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영민·선동열 그리고 박찬호

한국야구 100년의 전설…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한반도에 야구가 씨앗을 뿌린 지 꼭 한 세기가 흘렀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는 ‘황성 YMCA야구단’을 만들어 한민족에게 야구를 전파했다. 그해 조선 최초의 ‘뻬쓰볼팀’이었던 YMCA는 선교사들과 역사적인 첫 경기를 가졌다.

YMCA의 원초적인 야구는 도쿄 유학생들과의 교류전을 통해 세련미를 더해갔다.

스타 플레이어도 나타났다. 특히 이영민을 빼놓고 한국야구를 설명할 길이 없다. 경북 칠곡 출신인 이영민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로 불릴 만큼 한국 야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8년 연희전문학교 시절 경성운동장(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경성의전과의 정기전에서 구장 개장 3년 만에 첫 홈런을 토해내며 이름 석자를 천하에 알렸다. 이때부터 장안의 호남아인 그를 보려고 수많은 여성팬이 운집했다. ‘오빠부대’의 원조인 셈이다.

이원용은 한국 야구 투수 1세대

1932년 요미우리신문 주최로 미·일 올스타전이 열렸다. 미국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을 보냈고, 일본 대표팀은 전설적인 투수 사와무라가 주축이 됐다. 이 가운데 이영민도 일본팀에 포함됐다. 그의 기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는 올스타전에서 대주자로만 기용되는 등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에 분노한 이영민은 이후 국가대표 차출을 거부했고, 일본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은행원으로 남았다.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부터 ‘이영민 타격상’을 제정해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한국야구의 투수 1세대를 꼽으라면 1896년 서울 태생인 이원용을 들 수 있다. YMCA에서 투수로 뛰었던 그는 1917년 고려야구구락부를 조직하는 등 한국야구를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데 앞장섰다. 이밖에 한 경기에서 22개 삼진을 잡은 휘문구락부의 한기준, 1935년 국내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휘문고보의 송재경 등이 당대 최고의 투수로 활약했다.

한국야구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섰다. 1963년 제5회 세계아시아선수권 대회는 아직까지 한국야구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조금씩 저력을 키워오던 한국야구는 기적같이 결승전에 올랐고, 상대는 압제의 칼날을 휘둘렀던 일본이었다. ‘극일’을 부르짖는 국민들의 열망이 전국을 뒤덮었다. 한국은 일본을 3-0으로 누르고 사상 처음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김응용은 1회 선취타점을 올린 데 이어 8회 통렬한 중월 2점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고, 신용균은 싱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일본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김응용 32세 나이에 실업팀 감독

김응용은 한국야구 100년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채색돼 있는 인물이다. 1941년 평남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중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내려왔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0년부터 한국운수, 한일은행 등에서 실업선수로 뛰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타격상을 휩쓸었다. 박영길과 박현식은 김응용이라는 거물 뒤에서 2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김응용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한일은행 감독에 오른 뒤 지도자로서도 성공일로를 걸었다. 1983년 해태 사령탑에 올라 이후 9차례나 우승 헹가래를 쳤고, 2002년에는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냈다. 올해는 야구인 최초의 CEO(삼성 라이온즈 사장)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임신근은 1960년대를 상징하는 투수였다. 1968년 경북고 전성시대를 열었고, 1969년 한일은행에 입단한 뒤에도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다.

한국야구는 1960년대 아시아를 정복한 뒤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달콤한 열매는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딸 수 있었다. 김응용 감독이 이끈 대표팀은 미국을 5-4로 꺾고 사상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다. 당시 멤버는 이선희·최동원·김시진(이상 투수), 김봉연·윤동균·김재박(이상 타자) 등이다.

1977년은 김재박을 위한 해였다. 김재박은 한국화장품 창단 멤버로 그해 실업연맹전에서 타격·홈런·타점·도루·3관왕상·신인상·최우수선수상 등 타자부문 7개 타이틀을 독식했다. 역대 최고 유격수로 꼽히는 김재박은 공격과 수비, 주루를 가장 완벽하게 갖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96년 현대의 창단 감독에 오른 뒤에도 ‘여우’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며 명석하고 냉정한 지휘력으로 9년 동안 4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야구는 1982년 잠실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한번 세계 정상에서 포효했다. 김재박은 1-2로 뒤지던 8회 개구리가 점프하듯 펄쩍 뛰어올라 극적인 동점 스퀴즈번트에 성공했고, 뒤이어 한대화가 왼쪽 폴대를 강타하는 대포를 쏘았다. 대회 3승을 올린 선동열은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했다.

스타들 해외 러시와 어두운 그림자

한국야구는 1982년 프로리그가 출범하면서 용틀임한다. 22연승 가도를 달리며 OB를 원년 우승으로 견인한 ‘불사조’ 박철순과, MBC의 감독을 겸하면서 프로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할 타율을 기록한 백인천이 원년 스타로 등장한다.

