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내가 본인’ 인감증명 폐지 갈길멀다

시범운영 ‘본인서명확인제’ 시기상조론· 부작용 논란 여전

인간의 운명은 인장에서 시작해서 인장으로 끝난다. 세상에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고 죽은 뒤에는 인감 폐기 신고를 해야 한다. ‘도장 찍었다’라는 관용표현도 있다. ‘계약했다’ ‘이혼했다’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인장은 이토록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인장문화가 생활에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감증명제도. 그러나 인감증명제도의 운명은 ‘시한부 인생’이다. 정부가 인감증명제도를 향후 5년 이내에 완전히 폐지한다는 방침 아래 서명제도로 바꾸기 위한 여러 방안을 속속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인감증명제도의 개편방안을 둘러싼 논쟁도 덩달아 뜨거워지고 있다.

위조된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증을 들고 있는 수사관들. |박민규 기자

공증확인 의무제 도입땐 보증 부담
지난 1914년 도입돼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는 인감증명제도는 개인의 재산권 행사와 관련, 신뢰를 담보하는 수단 중 하나다. 특히 신용 및 공증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저렴한 비용과 간편한 절차로 개인의 경제활동시 본인의 의사를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통용되어 왔다. 정부는 이 제도를 적어도 2004년까지 폐지하고 서명제도로 바꾸겠다며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국민의 편의 제고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서명이 본인 확인 보조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주민등록증에 서명을 추가하는 방안을 입법예고했다. 또 내년부터 전자위임제도 도입 등 온라인·오프라인상 다양한 인감증명 대체수단이 마련되고 있다. 또 인감증명을 본인 서명으로 대체하는 데 기초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본인서명사실확인제’가 시범 운영된 지 6개월째를 맞았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3월 시범운영을 위한 시뮬레이션 센터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주민센터에 설치했다.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은 공무원이 민원인이 본인임을 확인→민원인이 서명등록기에 서명→서명된 확인서 발급의 순서로 이뤄진다. 단 서명은 인감처럼 등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민원이 발생할 때마다 서명을 해야 한다. 행정안전부 김현철 주민과장은 “한 개 동사무소에서 시험운영하기 때문에 많은 샘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전제하면서도 “설문조사 결과 주민들이 대체로 ‘편리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뮬레이션 센터에서 ‘본인서명 사실확인서’를 발급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홍믿음씨는 “주민의 동의를 받아서 본인서명 사실확인서 견본을 발행하고 있다”면서 “적극적 지지나 적극적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지만 대체로 젊은 사람은 찬성, 나이 드신 사람은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극소수 인감 위조·도용 사건 빌미”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본인이 서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리·위임이 불가능하다. 김현철 과장은 “대부분 인감 위·변조 사건은 대리발급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전제하고 “대리 발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해 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도 인감증명 발급 현황을 보면, 총 4846만 통의 인감이 발급됐다. 이 중 13.8%(666만 통)가 대리인에 의해 발급됐다.

돋보기를 사용해 인감 검사를 하고 있는 조사단원의 모습. | 경향신문

김현철 과장은 “인감의 관리·보관에 소모되는 행정비용과 인감사고·사건에서 야기된 행정비용 등을 감안하면 약 4500억원 정도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분증의 위·변조 등으로 인한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위·변조 감정을 의뢰한 건수가 만만치 않다. 최근 3년 동안 2300건에 이른다. 가족간의 관계에서 고소·고발된 사건도 매년 1420건 정도 발생하고 있다. 또 일선 동사무소의 민원 발급 업무의 50% 이상을 인감 발급 업무가 차지한다. 발급된 인감증명의 45% 정도가 금융회사 제출용이다. 인감증명 제출을 요구하는 법령은 150여개나 된다.

하지만 정부의 주장대로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서명 사실확인제도의 주무담당자인 행안부 주민과 소속 정성모씨는 “확인서는 대리·위임 발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거동이 심각하게 불편한 사람은 본인서명 사실확인이 불가능하다”면서 “당장 인감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닌 만큼 문제점을 보완해서 국민 편의를 제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감증명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부가 인감제도 개편의 명분으로 내세운 인감 위·변조 사고와 행정경비 절감에 대해서도 법조계 등 일각에서는 수긍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대리 발급된 인감 666만 통 중에서 인감사고는 불과 197건에 지나지 않는 게 반격의 빌미다. 손기태 변호사는 “정부가 지나치게 과대 홍보하고 있다”면서 “또 197건 중 인감증명제 폐지의 직접적 명분으로 내세운 인감 위·변조는 1년에 5~7건밖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인감증명제도 폐지에 따른 공증확인 의무제가 도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시기 상조론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6월 인감제도 개편 공청회에서 서명제도 도입을 주장했던 금창호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규모가 큰 부동산에 대해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공증인 확인의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증인 확인의무제는 개인 간 경제 및 사회활동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사적 거래’를 존중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손 변호사도 “하지만 공증제도 등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증확인 의무를 도입하면 계약당사자가 보증부담을 스스로 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감 위·변조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그동안 정부가 그 책임을 져 왔다. 그 이유는 인감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 사인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장 중에서 행정기관에 등록하여 공적 증거력을 갖고자 하는 것이 인감이며, 등록된 사실에 기초하여 행정기관이 이를 공적으로 증명하여 주는 행위가 바로 인감증명이다. 반면 서명 위·변조사고에 대해서는 계약당사자가 규명해야 한다. 손 변호사는 이어 “정부가 사적 거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장업계는 정부가 인장의 위·변조 문제를 언급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최병훈 인장명인은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 동안 인감사고가 773건이 발생했는데 그 중 인장 위조·도용 사건은 20건”이라고 전제하면서 “인감제도 폐지를 마치 인감업자의 부도덕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한편 일본의 통치 잔재로 여겨지던 인감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에서 실시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제2대 인장명인 이동일씨는 “조선왕조는 일본 왜구들에게 도장을 찍게 한 뒤 이를 일일이 대조하고 조선왕조가 제시한 조건에 맞는 왜구에게만 무역과 통상을 허락해줬다”면서 “그것이 인감제도와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