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경희대 ‘시민교육’ 자율적 개인 양성

신입생 대상 3학점짜리 필수강좌… 깨어있는 민주시민으로 소양 함양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산파 노릇을 한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소는 “시민이란 자신을 구속하는 법을 제정하거나 그 과정에 참여하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라고 정의했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은 저절로 태어나지 않는다. 시민은 길러지고 양성된다. 적어도 경희대는 그렇게 믿고 있다.

봄꽃이 만발한 경희대 캠퍼스. 경희대는 올해부터 신입생 전체를 상대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가르치는 시민교육을 하고 있다. | 경희대 제공

좋은 시민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상식이다. 좋은 시민이란 무엇일까. 경희대는 “탁월한 시민, 책임 있는 시민, 따뜻한 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런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대학교육의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시민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지적 능력과 덕목을 함양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희대 시민교육이 닻을 올린 지 두 달이 지났다. 국내 대학으로서는 사상 초유의 실험이다.

시민교육 교과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올해 경희대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3학점짜리 시민교육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1학기의 경우 전체 95개 강좌에서 2500여명이 수강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2학기에 듣는다. 강의당 평균 수강인원은 30여명이다.

국내 대학으로 사상 초유의 실험
비슷한 사례가 이전에 있었다. 성공회대는 지난 2004년 ‘인권과 평화’ 강좌를 전교생 필수교양과목으로 개설했다. 그 후 ‘민족 인종 평화’ ‘지구촌 사회와 인권’ ‘인권과 사회복지’ ‘여성과 인권’ ‘평화를 찾아서’ 등 관련 강의가 추가됐다. 시민교육이냐 인권평화교육이냐의 차이도 있지만 규모의 차이가 크다. 성공회대는 학생 2200여명 규모의 소규모 대학이다. 재학생 전체를 합쳐도 경희대 신입생 수의 절반 수준이다. 규모 있는 종합대학에서 신입생 전체를 대상으로 민주시민 소양교육을 의무화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시민교육은 경희대가 올해부터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이름으로 시도하고 있는 더 큰 실험의 일부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교양교육만을 전담하는 대학이다. 2011년부터 입학하는 모든 신입생들이 여기에서 교양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시민교육 이외에 ‘중핵과목’도 필수로 들어야 한다. 중핵과목은 둘로 나뉜다. 1학기에는 ‘인간의 가치 탐색’을 배운다. 2학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배운다. 인간의 가치라는 근원적 물음으로부터 시작해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한 물음으로 배움을 확장해가는 구성이다. 인문사회과학의 성격이 강하지만, 시민교육과 마찬가지로 공대학생이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중핵과목이 개인의 가치를 묻고 따지는 강의라면, 시민교육은 이를 기반으로 개인을 넘어 세상 속 타인들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다. 요컨대 신입생들이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시민교육 교재의 이름이 다름아닌 <제2의 탄생>인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우기동 경희대 철학과 교수(시민교육 프로그램 디렉터)는 <벽암록>을 인용해 “줄탁동시를 통해 학문 본연의 길을 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가 알의 안팎에서 동시에 노력해야 한다.

알의 바깥에서 학생들을 자극하는 일은 가르치는 이들의 몫이다. 교수진은 60명이다. 17명은 전담교수, 다른 이들은 외래교수다. 전담교수들의 전공은 문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등으로 넓다. 전담교수들은 보통 3개반의 강의를 맡는다. 외래교수들은 시민사회단체에서 현장활동 경험을 풍부하게 비축한 이들이다. 수업은 발표와 토론을 중심으로 한다.

가르치는 이들은 조심스럽다. 학생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되 강요해서는 안 되므로 조심스럽다. 학생들에게 미숙한 구석이 있더라도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되므로 또 조심스럽다. 시민교육 교수진은 ‘신중’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산다. 그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다. 알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것은 결국 학생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까닭이다.

교양교육 전담 후마니타스 칼리지 운영
외래교수로 출강하는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어떤 사안이든 이게 옳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에 대한 신념과 확신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온 활동가다. 그러나 학생들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가게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토론한다고 했을 때 옳고 그름을 미리 제시할 순 없다. 이견들이 서로 경합하게 해야 한다.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학생들이 스스로 말하고 듣게 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전담교수로 출강하는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은 “꼰대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표현했다. 박진 상임활동가처럼 그에게도 학생들의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 과제다. 정 부소장의 말이 많아질수록 학생들의 말수는 줄어든다. 말수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도 줄어든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교수의 생각에 맞추려 한다. 토론에서는 이견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라도 보수적인 생각을 말하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려 한다.

