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굴곡진 우리 현대사 평전

‘평전(評傳)’이란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를 뜻한다.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백하룡 작, 박근형 연출의 연극 <전명출 평전>은 제목이 뜻하는 바 그대로 전명출이란 한 사내의 일생을 평자(評者)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는 이 전명출이란 사내가 살아온 인생역경 속에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평자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전명출 평전>

먼저 전명출의 인생을 살펴보자. 농촌에서 영농후계자의 꿈을 키우며 순박하게 살아가던 전명출은 1970년대 불기 시작한 산업화 바람에 떠밀려 마늘 한 접을 훔치다 멍석말이를 당한다. 분노와 무력함에 술만 마시던 어느날, 기적 같은 ‘계시’를 받은 전명출은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남긴 채 고향땅을 떠난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시작한 전명출은 ‘합천’ 출신에 ‘전’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십장에 발탁되어 ‘전 장군’의 친척을 사칭한 사기행각에 이용되고, “전 장군님처럼 정의롭게 살고 싶다”고 반기를 들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연극<전명출 평전>

삼청교육대를 다녀온 뒤 전명출은 다른 사람이 된다. ‘정의’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그는 건설사업에 뛰어들어 공사 자재를 빼돌리는 방식으로 든든히 한몫 챙긴다. 때마침 80년대의 건설 호황과 부동산 열풍이 더해져 떼돈을 벌지만, 곧 부실공사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이에 명출은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90년대, 풍요와 야합의 시대 속에서 명출은 땅 투기와 불륜 등을 일삼으며 그야말로 ‘금수’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IMF사태가 터지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던 명출은 10년 뒤 롤렉스 금딱지 시계를 차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4대강 사업을 빌미로 가족과 친구에게 사기를 치다 자신이 만든 가축우사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듯 전명출이란 한 사내의 파란만장한 인생에는 중요한 고비마다 우리 현대사의 장면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새마을운동부터 시작해 제5공화국과 6공화국, 문민정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낸 전명출은 5060세대의 또 다른 이름이자 그 자체로 굴곡의 역사를 지나온 대한민국의 자화상인 것이다.

박근형 연출은 이러한 의미를 이야기뿐 아니라 무대를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전명출 평전>의 무대 바닥은 온갖 신문기사들의 헤드라인으로 스크랩되어 있다. 박 대통령 서거, 범죄와의 전쟁, 삼풍백화점 붕괴, IMF사태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명출의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 바로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또, 그 위에 세워진 무대 세트는 얼기설기 올려놓은 공사판 현장을 연상시킨다. 이는 전명출이 새 인생을 시작한 장소였던 건설현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채 졸속으로 지어진 대한민국의 현 모습을 상징한다.

문화내시경

한편, 이 작품에는 첫 장면부터 ‘평자’가 등장해 전명출의 일대기를 담담한 태도로 객석에 전달한다. 극중 평자는 바로 전명출의 딸 광옥이다. 여기서 광옥은 아버지처럼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진 않았지만, 이 모든 세월을 지켜보며 함께 살아온 시대의 증인이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늘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은 광옥의 모습은 결국 5060세대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명출의 인생역경과 씁쓸한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7월 29일까지 남산예술센터.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