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나라당 개혁세력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은 죽었다”

상임위장 경선 패배 이후 영향력 급격히 퇴조
당내 절반 넘는 초·재선 소장파 목소리도 실종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당 지도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우철훈 기자>

여당인 한나라당이 조용하다. 18대 국회에 들어서면서 당내 내부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잦아 들었다. 거의 침묵에 가깝다. 소속 의원 172명 중 절반이 넘는 91명이 초선이지만 초선다운 목소리를 내는 의원은 보이지 않는다. 17대 국회 때 한나라당 소장파의 모임인 수요모임에 속했던 정문헌 전 의원은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소장세력이 다 죽었다”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쇠고기 정국에서 이때쯤이면 소장파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 전 의원의 설명이다.

소장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의 영향력이 당내에서 급격하게 퇴조했다. 8월 19일 상임위원장 경선에서 남경필·정병국 의원이 패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원내 지도부가 외교통상통일위원장 후보로 낙점했던 남 의원은 이에 반발한 박진 의원에게 패배, 상처를 입었다. 정 의원은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후보에 낙점된 고흥길 의원에 도전했다가 큰 표 차이로 떨어졌다.

당 내부에서는 남·정 의원의 패배를 개혁·소장파의 위축으로 해석하는 것과, 다른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으로 평가가 엇갈렸다. 중립이나 소장 개혁에 가까운 인사들은 상임위원장 경선을 소장파의 몰락과 다른, 별개의 사안으로 보았다. 초선인 김성식 의원은 “이번 상임위원장 경선은 남·원·정에 대한 의식이 반영된 투표가 아니다”라며 “남 의원의 경우 표차가 5표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같은 소장파에 속하는 한 의원은 “소장파가 패배했다기 보다 외교통상통일위원회라는 전문성 면에서 박진 의원이 남 의원을 앞섰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여기에다 두 가지 원인을 추가해 설명했다. 남 의원이 총선 전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주도해 SD(이상득)계의 견제를 받은 점, 지난해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박근혜 전 대표계의 미움을 산 점을 지적했다.

“너무 설친다” “재집권 공신” 엇갈려
당사자인 ‘남·원·정’ 역시 상임위원장 경선과 소장파 세력 축소는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남 의원은 “남·원·정이 위축됐다는 것은 사실이나 경선과는 관련이 없고 내 개인적으로 모자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희룡 의원은 “이번 경선을 소장파의 몰락이라고 한다면 의미를 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정 의원이 당내 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간 것이 아닐 뿐더러 소장파가 결속해 경선에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원 의원의 설명이다.

상임위원장 경선 결과를 개혁·소장파의 위축으로 해석하는 쪽은 대부분 한나라당의 주류인 보수·영남권 인사들이다. 영남권의 한 중진의원은 “예전부터 의원들 사이에는 남·원·정이 너무 설친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고 말했다. 경선 결과를 놓고 16대와 17대 때의 소장파 행보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다. 그동안 보수·영남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주류 측은 남·원·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 세력에 대해 ‘언론플레이만 한다’ ‘당에 대한 자기 희생이 약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긴다’ ‘개혁이란 말만 하고 콘텐츠가 없다’고 비난해왔다.

이런 비판에 대해 남 의원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면서 “애초에 생각했던 초심을 잃지 않고 당 내부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걸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당 지도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우철훈 기자>

남·원·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버릇없는 소장파’라는 비난부터 야당 10년 동안 노력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게 한 ‘공신’이라는 칭찬까지 정반대의 인식이 존재한다. 김성식 의원은 “지난 10년 동안 소장파의 활동에 빛뿐 아니라 그림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변화를 추구하다 보면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는 식의 욕을 먹게 마련”이라고 소장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사자인 정병국 의원은 “과거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소장파가 있었기에 한나라당이 집권까지 가능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남 의원은 “초·재선 때 야당 의원으로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당 내부에서 끊임없이 견제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한나라당 소장파에 대해 쇠고기 정국을 한 예로 들었다. 이 인사는 “쇠고기 정국 때 TV토론에 매번 원희룡 의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민주당에서는 한나라당에서 아예 다른 의원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요구한 적이 있다”면서 “어려울 때 주류인 영남 쪽 의원들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고 소장파 의원을 내세워 위기를 모면한 후 밥그릇 싸움에서는 소장파를 비주류로 몰아내는 것이 한나라당 주류의 인식”이라고 꼬집었다.