고작 두 달이다. 학생들이 교복을 벗고 대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민교육의 이상이 현실과 합치하자면 시간이 걸린다. 활발한 토론은 쉽지 않다. 박 상임활동가는 “학생들이 모범적”이라고 말했다.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정답’을 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인권활동가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짐작하고 말하는 것 같다. 학생들이 내 말에 도전해주기를 바라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시민교육의 중핵은 현장활동이다. 학생들은 3명이 한 조를 이뤄 활동계획서를 제출하고 실행해야 한다. 지난 두 달이 활동계획서를 만들기 위한 기초 소양교육이었다면 남은 두 달은 계획을 실행하고 동료 학생들로부터 조언과 평가를 구하는 과정이다.

언론정보학과 신입생인 박선현씨는 경영학부와 관광경영학과의 두 학생과 짝을 이뤘다. 조 이름은 ‘하모니’다. 다른 두 학생이 각기 베트남과 중국에서 온 외국인 학생인 까닭이다. 현장활동 주제는 ‘글로벌 KHU(경희대)’다. 외국인 친구들이 느끼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것, 외국인 친구들의 차별에 대한 고민을 듣는 것,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이들과 한국어로 대화하기 등이 활동 목표다. 현장활동은 중간고사 이후인 4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박씨는 “우리 학교에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서요, 학교 다니면서 겪는 어려움을 알아보자, 그런 취지예요”라고 말했다.

경영학과 신입생 임현묵씨가 속한 조의 이름은 ‘왕건과 아이들’이다. 왕건은 경영학과 2학년 중국인 유학생이다. 왕건의 외국인 친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할 계획이다. 설문 대상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느낀 불편들이다. 그 중에서도 문화재 안내판의 표기 오류에 집중할 생각이다. 정치외교학과 신입생 김민기씨 조의 활동계획서에는 김씨의 전공이 반영됐다. 주제가 ‘정치 알아가기, 정치와 친해지기’다. “정치 참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약 감시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는 게 활동 목표다. 어떤 학생들은 쓰레기 지도를 만들보겠다고 하고, 또 어떤 학생들은 의약품 남용 사례를 찾아보겠다고 한다. 시민교육이 모두 95개 분반으로 이뤄지고 있으므로, 이런 활동계획서는 모두 950여개에 이른다.

“생각보다는 느끼는 점이 많아요”
학생들은 조금씩 알의 껍질에 균열을 내고 있다. 임현묵씨는 “정답 찾는 공부를 하다 토론하고 제안하는 수업을 듣는 게 어색했어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신입생들은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다. 임씨는 “나쁘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배우니까”라고 말했다. “몰랐던 걸 배우기도 하고, 좀 깊게 내려가기도 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생각보다 느끼는 점이 많아요.”

지난 4월 29일 시민교육 강의에서 외부강사로 초청된 재즈피아니스트 진보라씨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 경희대 제공

김민기씨는 대학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다른 대학에 다니다 시험을 다시 봤다. 김씨는 단어를 골라가며 차분하게 말했다. “(시민교육 강의를) 마음으로 잘 따라가면, 여기서 말하는 걸 잘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활동계획서에 대한 김씨의 평가는 냉정하다. 자신이 속한 조의 계획이든 다른 조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제 계획의 경우엔 딱히 발로 뛸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수업도 있고 해서요. 인터넷으로 조사해보고 매니페스토 단체에 가보고 하는 정도가 될 것 같아요. (다른 조들도) 신선하다는 느낌은 조금… 대체로 일회성으로 할 수 있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걸 하려는 것 같아요. 올해 처음 시작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어쨌든 저는 이런 공부가 좋고,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배움은 쌍방향이다. 약간의 혼란과 약간의 설렘으로 수업을 따라가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지켜보는 교수진도 배움을 얻는다. 정창수 부소장은 “재교육을 받는 느낌이다.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도 또 다른 성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박진 상임활동가는 “이 세대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각박한 세상이 학생들을 옥죄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교수진은 의욕이 많다. 외래교수로 출강하는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교수진의 열정이 대단하다. 막노동을 해서라도 학생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교수진은 매달 한 차례 워크숍을 통해 의견을 나눈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따로 만든 온라인 카페를 통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들은 강의노트도 서로 공유한다.

의욕도 크고 기대도 크다. 경희대 신입생들은 한국에서 최초로 대학에서 시민교육을 받는 1세대들이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학생들에게서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20대를 규정한 방식은 ‘88만원 세대’라거나 ‘잉여’라거나 하는 부정적인 프레임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절망적이지 않다. 나는 희망을 본다.”

경희대 시민교육의 핵심 가치는 공감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일 거라고 기성세대는 믿고 있다. 정창수 부소장은 “이 학생들만이라도 깨어 있는 시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진 상임활동가는 “이처럼 대규모로 인문학을 배운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면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두 달은 성과를 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닻은 올랐다. 적어도 학내에서 역풍을 만날 우려는 없다. 후마니타스 칼리지 출범에는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아들인 조인원 총장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경희대의 실험은 세계적인 흐름에 부합하는 것일까. 우기동 교수는 그렇다고 자신한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인문적 소양이 다시 학문의 첨단으로 복귀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학교의 실험은 다른 대학 교수들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결국 이 흐름을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