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넌 종이책 보니? 난 전자책 본다

전 세계적 열풍 국내에도 상륙… 단말기 속속 개발, 콘텐츠 확충도 활발

전자책 단말기로 독서를 하는 젊은 여성(왼쪽)과 세계적으로 전자책 열풍을 일으킨 아마존 킨들(오른쪽).

전자책 시대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전자책은 기대에 비해 느린 성장세를 유지해 왔다. 종이책 독서의 관성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콘텐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책 단말기의 발달, 콘텐츠 확충 등에 힘입어 몇년 전부터 급성장하고 있다. 올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전시된 책의 40%가 전자책이었을 정도. 국제디지털출판포럼은 세계 전자책 시장 규모가 지난해 19억달러에서 올해 25억달러, 2013년에는 89억달러로 급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전자책 열풍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호재가 작용했다. 아마존의 단말기 킨들의 성공에 힘입어 국내 업계에서도 다양한 단말기를 선보였다. 특히 킨들에 이어 전자책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아 온 애플사의 스마트폰 아이폰이 최근 국내에 시판되기 시작했다. 또 교보문고를 비롯한 인터넷 서점과 통신사들이 무선스토어, 오픈마켓을 열어 만화·장르소설·잡지·학술지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도 내년 초 ‘전자출판 육성진흥방안’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팀(TFT)을 11월에 발족시켰다.

그동안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던 전자책 시장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아마존 킨들이 일으킨 열풍 때문이다. 2007년 말에 출시된 킨들은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사용되는 LCD와 달리 장시간 독서를 해도 눈이 피로하지 않도록 한 전자잉크 방식의 패널과 저전력 배터리 기술을 채택했다. 이 제품은 359달러(약 60만원)의 높은 가격에도 전 세계에 100만대 이상 팔려 나갔다. 아마존은 킨들 출시에 맞춰 27만여 권의 전자책을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아이폰 돌풍도 전자책 확산에 한 몫
킨들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국내 업계에서도 잉크단말기 제품 개발에 들어가 속속 신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교보문고와 제휴해 지난 7월 SNE-50K(일명 파피루스)를 선보였고, LG디스플레이는 태양전지기술을 이용한 솔라 e북 출시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 지난 9월에 나온 아이리버의 스토리를 비롯해 네오럭스의 누트2, 서전미디어텍의 옴니북 등이 가세함으로써 제품군이 다양해졌다. 지금까지 국내에 보급된 전자잉크 단말기는 10만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용 단말기 이외에 휴대전화도 전자책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다. 손 안의 작은 컴퓨터로 불리는 아이폰은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면서 5700만대가 팔려 나갔다.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소비자들이 직접 어플리케이션(모바일용 프로그램과 콘텐츠)을 사고 팔 수 있는 오픈마켓 앱스토어를 지난해 7월에 개설한 이래 지금까지 15억건의 다운로드, 거래총액 15억~20억달러를 달성했다. 주목할 점은 앱스토어의 경우 전자책의 다운로드가 게임·음악·영상물 등 전통적인 인기 아이템에 비해 훨씬 많다는 점이다. 아마존과 반스앤드노블 등 주요 서점이 콘텐츠를 제공하고 구글북, 피드북,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등 무료로 텍스트를 제공하는 웹사이트가 연계되면서 현재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전자책은 100만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아이폰이 출시된 이후 3년간 수입을 막아왔으나 11월22일 KT가 전격 수입, 판매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자책 관련 업계는 아이폰의 반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킨들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주 사용층이 아직도 종이책에 익숙한 중장년층이라는 점에서 실패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폭풍을 불러들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업계는 아이폰이 출시되면 100만대 가량의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측해 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형 통신사들도 앱스토어를 본뜬 오픈마켓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KT는 12월경 전자책 및 모바일 콘텐츠 오픈마켓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SK텔레콤 역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오픈마켓인 T스토어를 운영하는 데 이어 단말기 업체 네오럭스와 제휴해 전자책 오픈마켓 서비스를 시작한다.

교보문고, 내년에 무선 스토어 오픈
단말기의 개발에 맞춰 콘텐츠 준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교보문고는 내년 초부터 삼성전자의 SNE-50K와 아이리버의 스토리 등 두 종류의 전용 단말기를 이용해 전자책, 오디오북, 전문자료, 코믹, 도서요약, 신문, 연재, 잡지 등의 콘텐츠를 곧바로 다운로드해 열람할 수 있는 무선 스토어를 선보일 예정이다. 교보는 전자책 독자들이 선호하는 엔터테인먼트 장르를 강화하기 위해 국내와 일본의 만화, 라이트 노벨 등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한편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장르소설 회원제 서비스를 단말기까지 확대한다. 또 자체 기획한 전자책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국 흥행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극본을 작가의 코멘트 및 스틸 이미지컷과 함께 구성한 ‘라이터즈 컷’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이 밖에 과학분야 잡지와 여행가이드, 학술전문 전자책, 월간·연간 단위의 주요 도서 요약본 등을 서비스한다는 계획이다.
인터파크, 예스24,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도 전자책 유통사업에 나서고 있다.