상임위원장 경선 결과에 관계없이 남·원·정을 비롯한 소장파의 세력 위축은 한나라당 안팎에서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남·원·정에 속하는 측에서는 “어차피 예전에도, 지금도 비주류이긴 마찬가지”라는 자조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표방했던 한 의원은 “소장파가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대부분 이명박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것이 세력 위축의 길로 접어든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남 의원은 “이미 지난 대선 경선 때부터 세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라면서 “한나라당이 여당이 되면서 소장파의 역할이 바뀐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여전히 칼날을 세우고 있는 의원은 원 의원이다. 원 의원은 쇠고기 정국에서뿐 아니라 건국절로 명칭 변경 시도, 광복절 특사, KBS 사장 교체 강행, 외교라인 혼선 등에 대해 ‘나홀로’ 비판에 나섰다. 남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주도했다가 이후 조심스런 행보를 해왔다. 정 의원은 대선 당시 홍보기획본부장으로 큰 활약을 펼친 만큼 이명박 정부에 대해 직접 ‘쓴소리’를 하기에는 제약을 안고 있다.

원희룡 의원만 나홀로 비판 나서
이제 남·원·정은 초·재선이 아닌 3·4선으로 이미 당의 중진급 의원이 됐다. 16대 미래연대에서, 17대 수요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세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성격을 좌우할 기로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남 의원은 “이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내는 시점에 온 것 같다”며 “이제 반대의 목소리는 초·재선에서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뀐 만큼 이제는 우리가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요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국가의 위상을 올리는 일에 열정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원 의원은 “이제 소장파라는 명칭보다 개혁파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남·원·정이 3선 이상의 중진급 의원이 됐지만 뒤를 이를 초·재선 소장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6대 때 미래연대, 17대 때 수요모임으로 대표되는 소장파 그룹이 존재했지만 18대에서는 아직 그룹이 형성될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미래연대와 수요모임에서 활동했던 권영세 의원은 “한나라당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뀌면서 소장파의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원 의원은 “여당이 된데다 집권 초기이기 때문에 일단 새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소장파의 그룹 형성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청와대가 의회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초선의원이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 측은 “이제는 한나라당에서 의원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바뀌었다”면서 “외부에서 개혁 세력을 수혈했을 때는 자연스럽게 소장파 그룹이 형성됐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정문헌 전 의원은 “한나라당은 원래부터 여당 체질인데, 실제 여당이 되면서 소장파의 목소리가 필요 없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남·원·정 의원은 초선 소장파 그룹의 등장에 대한 기대를 표시했다. 남 의원은 “소장파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면서 “알기로는 몇몇 그룹이 수면 위는 아니지만 정치 개혁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남 의원은 또 “지금은 목소리가 없지만, 5년 후 한나라당이 재집권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여당이 된 상태에서 초선의원들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나름대로 소장파 그룹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 의원은 또 “내부 비판을 두려워하면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는 점을 초선의원들이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의원은 “한나라당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런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면서 “당에는 아직 개혁해야 할 부분이 많으므로 개혁이라는 소신과 방향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초선인 김성식 의원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김 의원은 “여당 내 초선 개혁 그룹이 없다는 것은 질타받을 만한 일이지만 억지로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지금은 시간이 필요하며 필요한 모임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한귀영 연구실장은 “정당 지지율을 분석해보면 소장파의 활동이 정당 지지율과 정비례 관계에 있었다”면서 “소장파의 목소리가 없으면 그 정당은 죽은 정당”이라고 강조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