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이 만난 사람] ‘원조공신’ 고승덕 의원

“국회는 내가 일해본 곳 중 가장 비능률적·비생산적”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원조 공신’으로 불린다. ‘공부의 신’(神), 그 가운데에서도 으뜸이라는 뜻이다. 실제 공부에 관한 한 고 의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타이틀 보유자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차례로 나온 학력만으로도 돋보인다. 여기에 웬만큼 공부 잘하는 사람도 몇년씩 머리 싸매고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하는 3대 국가고시를 대학 재학중에 모조리 합격, 고시 3관왕에 오른 실적이 있다. 그것도 사법시험은 최연소, 외무고시는 차석, 행정고시는 수석으로 합격했으니 가위 꿈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오늘날 스타 고승덕을 만들어준 유명세의 원천이다. 그가 30년 전에 따낸 3관왕 타이틀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가 명사가 된 것은 아니다. 학교 공부를 잘해도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인 고승덕을 있게 한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오히려 발이다. 변호사로, 방송인으로, 또 주식전문가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대중적 인지도와 호감도를 넓힌 덕분이다.

지난해 4월 총선을 통해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할 때 주변의 반응은 엇갈렸다. 한쪽에선 “또 한 명의 촉망받는 인재가 망가지게 생겼다”고 우려하고 다른 쪽에선 “고승덕이라면 낡은 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결과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이번 주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고 의원을 찾은 것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다. 한때 공신이었고, 다재다능한 스타급 초선의원이 국회에 들어가 느끼는 점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8일 의원회관에서 있었다.

전에는 직업이 7, 8개쯤 되지 않았습니까. 그 많던 일을 다 어떻게 했나요.
“중국 서커스를 보면 접시 여러 개를 한꺼번에 돌리는 묘기가 있잖아요. 떨어뜨리지 않고 돌리려면 정신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그동안 그렇게 일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국회의원이 된 뒤 그걸 정리하고 나니까 머리가 맑아져요. 정신건강이 좋아졌습니다.”

국회의원 생활 해 보니까 어떻습니까.
“처음 출마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걱정을 해 줬습니다. 정치판이라는 게 혼자 용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국회의원 각자가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일할 여건이 안 돼 있다는 문제는 있어요.”

어떤 점에서 일할 여건이 안 돼 있다는 거죠?
“국회가 하는 일이 법을 만드는 거잖아요. 의원이 직접 만들기도 하고 정부가 만든 법안을 심의해 통과시키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사안 하나하나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고 토론해 공감대를 가져야 하는데 가만히 있다가 밀어붙이는 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경우가 그랬습니까.
“지난해 가을 국회 때 민생법안 110여 개에 대해 논의가 진행중이었어요. 그런데 정부에서 법안을 다 만들어 놓고 움켜쥐고 있다가 11월에 뭉치째로 내놓는 거예요. 미리 제출하면 국회에서 따지고 들어 골치 아프니까 검토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는 거죠.”

정부가 꼼수를 부린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제가 국회에 들어와 보니까 우리나라는 3권 분립이 안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3권 분립이라면 입법·사법·행정이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행정부 권한이 강합니다. 같은 대통령 중심제인 미국에서는 정부에 법안제출권 자체를 주지 않습니다. 모든 법안 발의는 의회만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반대로 주요 법안의 90% 이상을 정부에서 만듭니다. 국회는 심사해서 통과시켜 주는 일만 하죠.”
입법부를 통법부(通法府)라고 비하하는 말이 나온 근본 이유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하는 게 상례로 돼 있다. 우리와의 구조적 차이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정부가 의정활동을 방해하는 게 있나요.
“저 같은 여당 의원에게도 정책자료를 잘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야당 의원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와 관련해 이런 저런 자료를 요청했더니 ‘상임위원회에서 의결하지 않는 한 줄 수 없다’고 해요. 카드회사들의 수수료 산정과 관련한 자료도 공정위에 요청했다가 거절 당했어요. 카드사 수수료가 거래대금 기준으로 2~3.5%예요. 이는 구멍가게 이윤보다 많은 거거든요. 가만히 앉아서 이런 높은 수수료를 챙기는 게 부당하다는 차원에서 수수료 산정의 근거가 되는 원가 자료를 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카드사 영업비밀이라면서 안 줍니다.”