인터파크는 교보문고와 비슷한 형식으로 내년부터 자체 단말기를 통해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지난 여름 업계를 대상으로 전자책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예스24와 알라딘은 중앙일보, 비룡소 등과 연합해 한국e퍼브란 회사를 출범하고 전자책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웅진출판그룹의 자회사인 도서유통업체 북센은 연말부터 아이폰 앱스토어를 통해 전자책 오픈마켓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출판계도 전자책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전자책 도입 초창기에 120개 출판사가 자본금을 모아 설립한 전자책 출판사인 북토피아는 신간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결제시스템, 저작권 보호 등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경영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러나 최근 전자책 붐을 타고 김영사, 더난, 문학과지성사, 시공사, 푸른숲 등 40여 개 출판사가 지난 8월 전자책 콘텐츠 관리회사인 한국출판콘텐츠(KPC)를 설립했다. 또 50여 개의 1인 출판사와 중소출판사들이 디지털출판협동조합이란 연합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창비의 경우 자체적으로 미디어창비란 자회사를 만들어 오디오북 등 전자책을 제작한 뒤 도서관, 학교, 공공기관, 항공사 등에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민음사도 교보문고, 삼성전자, SK텔레콤과 제휴해 10만권을 전자책으로 서비스할 예정이다.

새 수요 창출, 출판시장 파이 키워야
이처럼 전자책의 공급이 늘어나면서 시장 확대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한국전자출판협회는 전체 출판물 가운데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내년의 5%에서 2011년 10%, 2012년 19%, 2014년 38% 등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액수로는 올해 5780억원에서 2010년에는 1조600억원의 시장 규모가 2012년 2조 3800억원(인터파크, 교보문고 추산)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장기영 협회 사무국장은 “1997년에 4조원 규모이던 출판시장이 지난해에는 2조5000억원으로 감소했다”면서 “종이책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휴대전화 문자, 인터넷 페이지뷰 등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독서는 급증하는 만큼 이런 수요를 전자책으로 흡수한다면 출판계의 만성적인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전자책이 출판시장의 전체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하려면 기존 종이책과는 다른 수요 및 공급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의 출판사 수는 3만개를 돌파했으나 책을 한 권이라도 낸 곳은 2777개(8.7%)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500개사가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한다.

이는 종이책의 제작비와 물류비 부담이 커서 대부분의 출판사가 출판 자체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데다 책을 내더라도 연 100권 안팎의 소규모로 팔리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전자책이 보편화할 경우 발행 부수가 적은 책, 절판됐으나 수요가 있는 책,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운 책 등을 내는 일이 쉬워질 전망이다. 나아가 한 번 보고 말 책은 전자책으로 보고, 소장가치가 있는 책은 종이책으로 내는 식으로 출판 관행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전자책이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형 출판사나 인터넷 서점, 이동통신사 등 콘텐츠 유통회사들이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도서유통 체계에 큰 변화를 일으킨 인터넷 서점의 경우 오히려 출판시장을 위축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출판사와 서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서할인율을 지나치게 높이면서 정가제의 근간을 흔들고, 서점유통망을 위축시켰으며, 팔리는 책과 안 팔리는 책의 양분 구도가 심화하는 한편 책의 수명이 단축되는 등 문제점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전자책이 업계의 규모를 키우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 살 깎아 먹기가 아니라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해 전자책 시장을 신규로 창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저자 1인 출판사 시대 온다

미국의 공포소설 작가 스티븐 킹은 전자책의 역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2003년 그가 <총알 차 타기>란 신작소설을 인터넷에 발표해 이틀만에 4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뒤 그의 전속 출판사인 사이먼앤드슈스터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랜덤하우스, 타임워너 등이 전자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올해 초 킨들을 거부하는 영문학 강사가 킨들을 사용하면서 신비한 세계를 경험한다는 내용의 중편소설 <Ur>를 아마존을 통해 킨들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 작가들 사이에서도 인터넷에 작품을 발표하는 게 유행이다. 박범신의 <촐라체>가 첫 인터넷 소설로 블로그 연재를 한 데 이어 신경숙·황석영·김훈·공지영 등 정상급 작가들이 종이책에 앞서 인터넷에 초고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재가 실제 판매보다 사전 마케팅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장르소설은 사정이 다르다.

‘문학성 높은 소설’ 아니면 ‘잘 팔리는 소설’에 치우친 종이책 시장에서 늘 서자 취급을 당하는 장르소설의 경우 전자책으로 터전을 옮겼다. 북토피아, 바로북, 교보문고 등 선발 업체들이 확보한 전자책 가운데 장르소설의 비중이 가장 크다. 유영신 교보문고 디지털컨텐츠사업팀 파트장은 “장르문학 커뮤니티 또는 개인작가와 접촉해 7300권의 전자책을 확보했다”면서 “다운로드 비용의 절반을 저자에게 돌려준다”고 전했다. 장르문학의 성공은 다른 자기계발, 경제경영 분야의 ‘비인기 저자들’로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한편 전자책이 출판사 창업을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높다. 한국전자출판협회는 올해 9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창업강좌를 처음 실시한 결과 100여 명이 몰리는 성황을 이뤘다고 밝혔다. 전자책 출판사로 새로 등록한 곳도 50여 개에 이른다. 장기영 사무국장은 “보석가공처리, 디자인, 건축설계 등 전문적이면서 수요가 적은 책이 전자책으로 나올 것”이라면서 “다양한 관심사와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개인들이 자본 없이 출판업에 뛰어들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