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사관학교 ‘한예종의 힘’

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 위주 선발·최상의 교수·스파르타식 실험교육으로 인재 배출 괄목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출신이 국내외 예술계를 장악하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뛰어난 성적으로 입상하는가 하면 영화계와 연극계에서도 눈에 띄는 행보를 하고 있다.

지난 9월 24일 영국에서 폐막한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이 학교 음악원 피아노과 3학년생인 김선욱(18)은 이 대회 43년 사상 아시아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 전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10월에는 이 학교 기악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박준호(21)가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지난해에도 프랑스 에피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이 학교 학생인 한상일이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또 김지윤(20)이 독일 이프라 니만 국제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루빈슈타인 콩쿠르에서 손열음(20)이 피아노 3위로 입상하는 등 이 학교의 여러 재학생이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손열음은 2004년엔 뉴욕 필과 협연하고 지난해엔 쇼팽 콩쿠르 결선에도 진출했다. 베르디 콩쿠르 우승자 한명원(바리톤)과 바이올리니스트 민유경, 신현수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각종 국제 콩쿠르 수상 잇달아

이 학교 무용원에 재학 중인 학생의 국제 콩쿠르 수상 소식도 잇달았다. 올해만 해도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 주최 국제 발레 경연대회에서 신승원과 윤전일이 최우수 2인무상을 받았고, 김경식, 홍향기 등 5명이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그동안 클래식 연주나 발레는 해외 유학을 필수 코스로 여겼던 게 사실. 하지만 한예종 학생의 국제무대 성과는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세계적 수준의 연주자 또는 무용수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한예종의 저력을 새삼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다.

졸업생의 면면도 화려하다. 국립발레단의 주축인 장운규와 이원철이 이 학교 출신이다. 해외 유명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무용 스타도 많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서연, 독일 드레스덴 발레단의 안효진, 모나코 왕립 발레단의 한상이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감독으로는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 등을 연출한 정재은,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아랑’의 안상훈, ‘아이스케키’의 여인광, ‘열혈남아’의 이정범, ‘일단 뛰어’의 조의석, ‘신부수업’의 허인무, ‘잔혹한 출근’의 김태윤, ‘내 생애 최악의 남자’의 손현희, ‘파란 자전거’의 권용국, ‘내 청춘에 고함’의 김영남, ‘ing’의 이언희 등이 있다. 영상미가 빼어난 영화 ‘장화, 홍련’ ‘꽃피는 봄이 오면’ ‘외출’ ‘가을로’ 촬영을 맡았던 이모개를 비롯해 제창규(‘비단구두’ 등), 김철주(‘거미숲’ 등), 김병서(‘태풍태양’ ‘새드무비’ 등), 김형주(‘포도밭을 베어라’), 조상윤(‘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 등은 촬영감독, 김현정(‘스캔들’ ‘황진이’), 하준원과 백철현(‘괴물’ 공동시나리오), 김은희와 윤은경(드라마 ‘겨울연가’ 공동 각본) 등은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대학로에서도 한예종의 저력은 확인된다. 요즘 관객 입에 오르내리는 흥행작 상당수가 한예종 출신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 각본과 연출에 이어 뮤지컬 ‘이’ 연출에 나선 김태웅은 이 학교 연극원 졸업생인 동시에 지금은 학교 교수이기도 하다. 연극 ‘인당수 사랑가’를 연출한 최성신, ‘저녁’의 윤형섭, ‘하륵 이야기’ 의 배요섭, 뮤지컬 ‘당신이 잠든 사이’와 ‘김종욱 찾기’의 극본과 연출 장유정, ‘빨래’ 극본과 연출 추민주 등은 만성적인 침체를 거듭하던 대학로에 활기를 넣어주는 인재들이다. 이중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올해 한국뮤지컬대상 수상작이고 ‘빨래’는 지난해 한국뮤지컬대상 대본상을 수상했다.

배우로는 뮤지컬 ‘헤드윅’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오만석을 비롯해 유선, 이선균, 이동규, 김혜나, 이소연 등이 있다.
‘노크하지 않는 집’ ‘달려라 아비’ ‘배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성탄 특선’ 등을 집필,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꼽히는 김애란도 한예종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왼쪽부터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손열음, 작곡가 최명훈.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교육기관

한예종은 1993년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 교육기관이다. 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연극원(94년), 영상원(95년), 무용원(96년), 미술원(97년), 전통예술원(98년)을 설립해 모두 6개 원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는 무용원이 1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 학교의 예술사 과정은 일반 대학의 학부, 전문사 과정은 대학원 과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행법상 ‘각종 학교’로 분류돼 학사 학위는 수여하지만 석·박사 학위는 수여할 수 없다. 현재 재학생 수는 2700명 정도이고, 교수는 140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짧은 기간에 한예종이 이처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던 비결을 실기 위주의 학생 선발, 최정상의 교수진, 현장 중심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꼽고 있다.