국정감사를 활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국감은 20일로 기간이 정해져 있어요. 이 기간 내에 끝내려면 기관별로 할당되는 시간이 하루에 불과합니다. 의원 1명에게는 겨우 15분이 주어지고요. 이 구조로는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국회 시스템이 정부를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은 다소 생소하다. 그보다 우리는 국회의원이 쓸데없이 많은 자료를 요구해 정부 업무를 방해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에 익숙해 있다. 정부보다 국회에 더 부정적인 것이다.

국회는 잘못이 없나요. 정부쪽에선 법안을 제출해도 국회에서 제대로 심의하지 않는다고 늘 불만이던데요.
“물론 책임이 크죠. 국회가 안 열리니까 법안을 심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위원입니다. 정무위에 들어오는 모든 법안이 소위의 심사를 거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소위가 열린 날이 열흘도 채 안됩니다. 여야가 정쟁에 매달려 싸우다 보니 본연의 임무인 법안 처리는 뒷전인 거죠. 그래도 국회의원에게는 무슨 벌칙이 없습니다. 회의에 빠졌다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시간에 쫓기게 되면 법안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처리하게 됩니다. 국회는 제가 일해 본 곳 중에서 가장 비능률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입니다.”

고 의원님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는 법안에 찬성투표를 한 적이 있습니까.
“많죠. 물리적으로 다 검토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본회의에 오기 전에 해당 상임위에서 충분히 검토했을 것으로 믿고 투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하는 국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상시국회 제도로 바꿔야 합니다. 상임위 회의를 무조건 주 1회 연다고 못박아 놓으면 의사 일정을 가지고 여야가 밀고 당기고 할 필요가 없잖아요. 법원 재판도 주 1회열리는데 민생을 다루는 국회가 그 정도는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쟁점법안은 처음부터 상임위에서 다루지 말고 본회의로 넘기는 게 좋겠어요. 거기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거든요. 그러면 몇몇 쟁점법안 때문에 상임위의 다른 민생 법안도 묶이는 문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사실 방송법이나 금산분리관계법 같은 쟁점법안은 전체의 5%도 안되거든요. 대부분의 법안은 여야 입장이 다를 게 없어요.”

방송법을 말씀하셨는데 당시 파동 때 어디 있었나요. TV에 안 비치던데요.
“법안이 통과되기 바로 전날 밤에 본회의 의장석 앞에서 담요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교대로 본회의를 지키는데 그날이 제가 맡은 날이었어요. 천장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이게 뭔가. 이럴려고 내가 국회의원이 됐나’하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아내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잠깐 회의장을 나갔는데 그 사이에 야당이 밀고 들어왔어요. 그 바람에 입구가 봉쇄돼 한동안 밖에서 맴돌다 나중에 들어가 투표했습니다.”

운좋게 몸싸움을 피할 수 있었군요. 몸싸움은 고 의원님에게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몸싸움이라면 국민들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싫어하잖아요.”

