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인혁당 실체, 이제는 말한다”

전국적인 연락체계 민청학련에 영향… ‘민주화운동 탄압 사건’으로 재조명

2차 인혁당 사건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확정판결 후 20시간 만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국내외 인권단체로부터 ‘유신시대 최악의 공안날조 사례’로 꼽혀왔다. 당시 재야 법조계는 이를 ‘사법살인’으로 규정했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유신 최악의 공안날조 사례

그 후 30여년 동안 당사자와 가족,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회장 이철), 천주교 인권위원회 산하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정현, 이하 인혁당대책위) 등 관계자와 관련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해 주로 억울하게 희생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왔다. 때문에 인혁당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활동한 게 없으며,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관련자 사이에 이들의 활동과 민청학련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규명,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여간 복역한 전창일 통일연대 상임고문은 지난 4월 발간된 ‘실록·민청학련4, 1974년 4월’(학민사)에서 인혁당 관계자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증언하면서 “지금까지 덮여 있던 진실, 즉 ‘인혁당과 민청학련은 관련이 없다’에서 ‘관련 있다’고 밝히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관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이러한 기류를 주도하는 측은 지난해 12월 발족한 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정화영, 이하 진상규명위)다. 재경 대구·경북민주동우회(회장 성진용) 산하에 설치된 진상규명위는 이런 취지를 담아 지난 7월 21일 ‘인혁당, 그 진실을 찾아서’라는 증언집을 출간했다.

반국가단체 아닌 인맥관계

대구·경북지역 민청학련·인혁당 관계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활동은 최근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과 궤를 같이 한다. 그동안 피해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인혁당의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혁당의 ‘진실’이란 그들이 민주화에 기여한 활동을 말한다.

진상규명위가 탄생한 계기는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안국동의 고(故) 윤보선 전 대통령 댁에서 ‘실록·민청학련3, 1974년 4월’(학민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화영 위원장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 관계자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인혁당 관계자는 공권력에 항거한 흔적이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경북대 재학시절이던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1973년 11·5 반유신데모를 주도하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5년 석방 후에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재구속, 6년간 복역했다. 민청학련 경북대 책임자로서 대구지역 인혁계 선배들의 지도를 받는 등 그들과 긴밀한 연계활동을 벌인 그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래서 대구·경북지역 민청학련·인혁당 관계자들을 규합해 만든 것이 진상규명위다. 더 이상 피해자에 머물지 말고 그들이 민주화에 기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밝히자는 것이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당시 인혁당이나 인혁당 재건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서클 형태의 전국적인 연락체계는 존재했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서가 아니라 인맥관계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구축돼 있었다는 얘기다. 사형집행된 인혁계 인사는 주로 4·19혁명 직후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조직운동을 벌였던 진보인사임은 이미 알려진 바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은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우홍선은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의 중심 인물이었고, 송상진은 교원노조, 이수병은 경희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 김용원은 서울대 민통련에서 활동했다. 민청학련 관계자로 유일하게 사형집행된 여정남은 경북대 6·3시위를 주도한 전력이 있었다.

정화영 위원장과 전창일 고문, 역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9년간 복역한 강창덕 민자통 대구경북회의 고문 등은 ‘인혁당, 그 진실을 찾아서’에서 인혁계 인사들의 민주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정 위원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도화선이 된 1973년 경북대 11·5시위 때 사용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은 서도원이 작성한 것이었으며, 전달자는 여정남이었다고 증언했다. 1974년 1월 초 여정남과 함께 대구 성당못 뒤 하재완 자택을 찾아간 이야기, 투쟁 방법을 놓고 논쟁하다 폭력사태로까지 번진 ‘이재문 염소목장 사건’도 소개했다.

강 고문은 민청학련 사건이 불거지기 직전인 1974년 1월 이재문 등과 함께 유신반대 전선조직을 결의하고 ‘참소리’라는 지하신문을 제작했던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당시 서도원·도예종·송상진·하재완 등은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유신반대 사업을 전개했다고 증언한다. 전 고문은 1974년초 서울 충무로에 지압교실로 위장한 사무실을 내고 우홍선·이수병·이성재 등과 학생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구에서 상경한 여정남을 지원하기 위해 극비리에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학생운동 관계 작업은 이수병과 김용원이 맡고 모금된 돈은 이수병에게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민주진영조차 편견과 오해

민청학련·인혁당 관계자들의 당시 활동을 액면 그대로 밝히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형당한 8명의 유가족이나 말못할 고초를 겪은 당사자로서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안사건은 여전히 사회적 편견이나 오해의 소지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정 위원장도 “인혁당에 관한 한 민주진영에서조차 유신적 사고로 보고 있다”며 “아직까지 유신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진상규명위가 구성되고 적극적으로 진실을 규명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진상규명위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진실위) 등에 인혁당 부분을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증언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 ‘라디오21’ 등 매체를 통한 진실 알리기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추모 및 계승 사업, 재심 재판 등 이제까지 해온 활동에도 빠지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재개된 2차 인혁당 사건 재심 심리도 집단방청했다. 이 자리에는 정 위원장과 강창덕·전창일 고문을 비롯한 진상규명위 관계자와 유가족, 문정현 대책위 위원장, 유인태 의원,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민청학련·인혁당 관계자 50여명이 참석했다.

인혁당이 재심을 통한 법적 명예회복과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는 역사적 명예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화영 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우리는 반유신운동을 했을 뿐이다”

“이제까지는 ‘인혁당 사건은 억울하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러다 보니까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한 부분은 그것대로 인정하고 억울한 점도 밝히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와 인혁당대책위가 있지만 나름대로 한계가 있으니 대구·경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좋다고 봤다.”

-개인적으로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몸도 빚졌고 마음도 빚졌다. 인혁계 선배들은 학생인 나를 끝까지 보호했다. 그래서 죽었는데 나는 그분들의 뜻을 올바르게 이어받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들은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민중적 입장에서 민족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인혁계 인사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지적은 많지만 민주화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서울에서는 잘 모를 수 있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 선생이 여정남 선배를 서울에 보내 이수병·김용원·우홍선 선생과 연결했다. 감추려고 한 부분도 있었지만 내막을 몰라서 드러나지 않은 점도 있다.”

-인혁당이 비록 당명과 조직체계는 갖추지 않았어도 ‘활동’은 있었다는 말인가.

“1차 인혁당이 없었기 때문에 2차도 당연히 없었다. 소위 인혁계 선배들 간에 대구·부산·광주·서울 등 전국적인 연락체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총련과 같은 조직은 아니지만 인맥관계로 연결돼 있었다. 그런 부분이 있었을 뿐이지 인혁당은 없었다.”

-이념적으로 너무 앞서간 것 아닌가.

“국정원 진실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오충일 위원장이 ‘인혁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던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대중운동이란 대중의 요구를 한발짝 앞서가는 것이지 열발짝, 스무발짝 앞서가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반유신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말하니까 수긍했다.”

-일반인도 그렇게 이해하리라고 보는가.

“어려운 얘기다.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인혁당에 대해선 아직 유신적 사고를 갖고 있다. 조직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유신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 인혁계 선배의 생각은 반유신·반독재였다. ‘민주헌법 제정’으로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 거기에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논란은 아직 진행형이다. 어떻게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조명

“1차적으로 진상규명과 더불어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국정원에서 고문 조작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
대법원에서는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신 재판부’라고 공격할 것이다. 재심을 받아들여 결론을 낸 뒤 대법원도 사죄해야 한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