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총리실 하드디스크 폐기 “총 형량 22년 중범죄”

전자정부법 35조·기록물관리법 50조·형법 155조 위반

얼마 전 관객의 입소문을 타면서 흥행하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보았다. 바쁜 일상에 영화관에 갈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꼬집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보기로 결심했다.

국무총리실이 지난 11월 8일 공개한 디가우저. 디가우저는 하드디스크의 겉모양은 그대로 두고 안의 내용만 쓸 수 없게 폐기시킬 때 사용된다. |강윤중 기자

영화는 두 시간 동안 흥미진진했으나 속은 내내 불편했다. 검사, 경찰, 기자, 연쇄 살인범, 조직폭력배, 기업 스폰서의 물고 물리는 관계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기업 스폰서로부터 도움을 받은 검사가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검사 출신 장인이 그에게 “남자가 그럴 수 있지, 이럴 때 준비해서 터뜨릴 만한 연예인 스캔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대사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바로 최근 영화와 비슷한 일들이 ‘검사와 스폰서’ ‘대포폰 및 하드디스크 무단 폐기 사건’ 등의 이름으로 연일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만건 기록 ‘디가우저’ 이용 삭제
최근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이 공기업 임원의 명의를 도용해 5대의 대포폰을 만들어, 민간인을 불법 사찰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과 비밀 통화를 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제공했다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폭로했다. 게다가 민주당 우제창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총리실이 2006년 구매한 디가우저(하드디스크 영구 파괴 장비)를 쓰지 않다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 집중된 2009년부터 사용해 수십만 건의 문서를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불법 사찰 증거를 인멸할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어 총리실 디가우저의 존재와 그 사용 내역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재밌게도 검찰은 이런 폭로가 이어질수록 관련 내용에 대한 수사는 미적거리고 의원실의 청목회 불법 로비 수사만 가속화하고 있다. 영화 속 검사 장인의 대사가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

검찰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두 의원의 폭로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만한 매우 큰 사건이다. 대포폰이라는 것은 조직폭력배, 사기꾼 및 불법 행위자들이 자신의 통화 내용이나 위치가 감청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하여 쓰는 전화기를 말한다. 이런 대포폰을 청와대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법이지만, 대포폰을 이용해 무엇인가 불법적인 행위를 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커 보인다. 검찰이 청와대 어떤 지휘 라인에서 지시를 내려 무슨 목적으로 사용했는지 밝히지 않고 이 사건을 덮어 버린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국무총리실에서 민간인 사찰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수십만 건의 기록을 디가우저를 이용해 삭제했다는 점이다. 그 양도 3000GB로 거의 천문학적인 양이다.

국무총리실에서 디가우저를 이용해 하드디스크를 폐기한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법적으로 어떤 처벌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선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법은 전자정부법 제35조이다. 이 법 조항은 ‘행정정보의 처리 업무를 방해할 목적으로 행정정보를 위조·변경·훼손하거나 말소하는 행위’를 할 경우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 사건과 딱 맞아 떨어진다. 하드디스크 폐기가 검찰이나 감사원의 수사 및 감사를 위한 행정정보의 처리 업무를 방해할 목적이 너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박기춘 원내수석부대표, 전현희 대변인,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 민노당 곽정숙 의원이 8일 오후 국회 의안과에 민간인 불법사찰, 대포폰 사건 등의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공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이하 기록물관리법) 적용은 어떨까. 기록관리정책을 주관하는 국가기록원에서는 각 부처 전자기록에 대해서 기록관리시스템(RMS)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각 부처의 모든 전자기록은 기록 폐기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물평가심의회 없이 기록물을 무단 파기한 것 또한 명백한 불법 행위다.

위와 같은 사안을 위해 기록물관리법 제50조에는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승휘 명지대 기록과학정보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무총리실 하드디스크 폐기야말로 전형적인 기록물관리법 위반 사례로 검찰이 이 법을 반드시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형법 155조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위조 또는 변조한 증거를 사용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살펴본 것처럼 하드디스크 폐기에 대해 대충 적용할 수 있는 처벌 규정만 도합 22년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행위가 다른 기관에 옮겨 붙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교과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 사태와 관련하여 논의한 회의록에 대해 시민단체들의 정보공개청구가 있자 보존기간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기록물평가심의회도 없이 무단 파기해 버렸다.

처벌 안하면 유사사례 속출 가능성
이 사안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관계자들을 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을 종로경찰서로 이관해 버렸다. 한마디로 수사 의지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공직자의 기록 파기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 없이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나 부패 방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 많은 공직자가 기록 자체를 정식 공문으로 등록하지 않고, 등록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은 수시로 없애버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그런 일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검찰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도 지시를 한 윗선을 밝히기는커녕 대충 사건을 뭉개고 있다. 만약 검찰이 위의 사례들을 계속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례들은 계속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엄중하게 사과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발하고 있는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레이건 대통령의 이란 콘드라 사건 등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국민은 이번 사건을 무섭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진한<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