한예종은 매년 10월 음악원, 무용원, 전통예술원의 학생을 선발하고, 12월에 영상원, 연극원, 미술원의 학생을 선발한다. 가장 중요한 선발 기준은 학생의 실기 능력. 이 학교 교학처장인 허영한 음악학과 교수는 “수능시험 성적을 중시하는 일반 대학과 달리 한예종은 학생의 실기 능력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수학능력과 창의적 사고력을 중시한다”고 설명한다.

한예종 음악원 입시에는 수능 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 음악원의 경우엔 필기시험이 아예 없다. 1차 시험은 내신(10%), 음악기초이론(10%), 전공실기(80%)로 구성되고 2차 시험은 청음(10%)과 전공실기(90%)만 본다. 반면 영상원이나 연극원, 미술원의 경우엔 언어를 통한 창의력을 측정하기 위해 1차 시험에서 필기를 본다. 미술원의 경우 수능시험과 실기로 합격자를 가리는 일반 대학의 입시와 달리 필기(국어·영어), 실기, 구술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1단계 평가에서 필기(50%), 실기(40%), 고교 내신성적(10%)으로 약 2.5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실기와 구술시험을 50%씩 반영해 최종 합격자를 발표한다. 일정 수준이 안 되면 정원과 관계없이 선발하지 않는다.

음악원과 무용원, 전통예술원에서 이루어지는 ‘영재입학제도’와 ‘예비학교 제도’도 한예종의 강점. 영재입학제도는 고교 졸업 학력이 없어도 대학 입학이 가능한 제도이며 예비학교는 재능 있는 초·중·고교 학생들을 별도로 선발, 주말에 전문 실기 지도를 해주는 제도다. 이를 통해 인재를 미리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권위 있는 국제무대에서 수상한 김선욱과 손열음, 박준호 등 상당수 학생이 예비학교를 거쳐 영재로 입학했다. 반면 영상원, 연극원 등에 지원하는 학생 상당수는 일반 대학 재학 중 또는 졸업 후 오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른 전공을 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맨 위_ 영상원 출신들. 왼쪽부터 박찬옥, 여인광, 정재은, 조의석 감독. 두번째 줄_ 연극원 출신들. 왼쪽부터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연출 민준호, 극단 ‘뛰다’의 부부 연출가 이현주·배요섭,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연출 장유정과 ‘빨래’ 연출 추민주. 소설가 김애란. 세번째 줄_ 왼쪽부터 안무가 김판선, 발레리노 이원철과 장운규, 발레리나 황혜민. <경향신문>

고졸 학력 없어도 영재입학 가능

한예종의 교수진은 정상급이다. 재외 한국인 예술가, 저명한 외국 예술인 등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는 예술가들로 구성돼 있다. 음악원은 올해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한 김남윤 원장을 비롯해 최현수(성악), 임웅균(성악), 김대진(피아노), 정명화(첼로) 등이 교수로 재임 중이다. 영상원 교수로는 이창동 감독, 박광수 감독, ‘내 이름은 삼순이’를 연출한 김윤철 감독, 만화가 박재동씨 등이 포진해 있고, 무용원에는 안성수·남정호, 미술원에는 건축가 민현식, 설치미술가 전수천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통예술원은 교수 대부분이 인간문화재다. 피리 인간문화재인 정재국을 비롯해 판소리의 안숙선, 해금의 정수년, 풍물놀이의 김덕수가 전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모든 교과과정은 학생들의 전공 생산능력의 향상을 위해 편성돼 있다. 주입식 강의는 가능한 지양하고 1대 1 레슨, 그룹별 토론, 전공별 워크숍과 공동제작, 현장실습 등 실기와 프로덕션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예종 출신들은 공통적으로 “실기 중심의 고강도 교육이 현장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연극 ‘3등병’을 연출하는 성기웅 감독은 “일반 연극영화과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는 주로 이론 중심의 교육을 하는 반면 한예종은 직접 작품을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배운다”며 “재학 중 자신의 작품을 여러 편 만들고, 졸업 후 그때 만든 작품을 그대로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그만큼 학생 제작 수준이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예종 미술원 예술사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우경진은 “자기 시간이 전혀 없을 정도로 많은 과제를 내준다”며 “명성 높은 교수님들이 제자들을 혹독하면서도 자상하게 지도해 일반 대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전한다. 톱스타 장동건은 이 학교 영상원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중도 포기했다. 학교에서 재학 중 연예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엄청난 과제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재학 중 연예활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대학원 석박사 과정 설치 과제

김선욱이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데는 서울대와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클리블랜드 콩쿠르에서 1위를 한 실력파 김대진 교수의 지도가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선욱은 한예종에 대해 “음악에 대해 미쳐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예술가로서의 꿈을 가진 학생들에게는 낙원인 셈이다.