“상시국회 제도로 바꿔야 합니다. 상임위 회의를 무조건 주 1회 연다고 못박아 놓으면 의사 일정을 가지고 여야가 밀고 당기고 할 필요가 없잖아요. 법원 재판도 주 1회 열리는데 민생을 다루는 국회가 그 정도는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도 하기 나름이라고 했는데, 해서 성취를 이룬 일이 있나요.
“정책간담회를 종종 합니다. 한 사안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무엇이 문제인지 얘기를 듣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거죠. 올해 초에 신용소외자 문제로 간담회를 가졌어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일할 능력은 있는데 담보 능력이 없어 200만~300만원을 사채로 빌려 썼다가 파탄의 늪에 빠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국가가 이들에게 담보 없이 신용으로 돈을 빌려 주자는 정책을 냈습니다. 혹시 일부 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안타깝게 신용소외자가 되는 경우를 막을 수 있으면 국가적으로 그게 더 낫다는 차원입니다. 제가 관련법안을 대표 발의해 4월에 통과됐고, 지난 7월부터 시행중에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갑근세를 낸 기록만 있으면 500만원까지 빌려 줍니다.”
듣고 보니 획기적인 정책이다. 담보로 잡힐 것도 없는 어려운 사람에게 근로능력만 믿고 정부가 몇백만원을 꿔 주는 정책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의해 돈을 빌려간 사람이 7, 8월 두 달 동안 1만5000명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수요가 적은 이유가 뭘까.
“정치부 기자들은 이런 정책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더라고요. 보도가 안되니까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거죠.”
국회의원의 정책활동이 권력 암투만큼 흥미있는 기삿거리는 안돼도 의미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올해 초 시민단체인 희망제작소는 여의도통신과 공동으로 주관한 2008 올해의 정책보고서에서 고 의원에게 대상을 줬다. 299명 국회의원 가운데 정책활동에선 고 의원이 1등을 했다는 성적표이다.

신문에 난 한나라당 계파 분류를 보면 어떤 때는 친이계, 어떤 때는 중립, 또 어떤 때는 아예 이름이 나오지 않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친이계에 가깝죠. 하지만 초선의원이 어느 계파에 줄 서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회에서도 당론에 따른 일사불란한 투표는 최소화하고 개별 의원의 자율성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나라당 내에 설치된 빈곤없는 나라 만드는 특별위원회, 즉 빈나특위의 간사를 맡아서 맹활동 중이던데요. 빈나특위의 강명순 위원장은 빈민운동가 출신이니까 자연스럽지만 고 의원님은 서민 이미지와 거리가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 개인 재산이 74억원이나 되잖아요.
“저는 정말 서민 출신인데 사람들이 부잣집 아들로 오해하더라고요. 돈은 저에게 숫자에 불과합니다. 굳이 의미가 있다면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의정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을 뿐이죠. 국회의원으로서 이런 저런 사람들과 밥 먹는 데 드는 돈을 제가 의정활동교제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한 달에 1500만~2000만원쯤 듭니다. 다 제 사비로 나가죠. 지난해 후원금도 1억원쯤 들어왔지만 500만원도 안 썼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해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디에 쓸 요량인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입 밖에 냈다가 나중에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개인적인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시간을 아끼기 위해 TV는 아예 보지 않고, 신문은 1주일치를 30분 만에 본다고 하셨는데 요즘도 그렇습니까.
“아뇨, 뉴스채널은 수시로 봅니다. 경제 흐름을 파악해야 하니까요. 신문은 지금도 이틀치를 한 번에 봅니다. 신문기자들에게 미안한 말 같지만 이런 저런 사건사고나 정치인이 무슨 말을 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시그널을 찾는 거예요. 큰 흐름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시간이 남을 땐 주로 무얼 합니까.
“자투리 시간에 할 일을 늘 쌓아 둡니다. 그런 시간이 나면 전화를 하거나 자료집을 보죠.”

이종탁이 만난 사람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없는 거네요. 취미생활은 없나요.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투놀이 같은 것은 어떤가요.
“주 3회 30분간 수영장에서 개헤엄 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아내와 밤 12시쯤 마트에 가서 장 보는 것도 즐거운 시간입니다. 고스톱은 분위기에 맞춰 1년에 세 번쯤 하는데 그때마다 홍싸리와 흑싸리가 헷갈리더군요.”
인터뷰 말미에 그가 보너스 발언을 하나 했다. “향후 3, 4년 내에 종합주가지수가 3000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이다. “경기침체는 2007년 말에 시작해 1년 반만인 올해 초에 끝났으며, 내년에 더블딥이 올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이상 회복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주식 사 놓으면 1년 내 부자된다”고 했을 때 “주가상승을 단정할 수 없다”며 조심스럽게 비판한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이제 낙관론으로 돌아섰다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만.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