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4·19는 왜 ‘미완의 혁명’이 되었나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한국 현대사 헤게모니는 보수적 부르주아지 세력이 차지

4·19혁명을 생각하면서 불현듯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4·19 혁명에 참여한 지식인 가운데 많은 분이 나중에 시민보다는 권력의 편에 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에 한창 학생운동이 고조되고 있을 때 그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4·19 때 해 봤는데 그거 젊을 때의 치기일 뿐이야.” 그리고 “4·19 때 했던 사람들이 다 변절했는데 무슨 놈의 학생운동이야”라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4·19 혁명 당시 경무대로 가는 길목인 세종로에서는 경찰의 총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1960년 경무대로 가는 길에 쓰러진 이들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까.

4·19 정신은 제대로 구현됐는가
두 번째 에피소드는 1960년 4월 25일에 있었던 교수단 시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의 시위는 그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끌어낼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시위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일부로부터 흥미로운 증언이 나왔다.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4·19정신에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교수들에게 나서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경무대로 들어가는 주한 미국대사의 차량이 시위대에 의해 발견됐고, 시위대는 그 차량을 향해 힘찬 박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의 하야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요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정부가 동원한 군이 무력 사용을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함께 미국이 이승만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4·19 혁명 덕분에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민주당 정부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오히려 4·19 혁명을 주도한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재갈을 물리려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세력의 손발을 묶으려 했으니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 누구도 민주당 정부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스스로 4·19 혁명의 적자라고 주장했다.

이 네 편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4·19 혁명을 둘러싼 주요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4·19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는가. 4·19 시위가 이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나 주체는 누구였는가. 4·19 혁명은 왜 미완의 혁명이 됐는가. 우리 사회 속에 4·19정신이 구현된 시기가 있었던가.

4·19 혁명은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복잡한 방정식을 보여 주고 있다. 혁명세력과 부르주아지에 기반하는 보수세력이 동거하며, 부르주아지와 파시스트가 동거하고, 파시스트와 혁명세력이 동거한다. 항상 동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동거의 조합을 이룬다. 그리고 그 조합 속에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계속됐음을 보여 준다.

4·19는 혁명세력 또는 진보세력과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보수세력이 함께한 혁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보수세력이 혁명 과정에서 한 역할은 거의 없었다. 부통령 장면은 4·19 혁명의 와중에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진보세력과 대중의 결합에 보수세력을 업었을 뿐이다. 그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보수세력은 ‘반혁명세력’으로서의 본래 본질을 드러내면서 혁명·진보와 결별하고 오히려 파시스트 세력과 손을 잡았다.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보수세력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는 그들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토대가 위협을 받을 때 이들은 혁명·진보 세력과 손을 잡는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순간 그 혁명이 자본주의적 범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이 과정은 혁명을 함께한 혁명·진보 세력과 잡은 손을 놓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4·19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적 보수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주류적 역할을 내준 적은 없었다. 유신체제가 이들에게 시련을 주었을 때 이들은 재야와 손을 잡았고, 심지어 노동운동까지도 도와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혁명 이후 혁명·진보의 가치가 수면 위로 등장하자 이들은 다시 자본주의 지키기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에게 강력한 힘을 준 것은 급격한 변화를 꺼려하는 대중의 보수성과 민주주의·자본주의 제도의 탁월함, 이를 지원하는 미국이었다.

혁명의 가치보다는 자본주의 지키기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주류인 부르주아지적 보수들이 건강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건강했던 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극우(파시스트)와 극좌(공산주의)의 힘이 너무 강하게 작동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진보·혁명 세력과 건강한 부르주아지 보수세력의 결합은 한국 사회 민주화에 가장 큰 동력이 됐다. 진보·혁명 세력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이 사회의 헤게모니로서 작동하지 못했다. 일부 진보세력이 정권의 중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반혁명 보수세력의 헤게모니 안으로 흡수됐다. 우리는 구조조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또 이를 50년 전에 민주당 정부 아래에서 미국이 장면 정부에 요구한 공공요금 인상, 환율 현실화, 외화유치법 등 사회 개혁 과정에서 경험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제기한 의문들에 대해 거의 대부분 해답을 줄 수 있다. 분명 4·19가 진보와 혁명의 정신 아래 이뤄졌음에도 헤게모니는 보수적 부르주아지 세력이 장악했다. 만약에 조봉암·진보당 같은 강력한 진보·혁명 세력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미국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하야하도록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이러한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 1979년 10·26 이후의 과정,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과정,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민주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 보수들이 건강성을 잃은 이유, 현재 나타나고 있는 부르주아지적 보수와 파시스트 사이의 파열음은 한국 현대사가 보여 준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4·19 혁명은 우리에게 우리 사회를 단지 ‘현상’으로만 인식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실천하라고 한다. 요즘처럼 대안과 방향을 잃은 상황에서는 정말 어려운 문제다. 1960년 4월 경무대로 가는 길에 쓰러진 영웅들은 어떤 좌표를 그리고 있었을까.

<글·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