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 그 섬뜩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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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가사에서 느껴지는 따스하고 정겨운 고향 풍경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는 ‘무릉도원’이나 ‘몽유도원도’에서 연상되는 평화롭고 초월적인 이미지를 상상할 것이다. 또 ‘도화살’로 이어지는 농염한 매력과 바람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사카구치 안고 원작, 조광화 재창작·연출의 <됴화만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의 ‘복숭아꽃’을 만날 수 있다. 

연극 ‘됴화만발’ /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됴화만발’ / 남산예술센터 제공

우리 시대 가장 도발적인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작가 조광화는 복숭아꽃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단숨에 뒤엎으며 특유의 강렬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무대를 채워나갔다.

<됴화만발(桃花滿發)>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에서는 ‘복숭아꽃’이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죽음과 고독이 서린 섬뜩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됴화만발>의 비극은 2000년 전, 무릉도원을 찾아 나선 진시황의 의원과 3000의 동남동녀(童男童女)들로부터 시작된다. 3000의 아이들을 영생의 실험대상으로 삼은 의원은 결국 자신이 실험으로 만들어낸 괴물 케이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이들이 죽을 때마다 한 그루씩 심은 복숭아꽃 나무는 거대한 숲을 이루게 된다. 

이후 극의 주요 사건들은 모두 이 복숭아꽃 만발한 숲 속에서 일어나며, 주인공 케이는 해마다 봄이 돌아올 때면 화사하게 필 복숭아꽃을 생각하며 몸서리친다. 영생을 위해 죽어간 아이들의 원혼이 봄마다 복숭아꽃을 통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복숭아꽃은 스토리를 넘어서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사하게 피어났다가 한 순간에 확 져버리는 복숭아꽃은 동양에서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상징하는 무릉도원의 복숭아꽃 이미지와 대비되면서 ‘순간과 영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찰나의 삶처럼 무대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인물들과 영겁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검객 케이의 삶이 이 같은 양면적인 이미지에 겹쳐서 드러나는 것이다.

연극 ‘됴화만발’ /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됴화만발’ / 남산예술센터 제공

한편, ‘도화살’이란 말도 있듯, 복숭아꽃은 예로부터 관능과 욕망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복숭아꽃의 이미지가 <됴화만발>에서는 케이의 연인 ‘단이’란 캐릭터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극중 단이는 무서울 만큼 화사한 미모를 지녔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잔인함을 지닌 여인으로 등장한다. 처음엔 주인공 케이도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단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욕망에 지친 나머지 결국 자기 손으로 그녀를 죽이고 복숭아꽃 만발한 숲에서 극한의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이렇듯 아름답지만 섬뜩한 복숭아꽃의 이미지는 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됴화만발>의 무대 위에는 화사하게 피어난 복숭아꽃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간혹 배우들이 들고 나오는 작은 복숭아꽃 가지가 보여지는 것이 전부다. 이 작품에서 복숭아꽃은 관객을 시각적으로 자극하는 무대 장치가 아니라, ‘죽음’과 ‘고독’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남산예술센터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화려한 꽃잎이 아니라 ‘흙’의 이미지다. 주인공 케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배우들은 전신에 흙을 칠한 채, 무대 위아래를 드나들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들 지하 세계의 인물들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진시황릉의 진흙 인형(병마용)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복숭아꽃’과 ‘흙’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해 의미와 효과 면에서 모두 강렬한 인상을 끄집어낸 조광화의 감각이 돋보이는 무대다. 9월 6~25일, 남산예술센터.

김주연<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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