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탐색]세상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정성일(글) 정우열(일러스트) 지음·바다출판사·2만3000원

50년 후 누군가 한국 영화저널리즘의 역사를 기술한다면, 그는 1995년을 위한 장을 따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1995년은 한국 영화저널리즘의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 해에 주간지 <씨네21>과 월간지 <키노>가 한 달 간격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국 영화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창간된 두 잡지는, <키노>가 2003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한국 영화저널리즘과 영화비평의 황금시기를 일구었다.

두 잡지는 너무나 달라서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뤘다. <씨네21>이 대중을 겨냥했다면 <키노>는 영화광을 겨냥했다. <씨네21>의 기사가 가독성 높은 표준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었던 데 비해 <키노>에 실린 글들의 문체는 난삽하면서도 개성적이었다. <씨네21>이 영화가 교양이 된 시대를 맞은 대중들의 지적 장신구였다면 <키노>는 영화광들의 교과서였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그 ‘교과서’의 산파인 평론가 정성일씨의 첫 평론집이다. 저자의 평론은 난해하면서도 중독성 강한 문체로 수많은 팬을 양산했다. 그의 글은 친절하지 않다. 가령 그가 “우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한 경우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 혹은 (알튀세에 의하면) 1857년의 마르크스. 그리고 물론 베르디. 또는 밥 딜런. 어쩌면 몬드리안. 항상 피카소. 여기에 1979년의 고다르가 있다”고 쓸 때, 평범한 독자들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시작해 고다르에서 끝나는 고유명사들의 대열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그가 거명한 철학, 음악, 미술의 거장들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들이 이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생각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은 영화를 대하는 그의 자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치열함에서 나온다.

저자에게 영화는 분석하거나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기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화면과 이야기에만 매달려” 영화에 빠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본 영화를 보고 다시 보아야” 하며 “자꾸만 생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사로잡은 영화가 어떠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품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수준으로까지 생각을 밀고나가야 한다. 자신이 본 영화의 편수를 자랑하거나 남들이 보지 않은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영화광들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신간 탐색

거의 초인적인 정열로 영화비평 작업을 수행해온 저자에게 영화보기의 원초적 쾌락을 선사한 최초의 영화는 무엇일까. 저자의 고백에 따르면 그것은 1970년대 홍콩 무협영화의 거장 장철의 작품들이다. 그는 장철의 영화에 매료됐던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하는 글에서 “때로 어떤 글은 평생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렇다”고 썼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고나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질지 모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