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아시아인]축구 때문에 잠 못 드는 베트남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유럽리그 TV중계에 국민들 열광

좁은 길거리에서 맨발로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

베트남에 처음 도착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거리에 수없이 많은 오토바이도, 뜨거운 베트남의 태양도, 하롱베이의 수많은 섬들도 아니었다. 베트남인들의 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기였다.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이다. 적도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오후 4시쯤이면 축구를 할 수 있는 공터에는 어김없이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돌멩이 골대에 운동화도 신지 않은 채 축구공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베트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비 때문에 진흙탕이 되어도 햇볕이 살갗을 도려내듯 뜨거워도 축구공을 차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베트남인들은 축구를 직접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보는 것을 더 즐긴다. 동네 축구부터 시도별 대항 축구 등 하찮게 보이는 시합도 열광하며 구경한다. 특히 베트남 국가대표팀과 외국팀의 경기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국민의 지대한 관심과는 달리 베트남 국가대표팀 수준은 아직 많이 미흡하다. 따라서 베트남과 경기하는 팀은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라오스 등 아시아에서도 약체 국가가 대부분이다.

1997년 SEA Games(동남아시아경기대회)에서 베트남이 극적으로 3위에 올랐을 때 시내에는 환호하는 국민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베트남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는 베트남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에 승리 “평생 잊지 못할 경기”

2003년 10월 한국과 베트남의 아시안컵 예선은 베트남인들이 평생 잊지 못할 경기였다. 한국은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후반 베트남의 스트라이커 팜 반쿠엔에게 기습 골을 허용해 0-1로 패했다. 이날 베트남인들은 마치 한국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고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와 같이 기뻐했다. 언론은 이날의 승리를 “베트남 축구 사상 최고 경기”라며 대서특필했고 골을 넣은 팜 반쿠엔과 외국인 감독 앨프리드 리달은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출신 리달 감독이 지병인 신장병으로 곧 신장을 이식해야 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베트남인 40명이 서로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겠다며 나섰다고 한다.

베트남 최고의 스트라이커 팜 반쿠엔. 한국전 골로 ‘영웅’이었던 그는 2005 SEA 게임 승부 조작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었다가 지난달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축구를 사랑하는 게 뭐 그리 놀랄 일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의 축구사랑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다른 나라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이다. TV에선 심야시간에 유럽 프로축구를 자주 방영한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지금처럼 유럽축구리그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 당시에도 유럽챔피언스리그 전 경기를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시차로 인해 새벽에 방송되는 경우가 잦았지만 많은 시청자들이 잠을 설치며 축구경기를 지켜보았다. 새벽 2시가 넘어도 골이 들어갈 때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필자가 1996년 여름에 처음 하노이에 도착해서 베트남어 어학연수를 받을 때이다. 마침 유로96 시즌이었는데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들이 모두 밤새워 축구를 봐 다음날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자 교수들은 전날 축구 결과를 흥분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다가 정작 수업은 피곤하다면서 일찍 마쳐 버렸다.

베트남인의 축구사랑은 남녀노소가 없다. TV에서는 시시콜콜한 외국 클럽 축구 결과까지 모두 방송한다. 베트남인들은 유명한 축구선수나 팀을 달달 외우고 있다. 월드컵과 베트남은 거의 관련이 없지만 베트남인들은 월드컵을 손꼽아 기다린다. 한국의 월드컵 전적을 한국인보다 더 잘 안다. 한국이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이라며 손을 치켜세우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에서 축구중계를 볼 때마다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축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베트남인’이라는 멘트에 왠지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베트남인’이 아니라 ‘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베트남인’이 타당할 것 같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여러 가지 국내의 현실문제와 정치이슈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의 국민이 남의 나라 축구에 잠 못 이루는 이상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축구도박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유가 어찌되었던 베트남인의 축구사랑은 단순히 즐기는 것 이상을 넘어섰다. 축구도박은 현재 베트남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걸 것이 없으면 마누라라도 걸고 축구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한국이 4강에 오르며 이변이 속출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축구 도박으로 인해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속출하였다. 축구도박으로 수백만 달러의 공금을 탕진한 사장과 이에 연루된 교통부 장관까지 해임되는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했다. 또한 불법 도박조직이 선수와 감독을 매수해 승부조작을 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올 1월에는 2005년 SEA게임의 승부를 조작한 선수들에게 무거운 실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아시아 아시아인

‘베트남이 월드컵에 출전했다면’이라고 상상해본다. 한국의 붉은악마와 거리응원 못지않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권원옥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위원 happy@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