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불공정 사회’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공정성 화두인 한국사회 상황과 맞물려 반응 폭발

자신이 평균 이상의 독서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올해 5월 이전에 ‘마이클 샌델’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여름 이후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기가 더 어려워졌다.

2010년 하반기 출판계의 화두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면, 올해 여름은 단연 <정의란 무엇인가>의 계절이었다. 출간 이후 12월까지 60만부가 넘게 팔린 <정의란 무엇인가>는 장하준 교수의 새 책과 마찬가지로 출판계만의 사건을 넘어 흥미로운 사회적 현상이 됐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5월 24일 출간 이후 지금까지 60만부 넘게 팔렸다. 사진은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 모습. |경향신문

세태를 논하는 언론 필진들의 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앞다퉈 거론되고 인용됐다. 박근혜 의원은 8월 초 트위터에 이 책을 읽었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올해 7월 국회 도서관이 조사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기도 했다. 공동 1위를 한 다른 책은 트위터에 관한 책이었다.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의 총아인 트위터만큼이나 뜨거운 관심을 모은 2010년 ‘핫 트렌드’였던 셈이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영미학계에서 공동체주의의 4대 석학 가운데 한 사람이자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 이후 정의론 분야의 석학으로도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명강의로 소문난 저자의 강의를 토대로 쓰여졌다고는 해도, 제레미 벤담으로부터 임마누엘 칸트,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쟁쟁한 학자들의 정의 개념을 다루는 이 책은 상대적으로 평이하달 뿐, 오락적인 요소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의 다른 두 책(<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왜 도덕인가>)이 출판사를 달리해가며 잇달아 출간됐다.

책 표지에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책을 펴낸 곳은 팔릴 책을 고르는 안목과 마케팅 능력이 좋기로 이름난 김영사다. 책의 성공은 ‘하버드’를 앞세운 대형 출판사의 ‘공격적인 마케팅’의 결과였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출판사도 굳이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김영사는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이라는 점에 착안해 대학 구내서점을 비롯해 교보나 영풍 같은 대형서점과 이들 서점의 지방 지점 등 50여곳에 강의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노트북을 설치했다. 6월 30일에는 인터넷 매체 및 온라인 서점과 연계해 출간기념 간담회도 열었다. 간담회에는 김용철 변호사,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우석훈 2.1연구소장, 금태섭 변호사 등이 참석해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장재경 팀장(김영사 마케팅 팀)은 “국내 저자인 경우에는 저자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하는데, 저자가 외국인이라 어떤 부분을 이슈화할 것인지 생각하다 하버드에 초점을 맞췄다”며 “그런 것이 하버드 마케팅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출판사는 애초 10위권을 목표로 마케팅을 진행했다.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를 독식해온 2000년대 이후 출판계에서 인문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것은, 그것도 1위를 차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난 8월,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과 무관할 수 없다. 출판사는 출간 시기를 6·2 지방선거 직전으로 잡았다. 장 팀장의 말처럼 “선거가 다가오면 도덕이나 정의의 문제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판매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서 1위로 등극한 것은 출간 이후 한 달이 지난 7월 첫주의 일이다. 이 시기는 지방선거 이후 개각에 따른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후보자들의 법적·윤리적 흠결, 성접대 검사에 대한 검찰 조사, 총리실 민간인 사찰 문제 등이 불거지던 때다.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언급하면서 ‘정의’란 말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이와 관련해 “불공정 게임으로 집권층에 오른 자들이 공정사회를 부르짖자 근본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하면서 이 책이 60만부를 넘어섰다”고 해석했다(<경향신문> 11월 7일자 칼럼).

‘공정사회’ 문제 불거지면서 ‘정의’ 떠올려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 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책도 아니고, 미국 보수세력을 겨냥한 책도 아니다. 샌델 교수가 미국 민주당이 미국 공화당의 보수 헤게모니에 맞서려면 정치에 도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지난 10월에 출간된 <왜 도덕인가>에서다. 정의와 공정성이 화두로 떠오른 우리 사회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실제 책이 담고 있는 함의 이상으로 반응이 증폭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와 샌델 교수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대안적 학문공동체 ‘수유+너머’는 지난 10월, 온라인 저널 <위클리 수유+너머>에 ‘대한민국 정의에 환장하다’라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했다. 이 특집에 기고한 글에서 수유+너머의 좌장격인 고병권씨는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이렇게 요약했다. “‘하버드대 최고 명강의’라는 출판사 광고 카피가 제대로 먹혔다. 조선일보로부터 프레시안, 유시민, 노회찬까지 들어간 독서 권장 릴레이가 있었다. 정의와는 담 쌓은 줄 알았던 청와대가 공정사회를 주창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책을 보니 그 구성이 완전 논술교재다.” 고씨는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지극히 미국적인 서사라면서 “공동체 성원들이 공유하는 건전한 시민성이란 대개의 경우 그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이나 통념이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의지에 불과하다.… 지금의 내 것을 지키고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현실이고 또 불가피할 때가 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것을 정의라고까지 부르는 건 너무 몰염치한 일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바다 건너 벽안의 한 정치철학자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만나면서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의 이면에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마찬가지로 변화에 대한 소진되지 않은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장하준 교수의 책이나 샌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사회정의나 경제정의가 우리의 지향점이긴 하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은 데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