삼성 이만수와 해태 김봉연은 원년부터 홈런왕을 다투며 초창기 프로야구 팬들에게 홈런의 묘미를 보여줬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해태 김성한, 후반부터는 빙그레 장종훈이 거포 계보를 이어갔다. 마운드에서는 롯데 최동원과 삼성 김시진이 불꽃 같은 피칭으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라이벌 구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팬들은 한국야구의 ‘국보’를 만나게 된다. 1985년 해태에 입단한 선동열은 이듬해 24승, 방어율 0.99를 기록하며 프로야구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시속 150㎞가 넘는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는 한치의 오차가 없었다. 선동열은 1995년까지 8차례나 방어율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한국야구의 전설로 갈무리되고 있다.

1993년 깜짝 놀랄 뉴스가 전해졌다. 무명에 가깝던 한양대 박찬호가 LA다저스와 계약한 것이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성공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자 한국야구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1996년 선동열에 이어 1998년 이종범도 일본무대에 섰다. 이후 조성민, 정민철, 정민태 등이 요미우리, 구대성이 오릭스로 떠나며 스타들의 일본행이 줄을 이었다. 슈퍼스타들이 일본으로 떠나는 동안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추신수 등 아마추어 유망주들은 꿈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그와 일본에 여러 선수들을 수출하면서 다시 한번 도약기를 맞았다. 한국야구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정상에 올랐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스타들의 해외 러시와 국제대회 입상은 한국야구의 위상을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프로야구에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종범이 1994년 타율 3할9푼3리, 196안타, 84도루를 기록하며 ‘야구의 모든 것’을 보여준 뒤로는 뚜렷한 스타가 나오지 않았다. 선동열에 이어 이종범까지 일본으로 떠나자 국내야구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그라졌다.

침체에 빠졌던 한국야구를 삼성 이승엽이 구해냈다. 그는 23세이던 1999년 한시즌 최다 기록인 54홈런을 뿜어내며 맥이 빠져 있던 한국야구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국민타자’로 추앙받던 이승엽은 2003년 세계 최연소 통산 300홈런과, 한시즌 아시아 최다기록인 56홈런을 때려내면서 다시 한번 팬들을 열광케 했다.

해외의 Made in Korea 열풍

박찬호(32)는 한국야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다. 그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선수가 없고, 그만큼 온 국민을 열광시킨 인물이 없다.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시절인 1993년 LA다저스와 계약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임선동, 조성민 등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계약금 120만달러란 파격적인 조건으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했다.

박찬호는 2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뒤 96년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한다. 1997년 선발진에 합류, 14승을 거두며 한반도를 들끓게 했다.

박찬호는 2001년까지 매년 10승 이상을 거두며 빅리그 정상급 투수로 성장했다.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자긍심을 심어주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찬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면서 5년 총액 6500만달러를 받는다. 우리 돈으로 7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그러나 허리 부상에 시달리더니 텍사스에서 3년 동안 14승에 그쳐 팀과 언론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있다.

김병현(26)도 박찬호 못지않게 많은 화제를 뿌린 선수다. 그는 성균관대 시절인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 중국전에서 8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며 빅리그 스카우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병현은 이듬해 계약금 200만달러의 특급 대우를 받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한 뒤 2000년부터 애리조나의 주전 마무리로 발돋움했다. 20대 초반이던 그가 2002년까지 보여준 세이브 행진은 메이저리그 연감을 뒤져봐도 찾기 힘들 만큼 놀라운 페이스였다.

김병현은 2001년 뉴욕 양키스와 겨룬 월드시리즈에서 유명스타가 됐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홈런을 3방이나 얻어맞고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애리조나가 월드시리즈 패권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김병현은 120년 빅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불운한 선수가 됐을 것이다.

이후에도 김병현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녔다. 강한 개성과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팀에서 여러번 오해를 샀고, 결국 2003 시즌 도중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됐다. 김병현은 보스턴에서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며 점점 입지가 좁아졌고, 올시즌 전력에서도 제외될 위기에 몰렸다.

최희섭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타자다. 1999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 새미 소사의 대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다가 2003년 경기중 뇌진탕 부상을 입어 페이스가 떨어졌다. 2004년 플로리다로 트레이드됐고, 시즌 중 LA 다저스로 옮겼다.

이들 외에도 서재응(뉴욕 메츠), 김선우(워싱턴 내셔널스) 등 모두 9명이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에 섰다. 구대성은 올해 35세의 나이에 늦깎이로 올시즌 메츠에 입단했다.

프로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모두 일본을 택했다. 1996년 해태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출신 스타들이 하나둘씩 현해탄을 건넜다. 아마추어 출신으로는 1996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조성민이 유일했다.

1998년 해태 이종범과 LG 이상훈이 주니치로, 이듬해 한화 정민철과 2000년 현대 정민태가 요미우리로 떠났다. 2001년에는 한화 구대성이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에 입단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던 삼성 이승엽도 2004년부터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뛰고 있다.

일본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선동열이 1997년과 1998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일본에서도 최고 수준의 피칭을 했을 뿐, 대부분 2군에서 머물다 고국으로 돌아왔다. 구대성과 이상훈 정도만 기대만큼의 활약을 펼친 뒤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김식 스포츠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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