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김윤규, 대북사업 무대서 ‘퇴장’

도덕성 흠집 남기고 주도권 싸움서 패배… 현정은 회장 ‘홀로서기’ 자신감

이에 대해 재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윤규 부회장 사이에 잠복돼 있던 ‘알력’이 표면화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가운데 향후 대북사업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조만간 현대아산 이사회를 열고 김부회장의 거취 문제를 공식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면서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는 대신 부회장으로 대북사업을 돕게 하자는 것이 현정은 회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현대그룹은 지난달 초 실시한 현대아산 내부 감사에서 김부회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할 수 없지만 일부에서 부풀려진 것처럼 리베이트를 받았다거나 공금을 횡령한 정도의 비리는 절대 아니다”면서 “금강산 온정각 시설 분양에 개인자격으로 관여하는 등 일부 절차상의 문제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현대그룹은 정기감사라고 밝히고 있지만 첫 감사대상을 현대상선 등 주력 계열사가 아닌 현대아산으로 잡은 점은 현회장과 김부회장 간의 파워게임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현회장은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2003년 10월에 그룹 대권을 넘겨 받아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모체가 대북사업에 집중된 이상 김부회장과의 힘겨루기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김부회장은 1980년대 후반 ‘왕회장’(정주영 전 명예회장)을 보좌하면서 현대 대북사업의 터를 닦은 주인공으로, 대북사업에 관한 한 그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현회장 취임 이후 그룹 내부에서는 김부회장과의 알력설이 심상찮게 나돌았다. 현회장은 내부 결속을 다졌지만 대북라인만큼은 김부회장의 영향력이 여전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대북사업에 관한 한 김부회장의 독단적인 사업운영 방식이 현회장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지난달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하면서 현회장은 대북사업 독자행보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회장이 지난달 장녀 지이씨를 대동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것은 대북사업의 정통성을 오너 일가가 직접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재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또 현회장이 지난 3월 당시 고문이던 윤만준 사장을 공동 대표이사로 앉힌 것도 일종의 경고였다는 해석이다.

김부회장 거취는 뜻하지 않은 문제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게 된 김부회장은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8일 이후 서울시내 모처에서 입장을 정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회장의 뜻대로 백의종군(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부회장직을 유지하면서 대북사업을 지원하는 것)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은 가운데 용퇴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김부회장의 반격 가능성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한다. 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김부회장은 현회장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안다”면서 “이미 김정일 위원장 면담 이전에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북사업 어떻게 될까 김부회장으로 대표돼온 현대의 대북사업은 현회장 체제로 들어가게 됐다. 최근 현대그룹은 백두산, 평양, 개성 관광 등 굵직한 대북사업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김부회장이 없는 상태에서 대북사업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대그룹은 김부회장이 빠져도 사업추진에 큰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회장이 지난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대북사업의 새로운 수장으로 공식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위원장은 “금강산은 정몽헌 회장에게 줬는데 백두산은 현회장에게 줄 테니 잘해보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그룹은 3월 현대아산 대표이사로 취임한 윤만준 사장을 내세워 대북사업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우려의 시각도 있다. 대북사업의 핵심은 무엇보다 양측간 신뢰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 사후 북측과의 협상에 현대측 대표를 맡아온 김위원장은 1989년 정 명예회장이 최초로 방북할 때부터 수행해 지금까지 김정일 위원장과 4차례나 만나는 등 15년 이상 북측과 신뢰관계를 맺어왔다.

남북협력사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인사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금강산 사업은 이미 정착단계에 접어들었고 백두산이나 개성 관광도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김부회장의 거취와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고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부회장은 누구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한 김부회장은 현대그룹 대북사업의 산 증인이다. 1989년 정 명예회장이 최초로 방북했을 때 수행했고 1998년 1월 현대 남북경협사업단 단장을 맡으며 대북사업의 실질적 리더로 부상했다. 2000년에는 정 명예회장, 정몽헌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자리에 3차례나 동석했다.

그는 2001년 5월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에 책임을 지고 사장에서 물러났지만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오히려 입지가 강화됐다. 정 회장이 그에게 남긴 유서에 “명예회장님께는 당신은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정회장 사후 KCC와의 경영권 분쟁당시 KCC가 가신들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대부분의 가신들을 몰아냈지만 그 와중에도 김부회장은 살아남았다. 지금껏 살아 남은 마지막 가신인 셈이다.

조명

현대 관계자는 “예기치 못한 문제로 결국 타격을 입었지만 대북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놓은 그의 업적은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부/박경은기자 ki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