 치우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NLL 재설정 문제를 가장 우선으로 논의하자는 북측 주장에 막혀 금년 6차까지 열린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도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또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서해상 공동어로와 철도 개통 등 핵심 경협 사안들이 군사적 보장조치가 마련되지 않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군사 분야가 경제 분야의 협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 같은 현실은 한반도를 둘러싼 민감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남북관계가 휘청거리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은 2005년부터 이른바 ‘근본문제’를 제기하면서 남북 간 정치·군사적 진전을 요구하고 있다. 서해 해상경계선 재설정 문제를 필두로 한·미 군사훈련 중지, 참관지 제한 철폐,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내세우며 최소한 이 문제들이 진전되어야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남측은 아직 이 근본문제들에 대해 수용할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NLL은 실질적인 국경선으로 인식되고 있고 한·미 군사훈련 역시 한·미동맹과 동일시되고 있다. 참관지 제한 철폐 역시 남북의 체제 속성상 남측이 받기 힘든 정치적 부담이 존재한다. 국가보안법은 국회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여전히 국회의 다수는 폐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여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평화체제 논의 여건을 조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핵문제와 아울러 남북 군비통제 및 군사적 신뢰 구축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남북 교류 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 상시화 등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군사적 신뢰 구축 방안으로는 상호 군사훈련 통보와 참관, 국방장관 회담 정례화, 군사당국 간 핫라인 가동, 비무장지대 공동관리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재래식 군비 통제는 핵문제 해결이 가시화되고 군사적 신뢰 구축이 성숙한 이후에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NLL 문제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성급하게 다룰 것이 아니라 남북기본합의서 상의 다른 군사적 신뢰조치들과 함께 남북 군사공동위 등을 구성해 장기적 과제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여정부에 들어 대북 군사문제에서 통일부나 외교부에 비해 주무부서인 국방부의 재량과 역할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이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 남북 군사 신뢰 구축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계속된 상시 과제로서 인식의 타성에 젖어 신뢰 구축을 위한 참신한 정책이나 방법 개발에 미흡했다. 향후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난 5월 제4차 남북정상급회담에서 회담이 결렬된 뒤 남측 대표단장인 한민구 소장(왼쪽 두 번째)이 북측 대표단 김영철 중장과 굳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첫째, 남북 간 긴장 완화 및 군사 신뢰 구축을 위한 국가전략적 차원의 장기적·총체적 전략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하다. 남북 군축 및 신뢰 구축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되어 왔다. 군사적 차원의 신뢰 구축은 남북교류 협력이나 장기적인 통일을 위해 필수적 과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둘째, 남북 군사당국 간 접촉을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재 남북 간에는 분야별로 각종 대화가 진전되고 있으나, 북측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당국 간 회담이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상황이 되풀이되어왔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부정기적이고 돌발적으로 이어지는 국방장관회담이나 장성급 회담을 정례화함으로써 ‘제도화’의 수준을 높여가야 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군사 대 비군사 부문의 불균형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에서 군사문제는 주로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지원하고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그 결과 군사적 충돌이나 위기상황이 발생할 경우 교류협력사업이 경색되고, 군사당국이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및 의지가 제한되었다. 향후 대북 군사문제에 대한 군사당국의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시정되어 남북 간 평화군축이 이뤄질 때 남북화해와 통일은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다.

서울대 외교학과
미 일리노이주립대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