그러나 석·박사 학위를 수여하지 못하는 것은 한예종의 숙제다. 한예종은 개교 이후 대학원 설치를 추진해왔으나 다른 대학의 반발로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기존 예술대학측은 문화부의 지원을 받는 한예종이 석·박사 과정까지 갖는 것은 특혜라는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

“학생 잠재력 충분히 존중·지원 최선”

- 한예종 출신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원동력은 무엇인가.

“세 가지가 주된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각 장르에 이른바 마에스트로급 교수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다. 예술교육에 있어서 훌륭한 교수는 좋은 학생들을 모이게 하는 일종의 ‘집어등’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독자적인 학생 선발방식을 통해 잠재력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한 것이다. 특히 음악과 무용은 영재를 조기 발굴해서 최종상급 교수에게 노출시키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매우 집중적이고 실험적인 교과과정을 통해 학생의 잠재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 교육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학생의 내재된 표현 충동을 충분히 존중하고 지원해주는 것은 한예종의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작품 발표를 할 기회가 다른 학교보다 훨씬 많다. 예를 들면 연극원 연출과에 입학한 학생은 졸업 때까지 8번 정도 직접 연출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매학기 충분한 공연을 통해 학생이 바로 현장에 나가더라도 무리가 없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다. 학생 선발과정이나 교육과정에서 다른 대학 교육과 이렇게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한예종이 교육부에 속하지 않고 문화부에 속해 있어 교육부의 이런저런 대학교육의 규정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롭기 때문이다.”

- 어려운 점은 없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한 학생 대부분이 예비학교를 거쳐 영재 입학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가정형편은 넉넉지 않다. 재능 있지만 묻혀 있는 아이들을 조기에 발굴해서 좋은 교수에게 교육받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잠재된 재능이 뛰어나도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하면 그 재능은 그대로 사장될 것이다. 한예종 예비학교의 시간당 레슨비는 8000원에서 1만 원 수준이다. 요즘 내가 기업 쫓아다니면서 요청하는 게 예술 유망주들에게 1대 1 스폰서가 돼달라는 것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국제 콩쿠르에 나갈 때 항공료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업들이 유망주를 지원해주면 좋겠다. 국제 콩쿠르에 나오는 다른 나라의 학생들은 대회에 나오기 전 오케스트라와 협연까지 마치고 온다고 하더라. 그러나 우리는 그럴 형편이 못 된다. 또 얼마나 좋은 악기를 사용해 연주하느냐가 중요한데 우리 학생들은 형편상 최상의 악기를 사용치 못하는 게 현실이다.”

- 졸업 후 학생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지원책은.

“학교에 포스트 매니지먼트 시스템 확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를 위한 다각도의 구상을 하고 있다. 졸업생의 현장 활동 이후의 재교육 프로그램도 고민하고 있다. 졸업생이 학교에 다시 돌아와서 재충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자는 차원이다. 일단 영상원과 연극원은 졸업생들이 학교 공간과 기자재를 빌려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 석·박사 학위를 수여하지 못하는 현 시스템에 불만이 큰 것으로 안다.

“학교가 발전하는 데 제일 큰 장애요인이다. 학위가 한예종의 교육 목표는 아니지만 미술이나 연극, 영화의 경우 4년 공부로는 바로 작가가 되기 어렵다. 상위과정에서의 심화과정이 필요하다. 3년(전문사 과정)에 걸친 강도 높은 교육에 대한 학위를 인정해줘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일반 예술대학들의 주장은 한예종의 설립 취지와 다르니 실기 중심 교육만 하라는 것인데 한예종이 설립될 때 어느 곳에도 비학위 과정의 실기교육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교수진이나 학습공간, 커리큘럼 등 교육여건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통해 학위 수여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향후 학교 발전을 위해 중점적으로 벌일 일은.

“다기다양한 형식의 장르간 크로스오버가 중요하다. 학제 수준에서 과감한 융합교육이 필요하다.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소재, 새로운 콘텐츠의 예술은 장르간 이런 융합과 교류에서 나온다. 하지만 석관동에 있는 다른 원과 달리 현재 음악원과 무용원은 예술의전당 바로 옆, 서초동캠퍼스에 있어 장르와 학생 융합 및 교류에 장애가 되고 있다. 장기적으로 두 개로 나뉘어 있는 캠퍼스를 석관동 캠퍼스에 통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자리한 석관동은 저탄장, 안기부 등으로 인해 어두운 이미지를 가진 문화 사각지다. 이를 한예종 6개 원 통합작업을 발판으로 새로운 문화서식지로 바꾸고 싶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